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64화 (65/202)
  • 64. 명예 파나르인

    “파나르어로 연설을 하려는 정확한 목적이 무엇인가요?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함인가요?”

    “아니에요. 그런 거면 오히려 익숙한 영어나 한국어로 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러면 파나르인 손님들이 반가워할 것 같으니 그런 건가요?”

    “맞아요. 외국 가수들이 내한 공연을 할 때 한국어로 인사해 주면 엄청 반가워하잖아요. 파나르어같이 희귀한 언어로 연설을 할 수 있다면 손님들이 엄청 좋아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영어나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처럼 전 세계에서 많이 사용되는 언어로 연설을 하면 조금 놀라긴 하겠지만 그게 전부다. 하지만 파나르어처럼 파나르에서만 사용하는 언어를 익혀 연설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놀람을 넘어서 그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감동할 것이다. 그 기억은 뇌리에 강하게 박힐 것이고.

    파나르어 과외를 시작한 이유는 올해 국경일 행사를 위함도 있지만 내년, 내후년 국경일 행사까지 염두에 두고 계획한 일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더듬더듬 연설을 하는 것보다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더… 듬더듬이요?”

    “죄송합니다. 제가 좀 말이 지나쳤죠?”

    “아니에요. 사실인걸요.”

    윤아는 작심하고 말을 꺼냈지만 곧바로 김용수 대사의 눈치를 보고 꼬리를 내렸다.

    김용수 대사는 조금 충격을 받은 눈치였지만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도 파나르어가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고 달려들었으니까.

    “그럼 연설을 하며 파나르인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그건 걱정 마세요. 확실하게 알려 드릴게요. 말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으니까요.”

    수업 내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던 윤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일주일간 진행됐던 파나르어 과외는 일단 중지.

    이렇게 어설프게 더듬거리는 것보단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럼 내일 당장 현장 실습하러 가시죠.”

    “현장 실습이요?”

    “네 백문이 불여일견. 이번에 알려 드릴 건 학문이 아니니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방법을 바꾸고 나서 나는 왠지 찬밥 신세가 된 듯한 느낌.

    김용수 대사에게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윤아였다.

    * * *

    다음 날.

    “젊은이들 모이는데 내가 껴도 될까요?”

    “괜찮아요. 파나르인들은 나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그것도 아셔야 할 것들 중 하나입니다.”

    윤아는 없는 인맥을 동원해서 작은 파티를 하나 개최했다. 사실 윤아의 인맥이라기보다 윤아 부모님들의 인맥이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 낯선 파나르인들이 우리를 반겼다.

    “어서오세요 대사님.”

    “안녕하세요, 어머니. 실례 좀 하겠습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그냥 놀기 위한 파티라니. 김용수 대사에게 이 상황이 조금 어색해 보였다.

    하지만 윤아의 설명에 곧바로 긴장을 풀었다.

    “대사님 오늘 이 파티는 작은 국경일 행사라고 생각하세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초대한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고, 초대받은 사람들은 순수 파나르인, 게다가 준비한 음식은 한국 음식들. 얼추 비슷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초대된 인원은 5~6명뿐이었지만 윤아의 말대로 국경일 행사를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게다가 집 안에는 익숙한 음식 냄새들이 가득 차 있었다.

    “다들 편한 맘으로 온 거니깐 부담 갖지 말고 인사 나누세요.”

    용기를 얻은 김용수 대사는 손님들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두 번째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윤아가 김용수 대사를 저지했다.

    “첫 번째 팁입니다. 누군가와 인사하실 때 절대 웃지 마세요.”

    “왜요?”

    나도 습관적으로 올려 둔 입꼬리를 재빨리 내렸다. 예전 시장에 갔을 때 윤아가 말해 준 게 생각났다.

    “덕수 너는 기억나지? 왜 웃으면 안 되는지?”

    “응 첫 만남에 웃으면 사람들이 무시한다고….”

