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70화 (71/202)
  • 70. 귀감

    커다란 박스 하나에는 회수된 초대장이 수북했다. 하지만 모두가 달려들어 한 번에 숫자를 세니 금방 끝이 났다.

    동반 인원까지 계산이 끝이 나자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오른손을 불끈 쥐었다.

    “대사님 저희 목표 인원이 300명이었죠?”

    “네 맞습니다. 몇 명이나 왔나요?”

    티를 내진 않았지만 모두가 목표 인원을 넘었단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이젠 부임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김용수 대사가 얼마나 큰 성과를 기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긍해하고 있었다.

    이미 다른 나라의 공관에서 국경일 행사를 여러 번 치러 본 안지용 참사관은 행사 당일까지도 목표 인원을 채우지 못할 거라 예상했다. 그만큼 300명이라는 목표 인원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놀라지 마세요.”

    “아,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임윤아!”

    이제 몸이 긴장하는 것조차 체력에 부담이 되는지 나도 모르게 살짝 짜증을 내 버렸다.

    윤아는 알겠다며 웃으며 숫자를 공개했다.

    “665명. 공식적으로 초대장을 가지고 방문한 손님들의 숫자가 665명입니다.”

    “헐…….”

    “600명이 넘었다고요?”

    “대박.”

    공식적으로 집계된 인원만 600명이 훨씬 넘었다. 초대장이 없거나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인원들까지 합치면 좀 더 많을 것이다.

    목표했던 인원의 두 배를 넘어 버린 결과였다.

    엄청난 결과에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기보다는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소리를 지를 힘도 남아 있지 않아서겠지.

    “어휴 다행이다. 정년 퇴임 못 하는 줄 알았네.”

    “이 정도면 다른 나라의 큰 공관들과 비교해도 잘 끝난 거 아닌가요?”

    “적어도 제가 있었던 공관에서 이 정도로 많은 손님은 온 적은 없었습니다. 아마 미국 대사관 말곤 최고 기록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윤아의 질문에 안지용 참사관이 나서서 오늘의 결과가 성공적이란 것을 증언해 주었다.

    미국 대사관이야 일반 만찬 행사에 400~500명이 초대되는 경우도 있다는데 뭐.

    고작 5명이 전부인 작은 공관에서 이런 결과를 냈다는 건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오예! 성공이다!!!”

    “주상 전하 만세! 김용수 전하 만세 만만세!”

    “아이참 이 사람들아.”

    김준우 서기관은 남아 있는 힘을 쥐어짜서 만세 삼창을 했다. 오늘만큼은 김용수 대사가 진짜 왕이었다.

    무리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채택하고, 그것을 잘 이끌어 준 김용수 대사를 직원들은 진짜 왕으로 받들고 싶어질 것이다.

    이번 국경일 행사의 성과를 본부에 알리는 보고서를 쓸 생각에 김준우 서기관은 벌써부터 입꼬리가 들썩이는 것 같았다.

    또다시 최우수 공관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최고점의 인사 고과 점수, 그리고 두둑한 보너스까지.

    많은 것을 기대해 볼 수 있었다.

    김준우 서기관의 출세욕이 다시 한번 강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외교부 본부 장관실.

    “이번 각 공관들 국경일 행사에 대한 보고서 정리가 끝났나요?”

    “네 안 그래도 그거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뭐 특별한 거 있나요?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알아서들 잘했겠죠.”

    장관은 물론이고, 외교부 직원들 역시 국경일 행사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었다. 큰 행사긴 했지만 그냥 평범하고, 무난하게 넘어가는 것이 가장 잘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모두들 적당히 넘어가곤 했다.

    파나르처럼 작은 공관들은 관저가 아니라 호텔이나 큰 식당 같은 곳을 빌려 그냥 간단하게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은 그렇긴 한데 좀 재밌게 진행한 곳이 있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재미요? 국경일 행사가 재미있어 봤자지 뭐.”

    “아무리 장관님이라고 하셔도 이렇게 하는 곳은 본 적이 없으셨을 겁니다.”

    과장은 간단한 자료 한 장과 함께 영상을 하나 재생했다. 전문적으로 촬영한 영상은 아니었지만 행사의 시작부터 각종 볼거리와 초대된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직원들의 복장 등이 찍혀 있었다.

