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다나의 꿈
“요리사님!”
“미안해요 다나 씨. 조금 늦었죠?”
“아니에요. 요리사님이 오실 줄 몰랐어요.”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덕수였다.
덕수는 관저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오느라 조금 늦게 대사관에 도착했다.
만약 다나가 장학생으로 선발되게 되면 꼭 축하해 주고 싶었다는 덕수. 자신만만해하던 다나의 진짜 실력을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덕수가 늦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거 받아요.”
“이게 뭐예요?”
“축하 선물.”
덕수가 건넨 선물은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나는 덕수가 건넨 선물을 평소에도 즐겨 먹었으니까. 처음 겪어 본 사람에겐 지독한 냄새일 수 있지만 다나에겐 군침 도는 맛있는 냄새였다.
“제가 직접 담근 김치예요. 저번엔 겉절이 만들어 먹고 싶다고 했죠? 그것도 맛있지만 진짜 한국인들이 먹는 김치에 미리 익숙해져 봐요.”
덕수가 건넨 김치는 몇 겹의 비닐에 쌓여 통에 들어 있었지만 특유의 냄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젓갈과 액젓, 마늘 등을 아낌없이 넣어 만든 진짜 한국 김치였기 때문.
다나에게도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한국에 가면 사방에서 이런 냄새를 맡게 될 테니 조금이라도 빨리 익숙해지라는 의미에서 이런 선물을 준비했다.
“하하 곳저리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곳저리가 김치보다 만들기 간편해서 알려 달라는 거였어요.”
“정말요? 그럼 이런 젓갈 많이 들어간 김치도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죠.”
“하하하하 제가 장학생을 너무 과소평가했네요.”
“감사합니다. 이건 아주 맛있게 먹겠습니다!”
덕수는 빠르게 선물과 축하의 말은 건넨 뒤 다나에게서 멀어졌다. 주인공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다나 학생, 이제 소감 좀 부탁드립니다.”
방금까지 밝은 표정이었던 다나는 소감을 말하기 시작하자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정확한 감정은 모르겠지만 개운해 보이진 않았다.
소감이 시작되자 그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에서 꼭 살아 보고 싶단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한국과 가까워질 수 있는 학과를 선택했구요.”
여기저기서 다나를 향한 셔터 소리가 들려왔다. 파나르 대학에서도 이전의 큰 실수를 최대한 감추기 위해 다나를 부각시켜야 했고, 한국 대사관 역시 비리를 뿌리 뽑아 버린 성과를 자랑해야 했다.
“하지만 파나르와 달리 공정할 거라 기대했던 한국도 점점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며 잠시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소감을 듣는 김용수 대사는 마치 자신이 죄를 진 사람처럼 표정이 굳어 있었다. 본인의 임기 동안 생긴 일은 아니었지만 공관장으로서 이번 일에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 줬습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수를 고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건 실수보다 훨씬 큰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라고 지칭하진 않았지만 다나의 말에 한쪽은 반성했고, 또 한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도 한국에 가서 저처럼 정당한 기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파나르로 돌아와서 이러한 문화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해 준 장덕수 요리사님처럼 타국에서도 항상 귀를 기울이며 살겠습니다.”
다나의 소감을 끝으로 커다란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실력이 재력에 묻히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다나.
이번 장학생 시험을 치기 전 다나는 한국인 교수를 포함해 몇몇의 담당 교수들이 파면당하고, 새로운 시스템으로 재편된 장학생 선발 과정이 탄생한 이유를 전부 듣게 되었다.
뭔가를 기대하고 말을 꺼낸 건 아니었지만 발 벗고 나서 준 덕수 덕에 꿈에 그리던 한국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소문으로만 돌던 뇌물 장학생이 사실이었단 걸 알게 되어 씁쓸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자기의 나라이고, 자랑스러웠던 대학이었는데….
자기 때문에 만천하에 오점을 알려 버린 게 아닐까라는 죄책감도 조금 들었다.
파나르엔 더 이상 부족할 게 없다.
넓은 땅, 풍부한 지하자원, 되찾은 평화 그리고 인재들.
다나는 자신과 비슷한 젊은 인재들이 다시 돌아와 파나르가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설 수 있기를 기도했다.
