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66화 (67/202)
  • 66. 테마

    “네 우리 국경일 행사에도 매년 테마를 입히는 겁니다.”

    호텔에 근무하던 시절 비슷한 행사를 치른 기억을 떠올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호텔에선 매년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른다. 그때마다 메뉴를 구성하는 건 물론이고, 연회장을 어떻게 꾸밀지 막막해진다. 주방장이 되고 난 후엔 주방과 홀을 전부 관여하게 되어서 머리가 터질 뻔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마케팅 관련한 회사에서 특강이 온 적 있었는데 테마를 정해 한 가지에 집중하라는 팁을 듣게 되었다.

    일단 테마가 정해지면 음악이나 컬러, 음식 등을 결정하는 게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

    “예를 들면 환경의 날이라든가, 노동자의 날, 군인의 날처럼 테마가 정해지면 전체적인 분위기를 결정하는 게 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단순히 한국의 국경일 행사가 아니라 더 확실한 테마의 국경의 날을 주최하자는 말이군요.”

    “네 맞습니다. 어차피 3년 동안 매년 해야 하는 거니깐 똑같은 걸 여러 번 하는 것보다 해마다 테마를 바꿔 가며 진행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내 의견에 안지용 참사관이 격하게 동의했다.

    다른 공관에서 일할 때 매번 똑같이 국경일 행사를 진행하는 것도 고역이라고 했다. 조금씩 다르게 준비를 하긴 하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3년 내내 초대받은 손님들은 3년 내내 똑같은 행사를 구경하는 거였다.

    올해 국경일 행사를 본 손님이 내년엔 또 다른 기대를 가지고 방문할 수 있는 그런 행사를 하고 싶었다.

    “좋은 아이디어 같네요. 그럼 그 의견을 연장해서 좀 더 회의를 진행해 볼까요?”

    “네 좋습니다.”

    “어떤 식으로 테마를 정하면 좋을까요?”

    김용수 대사 역시 내 의견에 흥미가 생긴 듯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는 그때 특강의 내용까진 기억나지 않았지만 감으로 익힌 노하우를 내뱉었다.

    “일단 국경일 행사 때 반드시 보여 줘야 할 것은 성과죠?”

    “그렇죠. 그건 똑같은 주제라도 매년 수치는 달리질 테니 지겨워도 그건 반드시 보여 줘야 합니다.”

    “그럼 그것은 일단 제외하고….”

    전체적인 행사의 테마는 볼거리 위주로 구성하는게 좋다. 성과니 어쩌니 하는 업무적인 내용은 또 자세한 자료를 보내 줄 테니 그런 거에 집중할 리가 없었다.

    “국경일 행사에 오는 손님들이 뭘 기대를 하고 올까요?”

    “음… 아무래도 각국의 음식도 궁금할 테고, 재밌는 공연, 그리고 괜찮은 인맥을 만드는 것?”

    파나르 내에 있는 전 세계 공관들이 국경일 행사를 진행하지만 내용은 크게 봐서 다를 게 없었다.

    자기 나라의 음식들을 소개하고, 그해 흥행했던 영화나 연예인 얘기도 좀 하고, 파나르에 자국의 기업들이 진출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주는 것.

    의리나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는 것이지 행사 자체가 너무 즐거울 거란 기대로 국경일 행사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그럼 올해는 가장 무난하게 음식을 테마로 하면 어떨까요?”

    “음식이요? 그냥 한식을 테마로 하자는 말인가요?”

    “한식은 독특한 테마라 하기엔 너무 당연하게 있어야 하는 내용 아닐까요?”

    나는 약간의 사심을 담아 의견을 내밀었다. 하지만 한식은 메뉴가 어떻든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 한식 자체만으론 테마가 되기엔 부족했다.

    “그냥 한식이 아니라 궁중 요리를 테마로 하면 어떨까 해요.”

    “궁중 요리요?”

    “네 이 관저를 하나의 작은 궁으로 꾸미는 겁니다.”

    사람들의 실망하던 눈빛이 조금 달라진 것을 느낀 나는 곧바로 말을 이어 갔다.

    “조선 시대 때 외국 사신들을 환영하던 연회를 재현해 보는 겁니다. 대사님은 곤룡포를 걸치고, 저는 대령숙수의 복장, 다른 분들도 한복을 입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겁니다.”

    “……!”

    “외교적으론 조금 우스꽝스러울 수 있겠지만 분명 기억에 남는 행사가 될 겁니다.”

    이런 코스프레가(?) 외교적으로 결례가 되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던지고 봤다.