    “이게 국경일 행사 영상이라구요?”

    “네 특이하죠? 중간에 건배 주고받는 것만 빼면 전체적으로 꽤 재밌더라구요.”

    다른 공관들도 최근엔 사람들과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너튜브나 안스타그램을 직접 개설해 소통을 하곤 했다. 하지만 대부분 그냥 생색을 내기 위한 업로드일 뿐 볼만한 건 없었다.

    하지만 이 영상은 재생 시간만 봐도 대충 찍은 영상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이거 파나르인가요?”

    “네 맞습니다. 조선 시대 때 외국 사신단들을 환영하는 연회를 주제로 행사를 주최했다고 하네요.”

    “허허허. 김 선배가 원래 이렇게 대담한 사람이었나.”

    “이미 한 번 퇴직하신 분이라 몸을 사리거나 하진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거 같네요. 그러니 이렇게 훌륭한 결과물이 나오는군요.”

    역시나 외교관 출신의 장관은 현직 공무원이 이런 결정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잘 알고 있었다. 퇴직을 앞둔 말년 공관장들도 뭔가 도전했다가 혹여나 연금 수령에 문제라도 생길까 봐 몸을 사리기 일쑤였다.

    김용수 대사 역시 퇴직 후 재부임된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행사를 치르진 않았을 것이다.

    대령숙수 옷을 입고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는 장덕수 셰프의 영상을 보며 장관은 혼자 중얼거렸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 젊음을 등에 업으니 거칠 게 없구나.”

    신선한 주제도 주제지만 보여지는 숫자 역시 파나르 대사관은 독보적이었다.

    “그럼 이번엔 공관들 국경일 행사의 평균 방문객 수는 어떻게 되나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제외하곤 150명 정도입니다.”

    “파나르 대사관은요?”

    “보고된 바로는 665명입니다.”

    “굉장하군요.”

    외교적으로 가장 밀접한 4개 나라의 대사관은 아예 규모 자체가 다르니 이런 통계에서도 잠시 제쳐 두고 보고를 했다.

    4개국을 제외하고도 꽤 큰 공관들은 많았지만 올해 방문객 수는 파나르 대사관이 모든 공관들을 압도했다.

    “늦게 감을 잡은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김 선배가 독주를 하는군요.”

    “각국의 젊은 공관장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좋은 사례인 것 같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과장님도 나중에 공관장으로 파견되면 젊은 공관장들의 귀감이 되어 주세요.”

    “제가 그럴 깜냥이 될지 모르겠지만 꼭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참에 공문을 돌릴까요?”

    “네 이런 일들을 계기로 젊은 외교관과 공관장들이 겁먹지 말고 새로운 걸 많이 시도해 줬으면 좋겠어요. 세상이 많이 변했잖아요? 언제까지 식탁에 앉아서 의미 없는 격식만 차리면서 외교를 할 건가요.”

    장관 역시 김용수 대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술과 음식을 마시며 하는 외교의 시대는 지났다.

    말로는 매번 새로운 걸 시도하라고 후배들을 격려하지만 한번 굳어진 사내 문화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고시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외교관들의 나이 역시 젊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아이디어를 썩히기엔 너무 아까웠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게 낫겠죠. 영상도 잘 편집해서 같이 배포해 주세요. 제가 장관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진 못하겠지만 있는 동안엔 맘껏 도전하라고 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관님.”

    과장 역시 작지만 힘을 실어 준 장관이 고마웠다. 본인도 외교부 일원으로서 이런 변화가 생기는 건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으니까.

    몇 년 후 자신이 공관장으로 파견되면 아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배경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 * *

    파나르 대사관 아침 회의.

    “잘들 쉬었어요?”

    “네 주말 동안 정신없이 잠만 잔 것 같습니다.”

    “허허허 저는 이틀 가지곤 회복이 안 되던데, 우리 공관만이라도 주4일제를 도입했으면 좋겠네요.”

    아무리 잃을 게 없는 공관장이라고 해도 그것까진 힘들었다. 한국 교민들을 위해서라도 나태해질 순 없었다.

