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정통
“나도 춤이라도 추면서 음식 설명을 할까?”
조금 유연해진 허리를 흔들면서 말을 하자 윤아는 질색을 하며 손짓을 했다.
“그렇게 이상한 춤 추면서 음식 설명하면 있던 식욕도 다 떨어지겠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방금 파나르 사람들은 춤추는 거 좋아한다며….”
“그것도 어느 정도지.”
나도 내 춤 실력을 알고 있고, 윤아의 말이 진심이 아니란 걸 알기에 우린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
“일단 내 생각에 대사님이 연설하고, 토스트 하느라 시간을 거의 다 쓸 것 같거든.”
“하긴. 300명 가까운 사람들을 일일이 대화하려면 시간이 엄청 걸리긴 하겠다.”
“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래도 네가 음식 설명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거야.”
내 생각도 비슷했다.
말하는 것이 주업인 김용수 대사처럼 내가 음식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말보단 맛.
혀와 머릿속에 남길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데 신경을 쓰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었다.
“일단 어떤 메뉴를 할지 정해 줘. 그러면 내가 간단하게 설명해 줄게. 그 정돈 외워서 설명할 수 있을 거야. 기껏해야 뭐로 만들었는지 물어보는 걸 테니.”
“응 알았어. 그게 좋겠다.”
자기 할 일에 집중하기.
김용수 대사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다. 나는 일단 국경일 행사 때 선보일 한식들을 결정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럼 국경일 행사 회의도 할 겸 우리 회식 한번 하시죠.”
“정말요? 좋습니다!”
“여태껏 특별히 회식이라고 할 것도 없었는데 이참에 한번 하시죠.”
대사관 직원들이 회식을 하게 되면 종종 관저에서 진행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대사관 직원 중 한 명인 요리사는 정작 연장 근무일 뿐 먹지도, 즐기지도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된다.
김용수 대사는 몇 명 되지 않는 직원들이 전부 하나가 되길 바랐다.
“뭐 먹으러 갈까요?”
“오랜만에 한식 먹으러 가실까요?”
“아 그럴까요? 안 그래도 한식당에 물어볼 것도 있어서 저는 찬성입니다.”
오랜만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나는 쿠므스를 전해 주러 간 날 이후로 한식당에 가질 못했다. 다른 직원들을 통해 이전보다 훨씬 매출이 올랐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직접 가 보진 못했다.
“윤아 씨, 그럼 한식당에 예약 좀 부탁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제 한식당은 평일에도 손님이 많아 예약을 하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식당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대사관이라는 말에 한식당 사장 상섭은 곧바로 큰방 하나를 내어 주었다.
* * *
“어서오세요 대사님.”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요새 많이 바쁘시죠?”
“네 운이 좋게도 많은 손님들이 찾아 주시네요. 다 우리 요리사님 덕분이죠.”
맨 뒤에 서서 인사만 꾸벅한 채 서 있다가 상섭의 성화 덕에 앞으로 끌려 나왔다.
소감이라도 말해 달라고 할 분위기여서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본인들 요리 실력이 좋아서 그런 거지 내가 잘한 건 없었다.
“메뉴는 편하게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메뉴판을 보니 처음엔 반대하던 치킨이 베스트 메뉴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많고 복잡하기만 했던 예전 메뉴판과 달리 알짜배기들만 모아 놓은 듯 깔끔해진 메뉴판이었다.
“먹고 싶은 거 다 시켜도 됩니까 대사님?”
“물론이지요. 편하게 시키세요. 우리 도시락 팔아서 번 돈도 있으니 이 정도는 맘껏 시키셔도 됩니다.”
그나마 높은 직책의 안지용 참사관이 나서서 판을 깔아 주자 직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많은 음식들을 주문했다.
갈비찜, 잡채, 치킨, 해물탕까지.
남기면 싸 갈 생각으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음식을 주문했다.
“아이고 이렇게나 많이 주문하십니까?”
“자주 못 오는데 한 번 올 때 매출 좀 올려 드려야죠. 교민들 돕는 것도 대사관의 일이니까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주문을 받는 상섭의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상섭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서려는 찰나 내가 어깨를 잡아 세웠다.
“사장님.”
“아이고 우리 복덩이 요리사님 아닙니까. 별일 없죠?”
“네 덕분에 잘 지냅니다. 사장님도 이젠 건강 챙기면서 일하셔야겠어요.”
