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69화 (70/202)
  • 69. 국경일 행사

    “헤이 미스터 장.”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의 알렉스가 서 있었다.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넸지만 알렉스의 반가운 얼굴은 나를 거쳐 조금 옆으로 비켜났다.

    “그리고 제스도 있었네?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너도 잘 지냈어?”

    두 사람은 꽤나 오래된 인연인 듯 서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알렉스 잘 지냈어요?”

    “미스터 장 덕분에 우리 쿠므스가 아주 잘 팔리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라이벌 이 막걸리를 맛보러 왔죠. 제스 인사해. 내 쿠므스를 살려 준 은인이야.”

    알렉스는 나와 제스의 사이에서 서로를 소개해 줬다.

    “반가워요. 제스라고 합니다. 우리 이미 대화는 나눌 만큼 나눴죠?”

    “반갑습니다. 그러게요. 장덕수 셰프라고 합니다.”

    “응? 벌써 그렇게 친해졌어? 어때 제스? 미스터 장 음식 솜씨가 굉장하지? 네가 보기에도 장난 아니지?”

    마치 내가 제스에게 인정받길 바라는 듯 알렉스를 대답을 재촉했다. 미식가 알렉스가 이 정도로 애원하는 걸 보면 제스라는 인물이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알렉스 잠시만.”

    제스는 알렉스의 팔뚝을 끌어당겨 자리를 조금 옆으로 옮겼다. 그러곤 잠시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내 앞으로 돌아왔다.

    “미스터 장 많이 바빠요?”

    “네 조금 바쁘네요. 무슨 일이세요?”

    “내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이 있대서요.”

    “네 지금 하세요. 잠시는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통역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파나르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으로… 그때 같이 왔던 윤아 씨도 여기에 있죠?”

    “통역까지요? 있긴 있지만….”

    윤아를 불러 달라는 말은 뭔가 진지한 얘기를 하겠다는 의미.

    간단한 소통 정도는 영어나 파나르어로 가능했지만 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길게는 얘기할 수 없어요. 할 일이 많이 남았거든요.”

    “알겠어요. 걱정 마요. 용건만 말할게요.”

    주위를 잠시 둘러본 뒤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윤아를 주방 입구로 불러왔다.

    바쁜 와중에 불려 온 윤아는 알렉스 친구라는 사람의 정체를 듣자 눈알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뭐야? 갑자기 왜 놀라는데?”

    “이 사람이 제스라는 브랜드 사장이래.”

    “제스? 그게 뭔데?”

    제스의 용건은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그냥 자기의 이름과 같은 제스라는 브랜드 하나만으로 모든 설명이 끝이 났다.

    윤아가 필요했던 이유는 통역보단 자신의 브랜드를 더 잘 설명해 줄 것 같아서였다.

    “제스 카페, 제스 케밥, 제스 스시, 제스 비어까지 파나르 요식업의 완전 큰손이야. 나 제스 비어 새우튀김 되게 좋아하는데.”

    “엥? 그 파란색 간판 그거 말하는 거야?”

    “오 너도 알아?”

    “알 것 같아. 군데군데 자주 보이길래.”

    “이 사람이 손대는 것마다 성공이지.”

    알렉스의 친구 제스는 파나르에서 알아주는 요식업자였다. 사실 파나르 내에서 이 정도로 성공한 프랜차이즈 회사는 전무할 정도로 성과는 독보적이었다.

    “그럼 이분이 거기 대표님이야?”

    “응 사장님이래.”

    “그렇구나. 근데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래?”

    윤아는 놀라움을 잠시 접어 두고 제스와 대화를 나눴다. 몇 분 대화를 나누더니 윤아는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덕수야. 제스가 너랑 일하고 싶대.”

    “응? 무슨 일? 지금도 할 일이 산더미구만.”

    “그런 거 말고 같이 사업하고 싶다고!”

    제스는 자신의 명함 한 장을 나에게 직접 건넸다. 그러곤 다시 윤아에게 몇 마디 전하더니 쿨하게 뒤돌아섰다.

    “미스터 장, 내 친구에게 시간 내 줘서 고마워요. 이 친구의 혀를 만족시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역시 미스터 장은 다르군요. 오늘 음식들도 너무 훌륭했어요. 다음에 또 봐요.”

    “네 알렉스도 조심히 가요. 와 줘서 고마워요.”

    윤아는 내 손에 쥐어진 명함이 마치 거액의 수표라도 되는 양 안절부절못했다.

    “제스가 원하는 월급, 원하는 조건 전부 맞춰 줄 테니 자기랑 한국 식당 사업하자고 했어.”

    “응? 그새 그런 것까지 조율했어?”

    “길게 말할 것도 없었어. ‘돈, 조건 다 최고로 맞춰 줄 테니 연락 달라고 전해 줘.’ 그 말이 전부였어.”

    “화끈하네….”

    “어쩔 거야?”

