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본업
“술안주요? 홍어삼합 같은 것만 아니면 큰 문제 없습니다.”
“그 정도까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주종에 맞는 안주들을 많이 준비해야 할 겁니다.”
김용수 대사는 파나르 대학 교수들의 입을 열기 위한 작전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저는 가볍게 술 한잔하자며 교수님들을 초대할게요. 어차피 얼마 후면 장학생 선발이라 겸사겸사 오라고 하면 의심 없이 초대에 응할 겁니다.”
“그러고 나선요?”
“저번에 외부에서 교수님들을 만났는데 다들 술을 꽤 즐기는 거 같더라구요. 우리 막걸리 담가 놓은 거 남아 있죠?”
“네 많이 있습니다.”
“이번에 한 두어 병만 꺼냅시다.”
“막걸리로 행사를 치르시게요?”
“아니요. 막걸리도 포함시키는 것뿐입니다.”
일단 김용수 대사가 제안한 작전은 이러했다.
교수들을 취하게 만들어 말실수를 유도하는 것.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양의 술을 빠르게 먹이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빠르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만드는 게 이번 작전의 포인트니까.
“나는 막걸리, 보드카, 와인 그리고 맥주까지 주종별로 전부 준비할게요. 장 셰프는 그 술들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고 딱 맞는 안주들을 준비해 줘요.”
“섞어 마시면 금방 취하니까요?”
“그렇죠.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한 팀이다라는 인식을 심어 주면서 경계를 풀게 만드는 거죠.”
“음… 충분히 가능성 있겠는데요?”
“이번 작전의 성공 여부는 장 셰프의 안주가 제일 중요합니다. 배가 부르지 않도록 적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술이 생각날 수 있는 그런 메뉴들! 그런 게 필요해요.”
“걱정 마십쇼. 마지막 접시를 비울 때쯤 이곳이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취할 수 있도록 안주를 준비하겠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해외에서 근무 중인 중년 남자의 경계를 푸는 게 가장 쉽다고 했다.
술 그리고 애국심.
적당히 술에 취해 철 지난 한민족, 한겨레를 외쳐 주면 금세 경계를 풀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외로운 기러기 아빠들에게 한민족만큼 마음을 움직이는 단어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 작전에 반드시 필요한 게 또 하나가 있어요.”
“그게 뭡니까.”
나의 안주만큼 이번 작전에 중요한 존재.
김용수 대사의 입에서 그 존재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단번에 수긍할 수 있었다.
“안치용 참사관이 원래 어디 소속인지 알죠?”
“국정원… 이요?”
“그래요. 원래 정보를 수집하고, 캐내는 게 안 참사관의 일이에요. 게다가 이번 만찬에는 안 참사관이 가장 좋아하….”
“술!”
“맞아요. 아주 이번 만찬에 아주 적합한 인재죠?”
김용수 대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지용 참사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평소엔 점잖은 중년 남자의 대명사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술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남자.
잊고 있었지만 안지용 참사관은 국정원에서 파견된 직원이었다. 술을 통해 정보를 캐내려는 이 작전에 안지용 참사관만큼 적합한 인재가 또 있을까.
다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걸 알아내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 * *
며칠 후 관저.
“안 참사관.”
“네 대사님.”
“오늘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죠?”
“물론입니다 대사님.”
“안 참사관의 눈이 술병에서 떨어질 줄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합니다. 게다가 이번 일은 제 본업이니 제대로 실력 발휘해 보겠습니다.”
각종 맥주며 고급 보드카, 레드 와인과 시원하게 냉각한 화이트 와인. 그리고 직접 담근 막걸리까지 올려진 테이블에서 안지용 참사관은 눈을 떼지 못했다.
군침을 몇 번이나 삼켰지만 오늘은 어떻게든 참아 보겠다며 다짐했다.
“어서오세요 교수님들.”
“안녕하십니까 대사님. 저희도 드디어 관저를 와 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진작에 초대를 했어야 하는데 이제야 기회가 생겼네요.”