“그러게요. 덕수 씨 아니었으면 또 손가락이나 빨고 있었겠죠.”
“또 엄살 부리시네요. 다름이 아니고 궁금한 게 있어서요.”
“뭔가요?”
이번 회식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시간을 내서 한번 상섭을 만날 생각이었다.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요새 오는 손님들 비율이 어떻게 돼요?”
“비율이라니요?”
“파나르 사람들도 많이 와요?”
이전엔 너무 한국인들만 오는 한식당이어서 컨셉과 메뉴를 바꿨던 것이다. 새로 오픈을 하고 몇 달 지난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했다.
“파나르 사람들요? 요즘은 엄청 많이 오죠.”
“정말요? 한국인들하고 비교해서 얼마나 오나요?”
“음… 요즘은 오히려 파나르 사람들이 더 많은 거 같아요. 굳이 따지자면 51대 49 정도랄까? 하하하.”
거의 99%에 가까웠던 한국인 손님 비율이 이 정도까지 변한 건 기적이었다.
새로운 한식당이 파나르 시내 곳곳에 개업하고 있었지만 상섭의 가게 매출은 오히려 늘고 있었다.
“이야 엄청 늘었네요.”
“젊은 사람들도 많이 오고, 여튼 요즘엔 다양하게 오니깐 좋아요.”
“그렇겠네요.”
“신경 쓸 건 더 많이 생겼지만 그래도 단체 주문 들어오는 곳도 많고, 나도 참 신기해요.”
파나르 공기관이나 회사에서도 단체 주문이 들어오는 게 신기하다는 상섭이었다. 이제 이 손님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게 유지하기만 하면 편한 말년을 보낼 수 있겠다.
“그러면 제일 잘 나가는 메뉴는 뭐가 있어요?”
“잘 나가는 메뉴요?”
내가 궁금한 건 한식당의 근황 말고도 가장 잘 나가는 메뉴의 리스트였다.
곧 있을 국경일 행사에는 파나르인과 한국인들이 섞여서 방문한다.
많은 손님이 방문할 예정이라 일일이 손님들의 취향을 맞춰 줄 순 없다. 한식을 기본으로 하되 최대한 호불호가 적을 만한 메뉴를 골라야 하는 게 관건.
상섭의 한식당에서 몇 달간 쌓인 데이터는 국경일 행사 때 선보일 메뉴들을 고르기에 딱 맞는 데이터였다.
“네 사실 조만간 국경일 행사를 위해서 메뉴를 선택해야 하는데 사장님 식당에서 파는 메뉴들이 딱 맞을 것 같아서요. 한국인들도 좋아하고, 파나르인들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한식.”
“아하! 그렇겠네요. 그게 10월쯤에 하던가요?”
재외 공관들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국경일 행사는 본래 그 나라의 건국일이나 독립일에 진행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일인 광복절은 8월 15일이라 여름 휴가철과 겹친다. 최대한 많은 손님들을 초대하기엔 불리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보통 10월 3일 개천절에 진행을 한다.
“얼마 안 남았군요. 손님들이 많이 와야 할 텐데.”
“그래서 사장님의 의견이 많이 필요합니다. 단골들도 많이 늘었죠?”
“당연히 많이 늘었죠. 그리고 어떤 메뉴가 잘 팔리는지는 당장이라도 영수증을 뽑아서 알려줄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런데 왜요?”
상섭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장사는 분명 이전과 비교해서 훨씬 잘되고 있었지만 조금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한 가지 있었다.
“우리가 저번에 시식회 했던 메뉴들 있죠?”
“네네 파나르 사람들 입맛에 맞춰서 조금 바꾼 메뉴들이요?”
“네 고추장에 마요네즈를 섞고, 제육볶음 양념을 좀 줄이고 그랬잖아요.”
“네 그랬었죠.”
우리는 그때 시직회를 통해 정통성을 지키기보다 조금은 개량한 한식 레시피를 개발했었다.
덜 자극적이고, 조금 덜 매운 파나르식 한식.
그것이 많은 손님들을 끌어모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사람들의 반응은 달라졌다.
“처음엔 개량한 레시피가 월등히 잘 나갔었는데 점점 단골이 늘고, 두세 번 왔던 손님들은 이 음식이 원래 이런 맛이냐고 묻더라구요.”
“원래 이런 맛이라는 게 무슨 의미예요?”
“한국에서도 원래 이렇게 먹냐는 거죠. 지금 이 음식이 100% 한국식으로 만든 거냐고 묻더라구요.”