    나는 내가 선보일 정통 한식에 좀 더 힘을 실어 주기에는 이런 테마가 유리할 것 같았으니.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으니, 한국 대사관에선 한국 정통 음식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손님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아무래도 좀 그렇죠 대사님?”

    “…….”

    내가 말을 끝낸 후 김용수 대사가 한참 동안 아무 대답이 없자 안지용 참사관이 눈치를 봤다.

    재미는 있겠지만 국경일 행사를 이렇게 진행해 본 사례는 없었다.

    이전에도 분명 비슷한 의견이 나왔을 테지만 후폭풍을 감당할 만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재외 공관은 공무원 집단이었으니까.

    계획대로 잘 풀리면 다행이지만, 반대로 국격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장난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극도로 보수적인 집단에서 이런 걸 쉽게 진행할 리가 없었다.

    “조금 무리수가 될 수도 있겠군요.”

    “하하하… 그렇죠. 한국의 국경일 행사가 장난처럼 여겨질 수 있을 테니까요.”

    안지용 참사관이나 김준우 서기관은 특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안지용 참사관은 국정원 소속이라 책임이 덜하겠지만 이런 행사를 망친다면 외교부 소속 김준우 서기관은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행사가 잘 안되면 어떻게 되지요?”

    “어떻게 되다니요?”

    “신문에도 나고, 좀 과하면 뉴스에도 나오겠죠? 무능한 공관장이라고?”

    매년, 그리고 모든 공관이 진행하는 국경일 행사가 기대보다 흥행하지 못했다고 큰일이 나진 않는다. 하지만 이번처럼 많은 이목을 주목시킨 후 망쳐 버린다면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

    “그렇지만 일개 공무원인 여러분들의 이름은 검색해 봤자 아무것도 나오지도 않겠죠?”

    “네?”

    일개 공무원이란 단어를 사용했음에도 김용수 대사의 말에는 전혀 무시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공무원의 끝판왕인 공관장 정도는 되어야 인터넷에 검색해야 한 줄 정도가 나온다.

    나머지 사람들은 누가 언제 그 공관에서 근무했는지 쉽게 알 수도 없었다.

    “어차피 저는 이미 퇴직한 사람이고, 장관보다도 선배인데 이까짓 거 한 번 망친다고 나한테 책임 물 사람이 있을까요?”

    “……?”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이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모든 직원들에게 공을 돌릴 거고, 혹여나 잘 안돼도 그 과는 제가 모두 가져갈 테니 걱정 마세요.”

    “아무리 그… 그래도.”

    김용수 대사의 표정은 가벼워 보였다.

    그의 말대로 외교부 내에서 김용수 대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잘못되어 책임을 물었다 한들 그게 형사 처벌로 이어질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걱정 마세요. 제가 파나르인의 사랑을 얻는 방법을 완벽하게 배워 놨으니까요.”

    김용수 대사는 윤아를 바라보며 살며시 웃어 주었다.

    “게다가 우리 장 셰프 정도의 실력이라면 당시의 궁중 요리를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해 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100%는 아닐지라도 그 어떤 공관의 요리사들보다 잘 해낼 자신은 있었다.

    “비록 복장은 우스꽝스럽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내용물만은 진심을 담으면 됩니다. 그러면 손님들도 그걸 느낄 겁니다.”

    김용수 대사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었다.

    비록 공관장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30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통해 얻은 노하우가 있었다.

    보여지는 것만으론 사람들의 진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테마나 복장은 재미를 더해 주는 부수적인 것일 뿐, 그 내용물이 진짜 중요했다. 그것을 제대로 준비한다면 분명 성공적인 행사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대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희는 당연히 따르겠습니다.”

    “김 서기관. 그리고 안 참사관. 두 분이 내키지 않으면 굳이 모험하지 않겠습니다. 두 분은 아직 미래가 창창하니까요.”

    처음엔 우려하던 두 사람도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특히 가족이 오고 나서 사라졌던 출세욕이 되살아난 듯 김준우 서기관의 표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저희도 한 식구 아닙니까! 당연히 믿고 따라야지요.”

    “맞습니다. 일 년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저희는 이미 대사님의 능력을 100% 믿고 있습니다. 거기다 장 셰프의 요리 실력은 말할 것도 없이 믿고 있구요.”

    “하하하 고마워요. 나는 여기가 마지막이겠지만 다들 남은 지루한 공무원 생활 즐겁게 일해야지요.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제대로 총대 매 줄 테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보세요.”