“타국에서 함께 고생하는 분들끼리 더 자주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맞습니다. 앞으로 좀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테이블에 앉기 전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그 모습을 본 파나르 대학 교수들 역시 전부 재킷을 벗고 편안하게 착석했다.
“장학생 선발은 매번 하는 일이니 예전처럼 해 주시면 되고, 오늘 만찬에 초대한 이유는 나이도 비슷하고, 처지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술 한잔하자고 모인 겁니다. 아시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저희끼린 자주 회식을 하긴 하지만 학교에서도 보는 얼굴이라 이제 그만 보고 싶네요.”
“하하하 저와 안 참사관도 다음 회식 때 한 번씩 불러 주십시오.”
파나르 대학교수 3명은 김용수 대사의 말 몇 마디에 완전히 경계를 푼 것 같았다. 비슷한 처지의 남자들끼리 술이나 한잔하자는 말이 얼마나 반가웠을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술도 종류별로 준비되어 있고, 우리 장 셰프가 제대로 실력 발휘도 해 줄 테니 실컷 마셔 봅시다!”
나는 제일 먼저 불린 쌀을 곱게 갈아 끓인 잣죽을 서빙했다. 뒤에도 많은 안주가 준비되어 있다지만 술을 많이 마시게 하기 위해선 먼저 속을 편하게 해 주는 게 중요했다.
딱 세 숟가락이면 바닥을 보일 정도의 잣죽을 첫 코스 요리로 선택했다.
“이거 너무 맛있어서 감질나네요. 좀 더 맛볼 수 없을까요?”
“뒤에 많은 요리가 준비되어 있으니 다음 메뉴를 드시죠.”
목과 위장이 소량의 잣죽으로 적당히 코팅이 되자 교수들은 자연스럽게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었다.
“자 다음은 모둠회입니다.”
“이야 모둠회요? 한식 요리사가 이런 것도 할 줄 아십니까?”
“한국 사람들도 오래전부터 회를 즐겨 먹었단 사실을 모르십니까?”
“그렇습니까 하하하.”
신선한 생선이 많았지만 나는 연어와 참치를 선택했다. 특히 연어는 소금과 다시마 그리고 술에 하루를 절여 만든 숙성회였다.
다시마의 감칠맛이 연어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한식 조리법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이 연어회 뭔가 다른데요?”
“곤부즈메라고 하는 숙성법인데, 연어의 비린내는 사라지고 감칠맛이 넘쳐날 겁니다.”
“그러네요. 게다가 이 참치는 타다끼라 그런지 훨씬 고소합니다.”
참치나 연어처럼 기름기가 많은 생선을 회로 먹으면 입 안에 그 맛이 남아 독한 술이 당기기 마련이다.
첫 번째 안주는 시원하게 냉각해 둔 보드카를 위한 안주였다.
회 한 점에 보드카 한잔.
보드카 한 잔의 양이 그리 많진 않지만 40도가 넘는 술을 벌써 서너 잔을 들이켠 교수들이었다.
“그다음은 6시간 동안 저온 수비드해 구워 낸 살치살 스테이크입니다. 입 안에서 살살 녹아내리는 육질을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씹지도 않았는데 고기가 목으로 넘어갔어요!”
“정말이네? 어떻게 소고기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있지?
“하하하 스테이크엔 역시 레드 와인이죠. 비싼 건 아니지만 빈티지가 10년은 지난 와인이니 한번 드셔 보시죠.”
미리 약속한 대로 김용수 대사는 안주마다 적당한 술을 빠르게 바꿔 가며 권했다.
교수들은 내 음식이 맘에 들었는지 술은 주는 대로 의심 없이 받아 마셨다.
“역시 소고기엔 레드 와인이네요. 오래 숙성된 거라 그런지 아주 좋습니다.”
“그럼 이 화이트 와인도 한번 드셔 보시죠.”
“화이트 와인도요?”
나는 서둘러 다음 음식을 들고 나섰다. 대부분 서너 번 입에 넣으면 없어질 양들이라 금방금방 코스가 교체되고 있었다.
“이건 바지락 술찜인데, 한국식으로 청양고추도 좀 썰어 넣고 얼큰하게 끓여 봤습니다.”