“그건 왜 물어본대요?”
“처음엔 궁금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이제는 계속 한국식으로 만들어 달라고 해요. 역시 오리지널이 맛있다나 어쩐다나.”
“단골들이요?”
상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요샌 비빔밥도 마요네즈를 섞기보다 고추장 양을 조절해서 먹으라고 하고 있고, 제육볶음 같은 것도 내 맘껏 양념을 넣어서 만들어요.”
“결국 이전처럼 돌아온 거네요?”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젊은 친구들이나 처음 온 손님들이 오면 개량한 레시피로 만들어요.”
“그렇군요.”
상섭의 말을 듣자 조금 생각이 많아졌다.
메뉴를 어떻게 정해야 할까.
파나르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서 개량을 해야 할까? 아니면 정통성을 보여 줘야 할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래서 제가 감히 조언 한마디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국경일 행사는 우리나라 대사관이 주최하고, 우리나라 문화를 보여 주는 자리잖아요.”
“네.”
“그러면 음식도 진짜 한식을 보여 주는 게 어떨까 싶어요. 음식이라는 게 길게는 몇천 년에 걸쳐 발전이 된 건데 우리가 얄팍한 술수로 개량을 해 본들 원조만 하겠어요? 나처럼 장사를 하는 게 아니니 진짜 한식을 보여 주면 좋을 것 같아요. 오히려 그게 더 인기가 많을 수도 있구요.”
상섭을 그렇게 웃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영수증에 적힌 메뉴들을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확실히 개량한 메뉴의 판매량이 많긴 했지만 크게 차이 나는 건 아니었다.
이곳처럼 장사를 해야 하는 곳이라면 아주 작은 차이도 신경을 쓰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난 장사를 하기 위해 이런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내년, 내후년에도 많은 손님들을 끌어모아야 하지만 분명 정통 한식으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꼼수라면 꼼수일 수 있는 방법으로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싶지 않았다.
난 내 실력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걸 뒷받침해 줄 아이디어도 떠올랐으니 한번 질러 봐야지.
“자 그러면 편하게 밥 먹으면 회의도 해 봅시다.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뭐든 말해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회의를 하니 다들 부담 없이 아이디어를 던졌다.
김용수 대사가 한 일 중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이디어를 내는 데 있어서 서로 부담을 주지 않는 분위기를 만든 것이었다.
막내급 직원인 윤아는 물론이고, 나 역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대사님 먼저 국경일 행사의 목적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국경일 행사는 우리의 문화를 선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일 년 동안의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행사예요. 우리 공관이 일 년 동안 어떤 활동을 했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자리지요.”
그렇기 때문에 방문한 손님들의 숫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공관장과 외교관들이 얼마나 열심히 활동했는지에 따라 초대에 응한 손님들의 숫자가 달라질 테니.
“그것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나 볼거리, 음식 등을 선보여서 추후에 관련된 여러 행사나 사업 등을 성사시키는 자리이기도 해요.”
여러 분야의 손님들이 방문하기 때문에 다양한 얘기들이 오간다. 올해 성공적인 행사를 치른다고 해서 이듬해 행사가 성공적일 거란 보장은 없기 때문에 손님들의 세세한 관리가 필요했다.
“일단 다른 걸 다 떠나서 나는 우리 국경일 행사에 볼거리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외교 행사라고 해서 딱딱하고, 서로 목적만 가지고 오는 그런 행사가 아닌 볼거리가 많고 재밌는 그런 행사.”
“동의합니다. 가볍게 구경하러 간다는 마음이어야 많이 올 테니까요.”
“그러면 공연도 조금 색다르게 준비하고, 음식도 최대한 성의 있게 준비해야겠죠. 매년 오고 싶은 그런 행사를 했으면 해요. 너무 당연한 얘기인가요?”
김용수 대사의 의도는 모두가 쉽게 이해했지만 그걸 실현시키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 전임자들, 아니 전 세계 공관장들 역시 계획은 다 비슷했을 거다.
“그러면 대사님 제가 의견 하나 말씀드려 봐도 될까요?
“네 말씀해 보세요.”
나는 이미 속으론 정통 한식을 선보일 계획을 세웠다. 김용수 대사가 말리면 어쩔 수 없다지만 성격상 그럴 리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섭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올해 국경일 행사의 테마를 먼저 정해 보는 건 어떨까요?”
“테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