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68화 (69/202)
  • 68. 행사의 시작

    한국으로 출장을 떠난 김준우 서기관은 외교 행낭을 통해 커다란 짐 몇 개를 보내왔다.

    여태 국경일 행사를 위해 구매했던 품목들과는 전혀 다른 내역이었다.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파나르 대사관에는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다.

    “대사님, 이 용품들은 저번에 도시락을 팔았던 돈으로 구매하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아마 본부에서도 이런 걸 구매한다고 하면 허가 안 내 줬을 텐데, 이건 우리가 직접 번 돈이니깐 편하게 써도 됩니다.”

    빨간 곤룡포며, 조선 시대 숙수의 복장이며, 한복 등등.

    졸업 사진을 찍거나 할로윈 파티 때나 쓸 법한 물건들을 공금으로 구매하려면 꽤 번거로울 뻔했다.

    하지만 올해 파나르 대사관은 예상치 못했던 수입이 있었기에 본부를 거치지 않고 이런 것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이게 다 장 셰프 덕입니다.”

    “아닙니다. 전부 다 같이 한 거죠.”

    나는 계속되는 칭찬에 쑥스러움을 견디며 공항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잘못되면 김용수 대사가 책임을 진다고 했지만 기왕이면 아주 성공적인 행사가 되길 바랐다.

    며칠 동안 관저에는 축등이 설치되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내었고, 분홍색 연꽃이나 짚으로 만든 멍석 같은 소품도 몇 개 가져다 놓았다.

    “이야 이제 좀 그럴싸한데요?”

    “그러게요. 처음엔 좀 장난스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꾸며 놓으니깐 이쁘네요.”

    안지용 참사관과 김준우 서기관은 자기들이 꾸며 놓은 관저가 무척 맘에 드는지 연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늘을 만들기 위해 쳐 놓은 커다란 텐트 위에도 비단 천 조금을 걸어 놓으니 진짜 궁궐을 연상케 했다.

    “오늘부터라도 콧수염을 길러야 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그래야 이 갓이랑도 어울릴 것 같아요.”

    “저는 일부러 이발 안 하고 있어요.”

    “왜요?”

    “상투 틀려구요.”

    “하하하하.”

    우려스러웠던 처음과 달리 두 사람은 신이 나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장 셰프님. 셰프님 옷은 입어 보셨어요?”

    “네 입어 봤는데 영 어색하네요.”

    “우리 대령숙수님도 콧수염을 좀 길러야지 어울리겠네요.”

    “대사님 옷이 제일 궁금하긴 해요.”

    “우리 대사님한테 곤룡포가 어울릴지 기대되네요.”

    나도 이런 복장으로 일해 본 적은 처음이라 어색했지만 썩 맘에 들었다.

    신기해할 사람들의 표정이 오히려 기대가 되었다.

    다들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퇴근 후에도 관저를 꾸미러 오기까지 하며, 국경일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목표 인원은 300명.

    초대장에 행사 내용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지만 좀 더 확실한 호객 행위가 필요했다.

    관저가 어느 정도 꾸며지자 나는 샤샤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 부탁했다.

    -잘 지냈어요, 샤샤?

    -윤아 그리고 덕수 둘 다 잘 지냈어요?

    -우리는 다 좋아요. 초대장은 받았죠?

    -네 받았어요. 벌써부터 셰프의 요리가 기대되네요.

    역시나 미식가답게 음식 얘기부터 하는 샤샤.

    샤샤는 물론이고, 관저에 왔던 모든 기자들에게 초대장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프로젝트를 가장 처음 공개하는 건 특별한 인연인 샤샤에게 맡기고 싶었다.

    -우리 관저에 와서 사진 좀 찍고, 가벼운 보도 자료 몇 개만 내 줄 수 있어요?

    -조선 시대 땐 외국 사신단이 도착하기 전에 연회 준비 상태를 확인하는 직책도 있었나요?

    -하하하 그것까진 잘 모르겠는데 이번엔 샤샤에게 그걸 맡기고 싶어요.

    한국 문화에 익숙한 샤샤는 이번 국경일 행사의 테마를 곧바로 이해했다.

    그리곤 화끈한 성격답게 다음 날 곧바로 관저에 방문했다.

    “와우 생각보다 훨씬 그럴싸한데요?”

    “어때요? 괜찮은 것 같아요?”

    “너무 이뻐요. 이게 500년 전을 재현한 거라구요?”

    “대략 그 정도예요.”

    “말도 안 돼.”

    샤샤도 조금 진지한 장난 정도로 생각했나 보다.

    예상보다 훨씬 그럴싸하게 꾸며 놓은 관저를 보자 연신 셔터를 눌러 대기 시작했다.

    그러곤 자신만만하게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손님들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내가 제대로 기사 써 줄게요.”