    “어쩌긴 뭘 어째. 일단 내 할 일부터 해야지.”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깊게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그보다 부족한 음식을 빨리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제스의 파란 명함은 뒷주머니에 넣어 두고, 주방으로 들어가 가스 불을 켰다.

    “어휴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주방 보조도 몇 명 더 부를걸.”

    설거지나 정리를 담당하는 알바들은 충분했지만 결국 음식을 완성하는 건 전부 내 몫이었다. 호텔에서처럼 확실한 분업을 통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런지 시간에 쫓겨 음식을 만들어 냈다. 거의 찍어 낸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했다.

    그럼에도 퀄리티는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덕수야.”

    “응 윤아야.”

    “음식 다 끝났어?”

    “응 이제 슬슬 끝이 보이네. 더 만들고 싶어도 만들 재료도 안 남았다. 좀 모자라도 그냥 끝내야지. 근데 지금 몇 시나 됐어?”

    알렉스와 제스를 보내고 난 후부터는 화장실도 한번, 아니 고개도 한번 제대로 들지 못하고 주방에만 박혀 있었다. 김용수 대사의 토스트가 시작되자 준비된 음식과 술은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 잠시만. 12시 반 좀 넘었네.”

    “뭐? 12시 반? 밤?”

    “오후 12시 반이면 더 큰 일 아니야?”

    “와아… 진짜 자정을 넘겼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자정을 넘길 때까지 행사는 끝이 나지 않고 있었다.

    마당으로 나가 보진 않았지만 여전히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걸로 봐서 김용수 대사의 토스트도 아직 끝나질 않았던 거겠지.

    “손님들 반응은 어때?”

    “반응? 아직 모르겠어. 나도 일만 하느라 정신없었거든.”

    “그렇겠지. 너도 화장실 한번 못 가고 일했겠지.”

    윤아는 앞머리가 젖어 있을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내 말에 그냥 살짝 웃고 말았다. 아마도 공감한다는 의미.

    우리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옷에 뭐가 묻었는지도 모른 채 몇 시간을 뛰어다니며 고군분투했다.

    “대사님은 어디에 있어?”

    “저쪽에 계시는데 너도 가서 좀 구해 줄래?”

    “구해?”

    비록 땀은 흘리지 않더라도 묵직한 곤룡포를 입고 수백 명의 손님들을 상대하는 김용수 대사의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 나왔다. 억지로 미소 짓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말에도 자정을 넘기면 슬슬 졸릴 나이인데….

    김용수 대사는 분명 몇 시간 동안 한 번도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을 거다.

    “안 참사관님, 김 서기관님 둘 다 토스트 행렬에 끼어들었는데도 아직 꽤 남았어.”

    “그럼 너랑 나도 같이 가서 돕자.”

    일개 직원인 나와 윤아는 각자 혼자서 손님들을 상대할 순 없다. 윤아는 외교관들만큼 대화할 주제가 없었고, 나는 윤아만큼 파나르어를 할 수 없으니, 둘이 합쳐서라도 몇 명 상대해 줘야 했다.

    나는 음식 얘기라도 나눌 수 있으니 손님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근데 덕수야. 오늘 네 음식이 맛있긴 맛있었나 봐.”

    “왜?”

    “이거 봐 봐.”

    안지용 참사관에게 붙은 손님을 마지막으로 국경일 행사는 끝나 가고 있었다. 나도 이제야 조리모를 벗고 잠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윤아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두툼한 뭔가를 꺼내더니 나에게 전부 건넸다.

    “명함이네? 파나르에선 종이 명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이 확실하네. 보는 사람마다 명함을 줬나 보다.”

    길고 쓸데없는 인사 대신 자신의 명함을 건넸겠지. 진짜 필요에 의해서 건넨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냥 예의상 또는 가벼운 의미로 건넸을 거라 생각했다.

    “이거 다 너한테 전해 달라는 거야.”

    “나한테? 이걸 왜?”

    대충 봐도 50~60장은 되어 보이는데.

    나는 처음에 인사할 때를 제외하곤 계속 주방에만 있었는데 나를 어떻게 알고 이 명함들을 전해 줬다는 거지?

    “내 얼굴도 못 본 사람이 대부분일 텐데 왜 나한테 줘?”

    “아까 그 제스라는 사람 있지?”

    “응.”

    “파나르에서 음식 관련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제스를 모를 수가 없어. 우리나라 백정원 아저씨랑 비슷한 느낌이지.”

    그렇긴 하겠지.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장악했는데 그게 또 자금력이나 빽을 이용해서가 아니라 진짜 실력으로 장악한 거라면 사람들 사이에선 전설처럼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제스를 알아본 사람들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제스가 누구랑 대화하는지, 또 무슨 말을 하는지 완전 귀 기울이고 있었을걸?”

    “그렇구나. 나라도 그랬겠다.”

    “아까 우리 알렉스랑 제스랑 나랑 대화하는 것도 다 봤나 봐. 그다음부턴 수십 명이 나한테 자기도 셰프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안달을 하더라.”

