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62화 (63/202)
  • 62. 본업 2

    “하하하 저희한테요?”

    안지용 참사관의 미소 띤 얼굴은 모든 것을 가볍게 넘어가 주겠다라는 말과 같아 보였다.

    몇 시간 동안 한민족, 한겨레 그리고 같은 처지의 중년 남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해 줄 사이가 된 것 같았다.

    교수 중 한 명이 눈이 풀린 채로 입을 열었다.

    “사실 많았죠. 지금도 여전하구요.”

    “그래요?”

    “처음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사실 어떤 회사나 다른 교수들이 봉투를 건네도 놀라운데 어느 날은 수업을 듣는 학생이 그걸 건네더라구요.”

    “학생이요? 스무 살짜리 학생이요?”

    안지용 참사관은 김용수 대사와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대수롭지 않은 척 맞장구를 치라는 의미.

    “네 맞아요.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그냥 선물이래요.”

    “선물이라….”

    “그래서 뭘 위한 선물이냐니깐 자기가 이번에 과제 하나를 못 했는데 그걸 반영하지 말고 점수를 달라고 하더라구요.”

    “허허 싹수가 노랗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안지용 참사관과 김용수 대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당연히 돌려보냈죠.”

    “돈도 같이요?”

    “당연하죠. 학생들 사정 뻔히 아는데 어떻게 받겠습니까.”

    그럼 그렇지.

    한국 교수들은 다른 교수들과 달리 대우도 충분히 좋았고, 대사관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냈으니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은 만들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그 다나라는 학생이 오히려 거짓말을 했다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하하 역시 진정한 교수님들이네요.”

    안지용 참사관과 김용수 대사는 실망보단 오히려 안심한 것 같았다. 평소 믿었던 사람들이기에 내가 했던 말이 거짓이길 바랐다.

    김용수 대사가 손짓하자 안지용 참사관은 품속에 숨겨 두었던 녹음기의 전원을 끄려고 했다.

    “근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거절하는 것도 점점 귀찮아져. 안 그래요?”

    “그렇지. 갖고 오지 말라 해도 계속 갖고 오는데. 그거 거절하는 게 더 일이야.”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교수 한 명이 나서서 말을 꺼냈다. 마치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말을 했지만 나머지 두 교수 역시 동의하는 듯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품속으로 손을 가져가던 안지용 참사관은 잠시 멈칫했다.

    “특히 대사관 장학생 선발 기간엔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지 모른다니까요.”

    “장학생 선발이요? 그때도 그런 봉투가 많이 들어오나요?”

    “사실 그때가 제일 많이 들어오죠.”

    안지용 참사관은 동네 형들의 호기 넘치는 에피소드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교수들을 계속 부추겼다.

    “그것도 솔직히 짭짤하겠어요. 다시 돌려 달라는 학생들은 없을 테니.”

    “아니요 있긴 있어요. 그것도 참 웃겨요. 봉투를 줬는데 자기는 왜 장학생으로 뽑히지 않았냐고 다시 돌려 달라고 한 학생도 있었어요.”

    “정말요? 그건 낙장불입이지 하하하.”

    “그러게요. 하하하.”

    “에이 그러면 관저가 아니라 교수님들한테 얻어먹었어야 했는데.”

    “하하하. 그러면 이번 장학생 선발이 끝나면 저희가 제대로 한턱 쏘겠습니다. 그땐 지갑이 두툼해질 테니까요.”

    안지용 참사관과 김용수 대사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교수들은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른 채 남은 술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준비한 디저트가 있었지만 두 사람의 지시에 따라 끝내 서빙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먹었던 것도 토해 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술이 깬 다음 얘기를 할 계획이었다.

    “오늘은 이만 일어나시죠.”

    “왜요. 좀만 더 마시죠. 같은 처지인 사람끼리 밤을 새워 보시죠.”

    “같은 처지는 무슨…. 이제 일어나세요. 긴말 안 하겠습니다.”