    “맞아요. 이건 다수 앞에서 연설 같은 걸 할 때도 똑같아요. 연설을 시작할 때 미소를 짓고 시작하면 이 연설은 진지하게 하는 연설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장에서 웃으면 쉽게 사기당할 수 있단 말의 연장선이었다. 공식적인 연설을 할 때도 먼저 미소를 지으면 아무도 그 연설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주목받는 연설을 하기 위해선 먼저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했다.

    “다시 인사해 보세요. 여기 사람들은 남자는 남자다운 게 최고라고 생각해요. 악수할 때는 손에 좀 더 강하게 힘을 주시고.”

    첫 만남에 그렇게 강하게 해도 되나 조금 미심쩍었지만 윤아의 말대로 따라 하자 김용수 대사를 바라보는 손님들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오 제법인데.’라는 표정.

    그저 나이 든 아저씨로만 바라보던 처음과 달리 김용수 대사 주변으로 슬슬 몰려들고 있었다.

    대사라는 직업 하나론 아무 효과가 없었는데 윤아의 팁을 더하자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술도 한잔하실 거죠?”

    “오늘은 굳이 안 해도 되는데.”

    “한잔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렇게 파티에서 파나르인들은 서로의 행운을 빌어 주는 토스트라는 걸 하거든요.”

    “토스트라면 건배 같은 거죠?”

    파나르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서로 덕담 같은 걸 나눈다. 하지만 파나르에선 그 토스트를 하다가 날이 샌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그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금 지루할 수 있지만 초대된 손님들이 전부 한마디씩 하는 게 암묵적인 룰이에요. 결혼식 같은 걸 할 땐 몇 시간에 걸쳐 손님들 전부 토스트를 하느라 새벽에 끝나기도 해요.”

    “아… 그럼 우리 국경일 행사 때도 그래야 할까요?”

    “네. 여러 번 나눠서 하더라도 꼭 모든 손님에게 기회를 주는 게 좋아요. 자기를 신경 쓰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 좋아할 거예요.”

    적어도 300명 참석을 예상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한마디씩 한다면 국경일 행사 역시 자정을 넘길 수도 있다.

    500~600명이 초대되는 파나르의 결혼식에선 실제로 새벽 3~4시까지 행사를 이어 가는 경우도 있었다.

    “항상 건강과 행복이 깃들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진 못했지만 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윤아 역시 김용수 대사와 나에게 토스트에 자주 사용되는 문구를 몇 개 외워 번갈아 가며 말하라는 팁을 전해줬다.

    족집게 강사처럼 쏙쏙 몇 가지만.

    “토스트 몇 번 했더니 술에 취하네요. 근데 윤아 씨 이거 토스트 할 때마다 잔에 담긴 술을 마셔야 하나요?”

    독한 보드카를 5~6잔 연달아 마시더니 금세 취기가 올라왔다. 모든 손님들과 토스트를 주고받은 후 술잔을 비웠으니, 피할 수 없었다.

    “토스트를 하고 난 후에 꼭 술잔을 비울 필욘 없어요. 그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다행이네요. 300명 넘게 토스트를 하고, 어떻게 그 술을 다 마시나 걱정했거든요.”

    나도 옆에서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술을 거절하는 게 토스트를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파나르 사람들이었다.

    “윤아야 이제 슬슬 틀어 볼까?”

    “그럴까?”

    윤아와 어머니 둘이 무슨 말을 주고받더니 집 안에선 갑자기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귀가 조금 아플 정도로 볼륨이 높아 김용수 대사와 나는 놀라서 귀를 막았다.

    “갑자기 무슨 음악이야?”

    “여기 아파트인데 이렇게 음악을 크게 틀어도 돼요 윤아 씨?”

    갑자기 음악을 튼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아파트에서 너무 큰 볼륨으로 음악을 켜서 이웃들의 항의가 들어올까 봐 눈치가 보였다.

    “걱정 마. 음악 소리는 아무리 크게 틀어도 뭐라고 안 해.”

    “정말?”