뚝배기에 가득 담긴 바지락은 화이트 와인 몇 병을 전부 비울 때까지 식지 않았다.
“음식이 끝도 없이 나오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엔 양이 적어서 조금 아쉬웠는데 슬슬 배가 부르네요.”
“그래도 한국인이라면 밥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수들의 혀는 어느새 꼬여 있었다. 쓸데없는 웃음도 많아졌고,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손에서 놓치는 일도 잦아졌다.
작전이 먹혀들어 가고 있었다.
“식사는 멸치 육수로 끓인 배추된장국이랑 전 몇 가지 구워 봤습니다.”
“배가 부르지만 이 된장국은 진짜 최고네요. 한 그릇만 더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이제는 얼마든지 더 줄 수 있다.
배도 부를 대로 불렀을 거고, 이미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직접 만든 막걸리란 말에 거절하지 못한 교수들은 배추된장국을 콧구멍으로 먹을 정도로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안 참사관 이제 시작해요.”
“네 대사님.”
안지용 참사관은 품 안에 숨겨 두었던 녹음기를 꺼내 조용히 버튼을 눌렀다.
맛있는 안주와 술이 눈앞에 있음에도 몇 시간 동안 꾹 참고, 분위기를 맞춰 주기만 한 안지용 참사관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교수님들 파나르에 오신 지 얼마나 되셨죠?”
“3년 정도 되었네요.”
“저는 5년이요.”
“2년 차입니다.”
길게는 5년 짧게는 2년째 파나르 생활을 하고 있던 교수들이었다. 그 정도면 파나르 문화에도 충분히 적응을 했을 시간이다.
“교수님들 그래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 파나르에서 벌이가 훨씬 낫죠?”
“그럼요 그럼요. 집도 주고, 수당도 더 많이 주고, 월급도 올려 주니 더 좋죠.”
평소엔 월급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게 조심스러웠지만 오늘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답해 주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안지용 참사관과 김용수 대사가 분위기를 맞춰 준 덕분이다.
“근데 듣자 하니 파나르에서 교수가 그리 인정받는 직업은 아니라던데요.”
“그렇지요. 우리 같은 박사 출신들은 그나마 괜찮은데 파나르에선 그냥 대학 나온 사람들도 교수를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대우가 그리 좋지 않아요.”
“정말요? 그래서 교수인데도 월급이 적은 거구나.”
“그렇지요. 그래서 걔네들 뒤로 뭐 받는 게 습관이 된 거지.”
옳다구나. 걸려들었다.
안지용 참사관의 유도 신문에 세 명의 교수들은 서서히 그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뒤로 받는 거라면… 돈 말인가요?”
안지용 참사관이 두 손가락을 비비며 돈을 세는 시늉을 하자 한 교수가 나서서 말을 이어 갔다.
“월급이 적으니 학생한테고, 업체한테고 다 뒷돈 달라고 하지. 우리 학교에 입학하게 해 주겠다, 장학생이 되게 해 주겠다, 우리 학교에 그 업체를 이용하게 해 주겠다 등등 그러다 보니 그게 습관이 된 거예요.”
“하긴 월급이 택도 없이 적은데 그거라도 받아야 먹고살겠죠.”
“그니까요. 몇 년 살다 보니깐 그 사람들 그러는 거 이해가 가요. 받아야 할 정당한 월급을 못 받으니깐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렇죠.”
안지용 참사관은 어이없는 대답에 잠시 주춤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면 그런 교수들을 상대하는 학생들이나 업체들은 처음부터 돈을 싸 들고 오기도 하겠네요?”
“그렇지 그렇지!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 대사관은 다르네요. 뒷돈을 주고받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깐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습관이 된 거예요. 뭘 물어보기도 전에 돈부터 들이미는 경우도 있다니까.”
한 교수의 대답에 듣고 있던 두 명의 교수 역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교수님들도 그런 경험 해 보신 적 있어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돈부터 들이댄 사람들이 있을 거 같은데.”
안지용 참사관은 바늘 근처까지 온 물고기들을 낚아챌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