    “정말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이쁜 곳에서 우리 셰프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죠. 몇 명이나 오면 된다고요?”

    “300명 이상이요.”

    “겨우? 그것보단 훨씬 많이 올 것 같은데? 셰프! 날 믿고 음식을 좀 더 준비해 줘요.”

    샤샤는 목표치가 너무 적다는 듯 코웃음 치며 관저를 빠져나갔다.

    진짜 샤샤의 말처럼 300명이 훌쩍 넘어도 좋으니 손님들이나 많이 왔으면 좋겠다. 그날은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음식이 모자라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까.

    나는 국경일 행사의 날짜가 결정이 되고 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막걸리도 더 만들어 두었다.

    이전에 만들어 둔 막걸리는 아주 깊은 맛을 낼 정도로 제대로 숙성이 되었고, 담아 둔 김치 역시 맛있게 익어 있었다.

    몇 명 되지 않은 인원으로 우리는 밤낮을 고생하며 국경일 행사를 준비했다.

    * * *

    -주파나르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아주 특별한 국경일 행사를 준비 중이다. 약 500여 년 전 외국 사신들을 환영하는 연회를 주제로 관저를 꾸몄고, 다양한 음식을 준비해 볼거리가 많은 국경일 행사를 계획 중이다.

    중략

    특히 주파나르 대한민국 대사관의 요리사는 젊고 실력 있는 요리사로 유명한데, 이번 국경일 행사에는 또 어떠한 요리를 선보일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수년 내에 세계적인 요리사가 될 그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놓지지 않길 바란다.

    샤샤의 기사가 어디까지 영향력을 행사할진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다.

    덕분에 내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지만 어차피 이겨 내야 할 몫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각자 자기 할 일에 집중하면 되는 것.

    다시 한번 김용수 대사의 말을 되새기며 잠자리에 들었다.

    * * *

    국경일 행사 당일.

    “조명 전부 확인해 보시고, 테이블은 일단 공간이 되는 대로 전부 깔아 주세요.”

    “이렇게까지 많이 깔 필요 있을까요? 오히려 동선이 겹쳐서 불편할 것 같은데.”

    “손님들 괜히 오셔서 앉을 곳도 없으면 좀 곤란하잖아요.”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며 직원들 사이에도 의견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준비를 열심히 했다고 한들 300명이 넘지는 않을 거라는 안지용 참사관과 혹시나 모르니 최대한 많은 좌석을 확보해 놓자는 김준우 서기관.

    나 역시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많은 음식을 준비하긴 했는데 그보다 많은 손님이 온다면 어쩔 수 없다. 빈속으로 앉아 있거나 준비한 또 다른 선물을 받아 가거나.

    예측할 수 없는 인원 때문에 나는 며칠 전 하나의 묘수를 김용수 대사에게 제안했었다.

    앉을 곳도 없는데 음식만 무조건 많이 만들 수도 없는 노릇.

    “장 셰프. 답례품도 다 준비가 된 거죠?”

    “네 답례품은 넉넉히 준비해 놨습니다.”

    “잘했어요. 아무래도 식사를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 같으니 그거라도 쥐어서 보내야죠.”

    혼자선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이 답례품은 상섭의 한식당에 부탁을 했다.

    한국의 결혼식이나 돌잔치 같은 행사에 축하는 해 주러 왔다가 일이 있어 식사를 하지 못하거나, 급하게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생기며 답례품을 전해 주는 문화가 있다.

    이번처럼 인원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섭섭함을 느끼는 사람이 최대한 없도록 우리는 답례품까지 준비해 두었다.

    외국인들에게도 호불호가 적은 새하얀 백설기로.

    이런 사소하지만 반가운 문화를 겪고 나면 내년에도 꼭 우리 행사가 생각이 날 것 같아서 준비를 했다. 정말 이번 행사에 모든 직원이 뼈를 갈아 넣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 이제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나머지는 신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죠.”

    “네 며칠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 오늘만 힘냅시다.”

    “피곤하긴 해도 재밌게 준비했어요.”

    모두 눈 밑에 다크서클이 져 있었지만 표정만은 진심으로 밝았다. 오늘만 무사히 넘기면 내년엔 좀 더 수월할 거란 기대감으로.

    그렇게 커다란 대문이 열리고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빠빠빠빠빠빠.

    낯선 땅에서 익숙한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태평소 연주를 시작으로 손님들을 환영하는 사물놀이 연주가 시작되었다.

    대문이 열린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관저 마당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처음 들어 보는 신명 나는 악기 소리도 신기했고, 머리에 상모를 쓰고 끊임없이 돌리는 사람도 신기했다.

    이번 오프닝 행사는 김상율 한인회 회장의 덕이 컸다. 한국에서 직접 사물놀이패를 섭외해서 데리고 온 보람이 있었다. 순식간에 손님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덕분에 나는 음식 준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김용수 대사의 연설.