    김용수 대사의 손짓에 술 한 잔 입에 넣지 않은 안지용 참사관이 교수들을 관저 밖으로 밀어냈다.

    갑자기 차가워진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는지 교수들은 밀려나는 와중에도 신이 나 있었다.

    제대로 집에 들어가든지 말든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안 참사관 고생했어요. 술의 유혹을 참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공과 사는 제대로 구분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휴우…. 아니길 바랐는데 결국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 버렸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이번 장학생 선발 때부터 시스템을 바꿔 보시죠.”

    “당장 내일 오후에 내 사무실로 교수들 호출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매사 온순하고, 목소리 한번 높인 적 없던 김용수 대사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술은 한 잔도 하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혹시나 해서 준비해 둔 주전부리와 후식은 아깝지만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다나의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으니까.

    이제 증거로 토대로 그들의 자백을 받아 내면 끝이었다. 안지용 참사관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 * *

    다음 날 대사관 사무실.

    “안녕하십니까 대사님. 해장은 하셨어요? 어제 어떻게 집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네요. 허허허.”

    친구라도 된 듯 교수들은 김용수 대사의 방 소파에 드러눕듯이 앉았다.

    김용수 대사는 별다른 말 없이 앉아 있었고, 안지용 참사관이 교수들 앞에 녹음기를 올렸다.

    “이게 뭔가요?”

    “정말 교수님들은 아니길 바랐습니다.”

    의아해하는 교수님들을 뒤로한 채 안지용 참사관은 재생 버튼을 눌렀다.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술에 취해 발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들이란 걸 알게 되자 교수들은 순식간에 당황했다.

    “이… 이걸 왜?”

    “조용히 하시고 끝까지 들으시죠.”

    김용수 대사의 단호한 대답에 교수들은 좌불안석하면서도 꼼짝하지 못했다.

    몇 분간의 부끄러움을 견뎌 내자 왜 자신들이 이곳에 불려 왔는지 알게 되었다.

    “제가 왜 교수님들을 불렀는지 이제 아시겠죠?”

    “아니… 큰돈도 아니고, 이들의 고유한 문화를 저희만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밖에 더 됩니까?”

    “허….”

    당장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하겠다는 말을 했더라도 모자랄 판에 어이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교수들이었다.

    그것을 파나르 고유의 문화라며 거절하지 못했다니.

    김용수 대사는 특히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장학생 장사를 했단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세 분 당장 한국 돌아갈 준비 하세요. 제가 모든 라인을 이용해서 여러분들을 돌려보낼 겁니다. 아니 모든 라인을 동원할 것도 없죠. 이렇게 본인들 입으로 자백을 했으니.”

    “대사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그러기에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거 전부 학생들한테 돌려줄 테니 한 번만 넘어가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돈을 돌려주는 건 당연한 거고, 이건 아무리 부탁을 해도 그냥 넘어갈 순 없습니다.”

    교수들은 심지어 무릎까지 꿇고, 울고불고 빌어 봤지만 김용수 대사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안지용 참사관도 화가 난 표정으로 매달리는 교수들을 전부 방에서 쫓아냈다.

    “이번 대사관 장학생은 우리가 직접 뽑습니다. 그렇게 알고 계세요.”

    “제발요 대사님!.”

    김용수 대사가 공식적으로 퇴직한 지 한참이나 지났다고 하지만 이런 일을 해결하는 것 정도는 힘에서 밀리지 않았다.

    3명의 교수들이 본래 근무하던 대학 측에서도 외교부의 징계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감싸고 돌았다간 자기 대학의 명예에도 먹칠을 할 수가 있었으니.

    엄청난 규모의 돈은 아니었지만, 몇 년 지속된 이 비리는 그들을 파면시키기에 충분했다. 실수라는 이름으로 끝내기엔 그 기간이 너무 길었다.