    “응 왜 그런지는 기다려 봐 봐.”

    음악이 나오고 몇 초가 지나지 않아서 초대된 손님들은 자연스레 몸을 흔들고 있었다.

    윤아의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거실에 나와 몸을 흔들고 있었다.

    클럽이나 무대 위도 아니고, 갑자기 춤을 추는 게 한국 사람이 보기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었는데 물 흐르듯이 파티는 진행되고 있었다.

    “파나르인들은 음악이 나오면 어디서든 춤을 춰요. 잘 추든 못 추든 전혀 개의치 않고 춤추는 걸 엄청 즐기거든요.”

    “그냥 막춤을요?”

    “막춤이든 율동이든 그냥 팔만 흔들어도 되고, 음악이 나오면 몸을 맡기는 거지. 파나르 파티에선 절대 음악이 빠지면 안 돼.”

    길거리에서도 멜로디 같은 것만 나와도 멈춰 서서 춤을 추는 파나르인들.

    흥이 많고, 주변 눈치를 보지 않아 아무리 아파트 옆집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왜냐면 본인도 곧 음악을 틀고 흔드는 날이 있을 테니까.

    이 정돈 서로서로 이해하며 넘어가 주었다.

    “국경일 행사 때도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간 후에 한국 음악들 좀 틀어 주면 좋아할 거예요. 어떤 음악을 틀어 줘도 흔들 사람들이거든요.”

    “하하하 신기하네요. 그땐 한국 음악들 실컷 틀어 줘 봐야겠네요.”

    그 후로 한 시간이 넘게 손님들은 몸을 흔들었다. 김용수 대사와 나 역시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젠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해 보일 정도.

    모두가 즐기는 분위기에다가 맘을 편하게 먹으니 나 역시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한 번도 춤을 추며 스트레스를 푼 적이 없었는데, 신나는 음악에 몸 몇 번 흔들었다고 기분이 금세 업되었다.

    클럽을 가는 이유가 이런 거였구나.

    “어때요? 별거 없죠? 파나르인들 만족시키는 거.”

    “별건 아니긴 한데 말 안 해 주면 전혀 모를 것들이네요.”

    크게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은 없지만 한국과는 거의 반대되는 문화가 많았다.

    윤아의 말이 사실을 증명하듯 김용수 대사를 바라보는 손님들의 반응은 아주 호의적으로 변해 있었다.

    자기들의 문화를 잘 알고 있는 외국 대사라서 그런가. 사람들은 안 통하는 말을 한마디라도 더 건네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거참 신기하네요.”

    “저도 처음엔 한국이랑 완전 반대여서 조금 고생했어요. 이 정도만 하셔도 파나르인들은 아주 좋아할 겁니다.”

    “허허허 그렇겠네요.”

    얼마 남지 않은 국경일 행사를 위해 파나르어를 배운다는 생각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의 벽이 너무나도 높았다.

    영어도 마스터했으니 이깟 파나르어 하나쯤은 열정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일주일간 배운 기초 파나르어에 오늘 배운 몇 가지를 접목시키기만 해도 성공적인 연설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윤아.

    “이 사람들만 봐도 윤아 씨의 말에 믿음이 갑니다.”

    파티가 끝나 갈 때쯤 손님들은 다음에 다들 자기 집으로 오라며 김용수 대사를 초대하고 있었다. 김용수 대사는 나이 든 자신이 이런 파티에서 인기 스타가 된 것이 무척이나 신기한 듯 기뻐했다.

    “연설의 내용보단 다른 거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방향을 조금 틀어서 계획해 봅시다. 윤아 씨가 나 좀 잘 도와줘요.”

    “당연하죠 대사님.”

    많은 나이 차 덕에 내내 어색하고, 멀었던 윤아와 김용수 대사의 사이가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언어보다 더 확실한 걸 알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과외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면 나도 춤을 추면서 음식을 소개해 줘야 하나?

    내 문제는 거의 해결되지 않았는데….

    “윤아야 나는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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