    김용수 대사는 이제 젊은 외교관들의 아이디어가 더 많이 적용되길 바랐다. 이번에 파나르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은 만나는 상대 역시 나이가 많이 어려졌다는 것이다.

    자신이 젊었을 적엔 자신의 방식이 분명 정답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후배들이 여러 가지 정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최대한 길을 다져 주는 것이 자신이 역할이라 생각했다.

    * * *

    토요일 이른 아침.

    “윤아야 왔어? 주말인데 왜 이렇게 일찍 만나자고 하냐? 이 시간에 여는 식당이 있어?”

    윤아는 그날 회의가 끝난 후 주말에 약속을 잡았다. 맛집 친구를 위해 보여 줄 게 있다며.

    근데 이렇게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식당이 있나?

    덕분에 주말에 늦잠도 자지 못하고 끌려 나왔다.

    “무슨 파나르식 브런치 식당 같은 거야? 아니면 아침밥 파는 곳?”

    “오늘 갈 곳은 식당 아니야.”

    “엥? 그러면 네가 도시락이라도 싸 온 거야?”

    윤아와 내가 단둘이 만날 이유는 업무 외엔 맛집 탐방밖엔 없다.

    식당이 아니라면 어딜 가려는 거지?

    어찌 됐든 항상 모임의 주최자는 윤아였으니, 윤아의 계획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가야 욕을 덜 먹거든.”

    “욕? 무슨 욕?”

    윤아가 아침부터 데리고 간 곳은 식당이 아니라 시장이었다. 새벽에 시장을 가야 좋은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오늘 왜 갑자기 시장을 데리고 온 거지?

    “내가 널 위해 선물을 준비했지.”

    “선물? 무슨 선물?”

    “저번에 LA갈비용으로 고기 손질해 달라는 말 파나르어로 못 해서 포기했다면서.”

    “그랬지 근데 왜?”

    “그래서 그거 알려 주려구.”

    “아… 그게 선… 물이야?”

    윤아는 저번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고기를 LA갈비용으로 손질해 달라는 말이나 개불이나 해삼 같은 해산물을 파나르어로 알지 못해 구매하지 못했다는 말.

    조금 불편하긴 했어도 큰 문제는 없었는데….

    선물을 준비했다며 신이 나서 말하는 윤아에게 실망스러운 표정을 보여 줄 수 없었다.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원하는 대로 고기를 손질해 줄 수 있다는 곳을 찾았어.”

    “와아 정말? 완전 다행이다. 이제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겠어. 하. 하. 하.”

    “뭐지? 이 반응? 진짜 좋은 거 맞아?”

    “진짜 좋아! 안 그래도 국경일 행사 때 LA갈비 만들고 싶었거든.”

    “정말? 잘됐다.”

    거짓말이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나중에 메뉴를 바꿨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궁중에선 LA갈비를 만들지 않았으니까.

    “대신에 아침 일찍 와야지만 손질해 줄 수 있대. 손님 많을 땐 번거로워서 힘들대.”

    “그래?”

    그냥 뼈까지 자를 수 있는 절단기가 있으면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LA갈비용 고기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손질이 어려운 건 아니었다.

    그래도 뭐 안 하던 일이 하나 더 생긴 거니 번거롭다고 생각할 수 있지.

    “여튼 내가 잘 설명해 놨으니깐 필요하면 항상 여기서 사면 돼.”

    “고마워. 이제 만찬 메뉴 때 자주 해야겠다. 그럼 온 김에 좀 사서 점심때 만들어 먹을까?”

    “정말? 그럼 나야 좋지!”

    맛집 탐방은 이렇게 식당이 아닌 우리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나도 소량을 구매하면서 원하는 두께를 알려 주고, 한번 보여 주는 게 더 좋았다.

    다음에 올 땐 무게만 말해 주면 될 테니까.

    “안녕하세요 사장님.”

    “반가워요.”

    “저번엔 말씀드린 LA갈비 좀 살 수 있을까요?”

    “몇 킬로나?”

    “얼마면 돼? 덕수야?”

    “음… 넉넉하게 3킬로 정도? 남으면 가지고 가서 엄마 아빠랑 먹어 윤아야.”

    파나르어로 몇 마디 주고받더니 사장은 알았다며 냉장고로 들어가 소갈비를 가지고 나왔다.

    하지만 가지고 나온 커다란 소갈비는 절단기로 향하지 않았다.

    “헐… 저걸로 자른다고?”

    “그러게… 저건 나도 몰랐다.”

    왜 번거롭다고 한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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