    * * *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해 장학생 선발이 늦어진 점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번 일로 학생들이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그건 걱정 마십쇼 총장님. 저 역시 총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파나르 국립 대학의 총장은 이번 사건을 직접 나서서 해결했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매년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대사관 장학생 제도가 사라지게 된다면 학교 측의 명성에 금이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 장학생 선발 과정은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대사관 측에 직접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용수 대사는 한국에서 공부하길 희망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빠르게 만들었다.

    아무런 조건도 필요 없다.

    학과, 학년, 스펙 등 한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도 지원할 수 있었다.

    순수 실력으로만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

    두 번의 시험과 한 번의 면접을 통해 대사관 장학생을 선발하는 것이다.

    이전보다 훨씬 오래 걸리고, 준비할 게 많았지만 확실히 공평한 방식이었다.

    “그럼 1차 필기시험 시작하겠습니다.”

    파나르 국적의 한국어 교수가 참여하고, 대사관 측에선 윤아가 참여해 만든 시험지가 배포되었다.

    시험지를 받아 든 다나를 비롯해 몇몇 학생들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다나에게 이 정도 시험은 껌 씹는 것보다 수월했다. 마킹에 실수만 없었다면 볼 것도 없이 만점이었다.

    “두 번째는 한국어로 에세이 쓰기입니다. 주제에 맞는 글을 자유롭게 써 주시면 됩니다.”

    두 번째 시험은 특별한 정답이 없는 서술형 시험.

    한국인들에게도 이런 유의 시험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나는 거침없이 글을 써 내려갔고, 분량만을 늘리기 위해 잡설이 섞이지 않은 깔끔한 답안지를 제출했다.

    서술형 시험은 어려운 난도 탓에 중간에 몇 명이 포기하고 나가기도 했지만 다나는 여유롭게 3차 면접까지 갈 수 있었다.

    공정한 시험으로 경쟁을 하면 다 이길 수 있다는 말이 허세는 아니었다.

    “1, 2차 합계 점수가 가장 높은 3명에게만 면접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며칠간 이어진 시험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덕수에게 처음 장학생 선발의 부조리를 알린 다나는 결국 최종 3인까지 남게 되었다.

    3차 시험은 면접.

    “다음, 다나 씨 들어오세요.”

    다나는 3차까지 올라온 3명 중 가장 마지막으로 면접을 진행했다. 김용수 대사는 다나가 면접실로 들어서자 고맙다는 말부터 전했다.

    “면접에 앞서 먼저 다나 학생에게 용기 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 주고 싶네요.”

    “저는 용기를 낸 적이 없습니다. 그냥 평소 가지고 있던 불만을 얘기했던 것뿐입니다. 진짜 용기를 낸 건 그 요리사님이십니다. 오히려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공을 덕수에게 돌리는 다나.

    자신은 평소에도 이런 비리를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지만 변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평소처럼 공정하진 못한 시스템에 대해 불만을 얘기한 건데 이렇게 곧바로 변화가 있을 줄 예상하지 못했다는 다나.

    “원래도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더욱 가고 싶습니다. 파나르에선 잘못된 뭔가가 빨리 바뀌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요. 이번에 솔직히 감동받았습니다.”

    “하하하 다나 학생의 말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못 할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다나의 성적은 자신이 호언장담한 대로 경쟁자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공정한 시스템으로 바꾸게 해 준 장본인이었으니 면접에서 가산점이 붙는 건 당연.

    공정한 시스템에서 날개를 단 다나는 후회 없이 면접까지 치를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결과 발표의 날.

    시험을 주최했던 대사관 직원과 교수들의 의견은 만장일치였다.

    “축하드립니다, 다나 학생. 새로운 시스템으로 선발한 첫 장학생이 되었는데 소감 한번 부탁드립니다.”

    올해의 대사관 장학생은 의심 없이 다나의 차지.

    단상에 올라 상장과 트로피를 든 다나는 미소를 머금고 소감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축하드려요, 다나 씨.”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다나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 얼굴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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