    “그랬어? 귀찮았겠네 괜히.”

    “죽는 줄 알았지. 저기 주방 입구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으니깐 가 보세요라고 하려다가 꾹 참고 명함 받는 걸로 겨우 달랬지.”

    “그랬으면 오늘 행사는 뭐 쫄딱 망했을걸. 수고했어 윤아야.”

    윤아는 진심으로 질린 듯 손사래를 쳤다.

    묵직한 명함 뭉치를 던지듯 나에게 건넸다. 나는 어차피 사업할 생각은 없으니 그대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때 관저 마당 가운데서 절규와 가까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영원한 안녕을 위하여!”

    “브라보!”

    목소리가 갈라질 대로 갈라진 안지용 참사관은 온 힘을 다해 쥐어짜 소리를 친 뒤 남은 막걸리를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잔디밭 위로 드러누웠다. 그게 마지막 손님과의 토스트였다.

    그걸 본 나와 다른 직원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드디어 끝났습니다 대사님.”

    “하들 스거 많하허호.”

    “네? 뭐라고요?”

    무거운 곤룡포를 벗어 돗자리처럼 깔고 드러누운 김용수 대사는 목소리조차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백 명이 훌쩍 넘는 손님들 중 절반을 넘게 상대했으니, 성대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내가 엄살 부릴 때가 아니었네. 난 아직 적어도 목소리는 나오는데.”

    “그래도 한국까지 출장도 갔다 오시고, 고생 많으셨어요 서기관님도.”

    “후아 그때가 차라리 좋았네요.”

    시계는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파나르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몇 시간 내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끊임없이 춤을 추며 행사를 즐겼다.

    남아 있는 음식들도 거의 없었고, 준비해 둔 답례품 역시 전부 소진되었다. 행사를 충분히 즐기고 간 손님들도 특별하게 포장된 답례품을 전부 챙겨 갔기 때문에 남는 건 하나도 없었다.

    “대사님 식사는 안 하셔도 되겠습니까? 괜찮으시면 남은 국물에 밥이라도 한 숟갈 넣어서 드시는 게….”

    힘들게 몸을 일으킨 나는 김용수 대사에게 식사를 권했다. 핼쑥해진 얼굴을 보자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밥알 몇 개라도 입에 넣어 주고 싶은 심경.

    하지만 김용수 대사 역시 힘들게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다른 분들은 식사 좀 안 하셔도 되겠어요?”

    “괜찮아요. 어찌 됐든 오늘 제 입은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이젠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도요. 입맛이 없네요. 그냥 이렇게 누워 있다가 잠들고 싶어요.”

    나도 마찬가지였다.

    몇 시간, 아니 몇 날 며칠 동안을 음식 냄새만 맡고 지냈으니 뭘 먹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냥 이 선선하고, 시원한 밤공기를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단지 공기가 좋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걱정하고, 부담되었던 일들이 끝이 났고, 잘 마무리가 되어서 이런 감정도 느낄 수 있는 거겠지.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마음만큼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조선 시대 궁을 재현한 국경일 행사가 조롱거리가 될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걸 불태울 정도로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뭐 중요한가?

    부끄럽지 않게 준비했고, 1%도 아쉬울 것 없이 모든 걸 쏟아부었으면 된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가 오늘의 일에 대해 악평을 한다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건 뭣도 모르는 놈들이 지껄이는 것일 뿐일 테니까.

    욕을 한다 해도 함께한 직원들만 그 자격이 있는 거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이제 슬슬 퇴근해야죠. 이대로 있다간 잔디밭 위에서 잠들겠어요.”

    “잔디밭이 우리 집 침대보다 편할 줄은 몰랐네요.”

    “대사님도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야 겨우 목소리가 조금 새어 나오는 김용수 대사가 몸을 일으키며 직원들을 격려했다.

    곧바로 퇴근을 했어도 늦은 시간인데 이대로 있다간 아침이 밝아 올 것 같았다.

    “정리하는 건 내일모레부터 합시다. 내일은 그냥 이대로 두고, 하루만 좀 푹 쉽시다.”

    “네 알겠습니다.”

    정리까지 이어서 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을 시켜서 한다 해도 누군가 한 명쯤은 통솔을 해야 하는데 그럴 여유조차 없이 모든 인원이 행사에 투입되었다.

    김용수 대사는 내일,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 말고 쉬라며 직원들을 일으켰다.

    “근데 윤아 씨.”

    “네 대사님.”

    “오늘 손님들이 총 몇 분이나 방문했나요?”

    초반에는 윤아가 직접 대문에 서서 들어오는 손님들의 초대장을 회수하며 숫자를 셌다. 그 후에도 틈틈이 들어온 손님들은 경비원에게 초대장 회수를 부탁했다.

    초대장에 동반 인원을 체크해 달라고 했으니 이제 그걸 카운트해 보면 공식적으로 방문한 인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잠시만요. 한번 세어 보겠습니다.”

    “네. 그것만 하고 곧바로 퇴근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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