    “그것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는 딱 한 번만 아들과 와이프 없는 주말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허허 저번엔 가족들과 같이 살고 싶다고 울고불고하지 않았나요? 그렇죠 장 셰프?”

    “네 제가 증언하겠습니다.”

    “그래서 딱 한 번만이라고 한 겁니다….”

    “하하하하.”

    준우의 당황하는 표정 덕에 모두가 웃으며 회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오늘은 나도 특별히 관저가 아니라 대사관으로 출근을 했다. 국경일 행사에 대해 알려 줄 내용도 있고, 전해 줄 것도 있다고 해서.

    “다들 알다시피 이번 국경일 행사는 아주 성공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본부에서도 이번 성과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부분이고, 장관님이 직접 격려문과 작은 선물까지 전해 주었습니다.”

    “와아!”

    용기를 내 좋은 사례를 만들어 준 파나르 대사관에 장관은 자필로 쓴 격려문과 선물 세트를 보냈다.

    나중에 있을 보너스는 별도고 이건 장관이 개인적으로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번 사례가 전 공관에 알려져서 앞으론 비슷하게 국경일 행사를 치르는 곳이 많아질 겁니다. 국경일 행사뿐 아니라 관저 오, 만찬 행사나 모든 행사 등을 진행할 때 기존의 관례를 꼭 지킬 필요는 없다는 장관님의 지시입니다.”

    “오오오….”

    “이게 또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네요.”

    “모르긴 몰라도 장관님이 우리 파나르 대사관 직원들의 이름은 이제 외우지 않았을까 싶네요.”

    “정말요? 장관님이 저희의 이름을요?”

    김용수 대사는 장관과의 통화에서 각 직원들이 맡았던 업무를 자세히 설명하고, 공을 돌렸다.

    모두가 함께 이뤄 낸 성과였지만 먼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장관 역시 김용수 대사의 말을 전해 듣고, 특별 선물도 직원별로 따로 준비해 보내 주는 성의를 보여 주었다.

    “안지용 참사관 거, 김 서기관, 임 행정원, 그리고 장 셰프 거까지. 각자 다 다른 선물이니깐 집에 가서 열어 보세요. 괜히 맘 상할 수 있으니까.”

    “하하하 그러면 선물 바꾸기 찬스 한번 쓸까요?”

    “장관님의 성의를 무시하지 마세요, 김 서기관 허허허.”

    “죄송합니다.”

    특별 선물까지 받은 나와 직원들은 아침부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참 이번에 공문이 돌고 나면 좀 귀찮은 연락들이 많이 올 거예요.”

    “귀찮은 연락이요?”

    “다들 동기나 아는 선후배들 있지 않아요?”

    안지용 참사관은 당연하고, 김준우 서기관도 해외 파견이 처음이지 외교부 짬밥은 제법 오래되었다. 본부에서 함께 일했던 동기나 선후배들이 여러 나라 공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어떻게 행사를 치렀는지, 돈은 얼마나 들었는지 이것저것 물어보는 연락이 많이 올 거예요.”

    “아… 그렇겠네요.”

    “인트라넷에 번호를 숨겨 놓든지 그게 아니라면 기왕 알려 줄 거 친절히 잘 알려 줘요.”

    “네 알겠습니다.”

    “장 셰프한테도 그런 연락들이 올 수도 있으니 알고나 있어요.”

    “괜찮습니다. 저는 외교부 출신도 아니고, 절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요리사들은 나보다 나이도 많을 거고, 내 정보는 외교부 인트라넷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았으니 연락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것이다.

    뭐 연락이 온다 해도 서로 정보 교환을 할 수 있으니 오히려 좋을 수도 있고.

    그보다 빨리 장관님이 보낸 특별 선물을 풀어 보고 싶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관저로 돌아가 선물 상자를 열었다.

    “헐 대박. 장관님이 이걸 알고 계신다고?”

    선물 상자에 들어 있는 것을 보자 반가움보다 놀라움이 앞섰다. 이건 중견 요리사들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내 선물을 보곤 전혀 관심이 없던 다른 직원들의 선물이 뭔지 궁금해졌다. 나에게만 이런 맞춤 선물을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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