오늘 다나의 머릿속에 배인 덕수의 김치 냄새는 아마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 * *
“장 셰프. 잠시만 앉아 봐요.”
“네 대사님.”
아침에 출근하면 김용수 대사가 오늘은 또 어떤 얘기를 꺼낼지 궁금해진다. 마치 밤새도록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은 사람처럼 2층 계단에서 내려오면서 입을 열었다.
“어제 다나 학생의 소감 기억나요?”
“소감이요? 굉장히 멋있는 소감이었죠.”
“아니 그게 아니라 다나 학생이 소감 때 사용하는 어휘나 수준이 기억나냐구요.”
김용수 대사는 비리를 잡아 낸 일을 뿌듯해하기보다 다른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파나르 사람들의 외국어 실력.
특히 이번에 만난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완전한 전공도 아니고, 수업 몇 개 들었을 뿐인데 어떻게 다들 발음도 좋고, 문법도 완벽할 수가 있죠?”
“…….”
어떻게 한 번만 맛보고 똑같은 맛을 낼 수 있죠? 라는 유의 물음이 아니면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외무 고시를 한 번에 패스한 김용수 대사가 신기해할 입장은 아닌 거 같은데….
“대사님도 외국어엔 일가견이 있지 않습니까? 외교관이시니까.”
실제로 김용수 대사의 영어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관저에 초대된 손님들이나 알렉스와도 전혀 문제없이 소통했으니 외교관으로서 자질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외교관들 중에서도 영어로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김용수 대사는 적어도 영어를 못해 문제를 일으킬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죽을 듯이 공부했어요. 영어 하나 마스터하기 위해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어휴.”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그때 했던 고생 덕에 이렇게 60이 넘는 나이인데도 자유롭게 소통이 가능하잖나.
나는 그게 참 부러웠다.
“그래서 말인데요 장 셰프.”
“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뭐가요?”
다시 마주친 김용수 대사의 눈빛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거지?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굳게 다문 입술이 서서히 열었다.
“파나르어 공부를 시작할 겁니다.”
“파나르어요?”
“네 학생들을 보니 온몸이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어쩜 다들 그리 어휘력도 좋고, 전달력이 좋은지… 당장 한국어 웅변 대회를 했어도 볼만했을 거예요.”
장학생으로 선발된 다나는 물론이고, 아쉽게 탈락한 학생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필기시험은 겨우 1~2개 차이였고, 다나도 면접에서 가산점을 받지 못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 국경일 행사 때 다나 학생처럼 외국어로 연설을 해 보고 싶어요.”
“영어로 하시면 되잖아요.”
“파나르니깐 파나르어를 해야죠! 초대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파나르 사람일 텐데요.”
나인티나인 사례도 그렇고, 이번에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은 김용수 대사의 열정을 불타오르게 했다. 당장 내일부터 과외를 받겠다는 김용수 대사.
“그래서 말인데요, 장 셰프도 같이 공부합시다.”
“네? 저도요?”
“나랑 같이 파나르어 공부해요. 국경일 행사 때 나는 파나르어로 연설하고, 장 셰프는 파나르어로 음식 소개를 하는 거예요. 어때요?”
“…아.”
나는 혼자서 몇백 명의 음식을 계획하고,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쁠 텐데 파나르어 배울 시간이 어딨어.
물론 대사관 전 직원이 바쁘겠지만 육체적인 노동 강도가 가장 강한 내가 파나르어 수업까지 듣는 건 무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엄청 성공적인 국경일 행사가 될 것 같은데 나랑 같이 배워 볼래요? 물론 강요는 아닙니다.”
강요는 아니라고 하지만 저 기대에 찬 눈빛.
저렇게 외국어 배우는 걸 즐거워하니깐 외교관이 된 거겠지. 말로는 공부가 힘들었다곤 하지만 분명 억지로 한 건 아니었을 터.
다른 나라 요리를 배우자며 누군가에 말을 할 때 내 표정도 저렇게 신이 나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네 같이해 보시죠 그러면.”