    “안녕하십니까.”

    빨간 곤룡포를 입은 김용수 대사가 근엄한 표정으로 단상에 섰다. 평소 같았으면 사람 좋은 미소로 환영 인사를 건넸을 테지만 이번엔 달랐다.

    파나르어로 인사를 건넨 뒤 몇 초 동안 무표정으로 손님들을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이렇게 저희 행사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전 처음 보는 복장을 한 남자가 진지한 말투로 연설을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짧은 박수 소리가 들린 뒤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윤아의 팁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제가 입은 이 옷은 조선 시대 왕들이 입던 옷을 재현한 것입니다. 비록 제가 왕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은 오늘 왕이 행사를 직접 주최할 만큼 귀한 손님들이란 의미이고, 저희는 그 기대에 걸맞은 음식과 볼거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니 맘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간단한 인사에 이어 김용수 대사는 여태까지의 성과를 발표했고, 본격적인 국경일 행사가 시작되었다.

    개인적으론 몇백 명의 토스트를 전부 들어야 하는 긴긴 대장정이.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찾은 파나르에 평화와 안전이 영원하기를, 그리고 한국과의 깊은 인연이 이어지기를! 건배!”

    “건배!”

    “건배!”

    사람들은 미리 나눠 준 막걸리를 들고 김용수 대사의 토스트에 호응했다.

    그 틈에 나는 준비한 음식들을 모조리 들고 손님들 앞으로 나섰다.

    가장 먼저 막걸리와 함께 먹으면 궁합이 좋은 육전과 버섯전부터.

    “쌀을 발효시켜서 만든 이 막걸리라는 술은 파나르의 쿠므스와 만드는 방법이 아주 비슷합니다. 파나르에서는 얇게 썬 카즈와 함께 먹죠?”

    카즈라는 반가운 단어가 내 입에서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정통 한식들로 최대한 메뉴를 꾸리면서 파나르 음식과 조금이라도 공통점이 있는 음식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맛은 조금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 얇게 썬 소고기로 만든 ‘육전’이라는 음식이 막걸리와 잘 어울립니다.”

    “윳젓?”

    “윳젓이 아니고 육전. 천천히 따라 해 보세요.”

    나는 손님들의 우스꽝스러운 발음에 웃음이 났고, 손님들은 맛 좋은 음식들 덕분에 웃음이 났다.

    술과 음식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행사장은 금세 활기가 돌았다.

    “저기… 셰프.”

    “네 말씀하세요.”

    “이 햄버그스테이크 같은 건 어떻게 만드나요?”

    “이거요? 이건 떡갈비라고 하는 한국식 햄버그스테이크인데, 간장과 마늘, 생강 등으로 소스를 만들어서 구워 냈습니다. 어떠세요?”

    “아주 훌륭해요. 혹시 이 음식도 빵이랑 어울릴까요?”

    “빵이랑요? 물론이죠. 한국 사람들은 주로 밥이랑 먹지만 주식이 빵인 파나르 사람들에겐 빵과 더 어울릴 겁니다.”

    “음….”

    질문을 던진 손님은 준비한 빵에 샐러드로 준비해 둔 오이, 양파, 토마토 등을 넣고 햄버거처럼 맛을 봤다. 알렉스나 샤샤처럼 음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가 싶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 샐러드의 소스는 뭐로 만들었나요?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맛인데.”

    “이 냉채요? 이 하얀 소스는 잣으로 만들었습니다. 잣이 뭔지 아시나요?”

    “잣? 바질 페스토를 만들 때 쓰는 그걸 말하나요?”

    “네 맞습니다! 바질 페스토를 아시다니. 그걸로 샐러드 소스를 만들었습니다.”

    역시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바질 페스토를 아는 걸 보니.

    떡갈비를 햄버거처럼 만들어 먹은 손님은 어느덧 내 주변을 떠나지 않고, 이것저것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남자의 질문 내용이 신기했는지 주변의 손님들도 남자가 질문하는 동안 그의 입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니면 혹시 연예인이라도 되는 건가.

    “또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세요.”

    “고마워요.”

    짧은 파나르어로 설명을 하는 게 편하진 않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나는 마당에서 조금만 더 버티다가 주방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이번 행사에는 모두가 좋아할 만한 맛의 떡갈비와 잡채, 그리고 낯선 견과류인 잣을 갈아서 만든 해물냉채나 편육 등 조금 생소한 음식들도 많이 준비했다.

    완벽하게 궁중 요리를 재현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한국적이고, 호불호가 적으면서도 쉽게 맛볼 수 있는 음식들로 준비했다.

    “헤이 미스터 장.”

    주방으로 돌아갈 타이밍을 찾고 있던 찰나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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