“정말요? 같이하는 겁니다. 일주일에 3번, 나랑 같이 관저에서 저녁 먹고 수업 듣고 퇴근하는 걸로. 오케이?”
“오… 오케이입니다.”
조금 당혹스럽긴 했지만 나 역시 파나르어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이제 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그냥 물건을 사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고기나 생선 등을 한국식으로 손질해 달라고 말할 땐 막막해져서 결국 그냥 돌아오곤 했다.
예를 들어 LA갈비를 만들고 싶어서 뼈까지 길게 손질해 달라는 설명을 하지 못해 그냥 갈비찜을 만들었다. 또 시장에는 다양한 해산물을 팔지만 개불이나 미더덕 등을 표현하는 말을 알지 못해 포기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분명 파는 곳이 있을 텐데.
김용수 대사의 말대로 내가 만든 음식을 파나르어로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면 손님들의 만족도는 더욱 커질 것이다.
특히 몇 년을 보고 진행하는 국경일 행사는 이런 세심한 준비가 더욱 필요했다.
“근데 저희 과외 선생님은 구하셨나요?”
얼마 전 장학생 선발의 최종까지 올라왔던 학생들 중 한 명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우리의 선생님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우리한텐 윤아 씨가 있잖아요. 물어보니깐 그 정도는 충분히 아르바이트해 줄 수 있다 해서 말해 뒀어요.”
“아 윤아 씨요?”
“최고의 선생님 아닌가요?”
“그… 그렇죠.”
* * *
당장 다음 날부터 윤아는 퇴근 후 관저로 오게 되었다. 보아하니 윤아 역시 원해서 온 모양새는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대사님.”
“윤아 씨,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윤아 씨.”
약간의 어색한 기류를 버텨 내고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어찌 보면 윤아와 나는 회사에서 가장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적은 말단 직원.
실제로 난 경력이 적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 나이로 봐선 막내급 직원이었다.
동기가 옆에 있다곤 하지만 막내 직원이 사장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 윤아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이 될 것 같았다.
“첫날이니깐 가볍게 알파벳부터 배워 볼까요?”
그래도 파나르에 온 지 몇 달이나 지났으니 알파벳 정도는 독학으로 익혀 놨었다. 정확하게 발음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읽을 줄은 알았다.
“저 윤아 씨.”
“네 요리사님.”
“저 알파벳 정도는 읽을 줄 알아요.”
“정말요? 다행이네요.”
윤아도 이 과외가 막막했나 보다.
회사의 상사를 가르쳐야 하기도 하고, 너무 기초부터 가르쳐야 할 생각에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알파벳을 안다는 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알파벳은 넘어가고 인사말부터 배워 볼까요?
“저… 윤아 씨.”
“네 대사님.”
“미안한데 나는 알파벳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네?”
나와 윤아의 입에서 동시에 “네?”라는 물음이 튀어나왔다. 설마 김용수 대사가 그 정도도 모를 거라 생각하진 못했다.
여태 파나르 사람들과 미팅도 많이 했을 텐데….
“밀려 있던 업무가 워낙 많았어서….”
“아… 그러면 알파벳부터 해 볼까요?”
김용수 대사는 창피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윤아 역시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도를 김용수 대사에게 맞추는 수밖에.
그렇게 첫 번째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건 영어랑 달라서 에이가 아니라, 어로 발음해야 한다고 몇 번 말씀드렸는데요.”
“아이고 또 깜빡했네요. 내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네요.”
아무래도 직급의 차이가 너무 컸던 탓일까.
학생들에게 하듯이 화도 내며, 다그칠 수 없었던 윤아의 수업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고 있었다.
김용수 대사에게 깜지를 시키거나 숙제를 잔뜩 내어 줄 수는 없었으니.
아무리 공과사를 구분한다 해도 김용수 대사를 대하는 윤아의 태도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큰 성과 없이 며칠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대사님.”
“네. 윤아 씨.”
“꼭 파나르어를 능숙하게 할 필요는 없으신 거죠?”
“그… 그렇긴 한데 왜요? 국경일 행사 때 어설프더라도 파나르어로 연설을 하려고 배우는 겁니다. 그래야 파나르 손님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국경일 행사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 상태로는 연설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윤아는 뭔가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