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59화 (60/202)

59. 두유노김치

“실력자라면 전원 외국인 국적인 아이돌, 음치라면 그냥 유학생 모임! 당신의 목소리를 보여 주세요.”

“와아!!!!!!!!!!!!!”

파란 눈의 금발인 남자 5명의 입에서 유창한 한국어 발음이 나오자 관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인티나인의 공식적인 첫 한국 무대 데뷔였다.

비록 음악 방송의 무대는 아니었지만 오늘 이후로 한국에서 방송 출연이 끊이지 않을 거란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정말 ‘와’라는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정말 한국이랑은 아무런 관련도 없어요?”

“네 전혀 없습니다.”

“혼혈도 아니고?”

“아닙니다.”

나인티나인의 라이브 무대가 끝이 나자 눈앞에서 본 엠씨들 역시 그들의 실력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질문 세례를 했다.

도저히 전문 트레이너나 소속사 없이 만들어 낸 실력이란 게 믿겨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유창한 한국어 실력은 또 무엇인가.

오늘 당장이라도 데뷔를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오늘 최고의 반전의 주인공인 파나르 국민 아이돌 나인티나인 여러분! 아주 특별한 목표가 있다고 하던데요?”

“파나르의 국민 아이돌이라는 칭찬이 조금 과하긴 하지만 파나르에는 아이돌이 저희뿐이라서요.”

“그럼 국민 아이돌 맞긴 맞네요.”

“네 그럼 인정하겠습니다.”

“하하하 그걸 또 본인들 입으로….”

한국의 엠씨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나인티나인 멤버들은 예능까지 완벽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희는 파나르의 국민 아이돌임과 동시에 한국 최초의 외국인 아이돌 되고 싶습니다.”

“와아… 굉장히 관심이 가는 타이틀인데요? 사실 음악적인 실력은 오늘 확실히 증명되었고, 한국어 실력도 저보다 나은 거 같고….”

“과찬이십니다.”

“이거 봐 봐. 나보다 낫다니까. 박진형 씨!”

“네? 저요?”

“이분들 JHP에서 데려가는 건 어떠세요? 당장 내일부터 엄청난 관심을 가져다주실 거 같은데요?”

“안 그래도 지금 직원들에게 연락하는 중입니다. 끝나고 저희 얘기 좀 하고 가요.”

엠씨의 장난 섞인 질문에 능청스럽게 받아친 박진형의 휴대폰엔 실제로 메시지가 남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 세계에 가수를 꿈꾸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 있으면 해 주세요.”

남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 왔고, 또다시 험난한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인티나인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수를 꿈꾸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얼마 전에 누군가를 만난 적 있습니다. 아마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희는 이 무대에 서질 못했을 겁니다.”

몇 달 사이에 완전히 달라진 자신들의 인생을 돌아보며 리더 에이스는 말을 이어 갔다.

“가수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악, 추구하는 음악이 뭔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여러분들을 좋아해 주는 팬들이 원하는 음악이 뭔지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박진형을 비롯해 가수인 게스트들까지 나인티나인의 말에 집중했다.

“이런 근사한 무대에 서고 싶으시다면 팬들의 목소리에 집중하세요. 아직 팬들이 없다면 가족, 친구, 지인도 좋습니다. 그들이 없으면 여러분들이 하는 음악은 그냥 취미에 불과합니다.”

나인티나인은 자신들을 끝까지 설득해 준 덕수와 윤아를 떠올렸다.

“자신보다 팬들을 위해 노래하는 시간을 더 늘려 보세요. 그리고 당신의 실력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는 사람에게도 최선을 다하세요. 그러면 어느새 인생이 바뀔 겁니다.”

관객은 물론 게스트들 사이에서도 박수가 터져 나왔다. 피디와 작가는 금발의 외국인들 입에서 판을 깔아 준다는 표현이 나왔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이번 방송은 여러모로 대박 날 요소가 넘쳐났으니까.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멋있는 말이었죠? 박진형 씨 이들을 위해 판을 깔아 줄 수 있나요?”

“네 가수로서도 사업가로서도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이었습니다. 제가 제대로 판을 한번 깔아 보겠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한 농담으로 끝나지 않고, 박진형은 실제로 나인티나인에게 계약서를 건넸다.

한국의 3대 대형 기획사 중 하나인 JHP에 정식 가수로 계약을 하게 된 나인티나인은 엠씨의 예상대로 곧바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윤아야 몇 년 후에 너랑 나랑 나인티나인이랑 다 같이 청와대에서 만나면 재밌겠다.”

“진짜.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소름 돋겠는데?”

청와대 요리사로서, 외교관으로서, 한국의 문화를 널리 알리는 가수로서.

우린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충분했다.

윤아는 내가 부럽다고 했지만, 오히려 나는 회귀 전 나보다 훨씬 재능 있고, 노력하고 있는 윤아와 나인티나인이 부러웠다. 그들은 순수하게 본인들의 힘으로 뭔가를 이뤄 냈고, 또 이뤄 낼 사람들이니까.

* * *

“좋은 아침입니다. 대사님.”

“어서 와요. 장 셰프.”

“지나는 계속 집 안에서 키우기로 했습니까?”

이제 관저로 출근하면 김용수 대사뿐 아니라 지나까지 꼬리를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아직은 앳된 모습이지만 며칠 전보다 제법 자라 있었다.

“아니요. 어젯밤에 비가 좀 와서 잠시 들어오라고 했어요. 마당에서 키워야 더 크면 집을 지키죠.”

“복 터졌네요 지나는. 그 시골에서 대사관 지키는 개로 인생 역전했으니까요.”

“인생 역전 맞겠죠? 오히려 더 스트레스 주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대사님이 잘 챙겨 주시고, 제가 맛있는 거 많이 주니깐 좋은 인생 맞을 겁니다.”

“남부럽지 않게 키워 봐야죠. 덕분에 관저가 훨씬 밝아진 것 같아요.”

김용수 대사의 말대로 강아지 한 마리 덕분에 넓은 관저가 가득 찬 느낌이었다. 실제로도 하루 종일 마당을 뛰어다니기 바빴으니.

“이번에 장 셰프 도시락 덕에 제법 큰 돈이 들어왔어요.”

“정말요?”

“저도 행사를 치러서 돈을 벌어 본 적은 처음이라 신기하긴 하네요.”

“다행이네요.”

“이건 잘 아껴 뒀다가 국경일 행사 때 씁시다. 다음에 또 돈 벌 기회가 있으면 덥석 물어 와도 되죠?”

“당연하죠. 저도 뿌듯합니다.”

이번 K-문화의 날 행사 때 판매한 도시락 대금은 올해 예산으로 포함되어 다른 행사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특히 가장 많은 돈과 인력이 사용되는 국경일 행사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문화의 날 행사가 끝나고 행사 문의가 많이 들어오네요. 꽤 성공적이었나 봐요.”

“어떤 행사요?”

한인회, 아니 대사관 역사로 쳐도 가장 큰 성공을 이룬 K-문화의 날 행사의 파급력은 끝이 나고도 계속되었다.

나인티나인은 목표대로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떡볶이와 닭강정 등 한국 음식들의 판매량이 크게 급증했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일시적이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는 교민들에겐 큰 도움이 되는 행사였다.

“엄청 많은 제안이 왔지만 장 셰프가 꼭 해 줬으면 하는 게 하나 있어요.”

“어떤 건가요?”

“혹시 파나르 국립 대학에 동아시아 학부가 있는 거 알고 있나요?”

“그래요? 파나르 국립 대학은 들어 봤지만 학부나 학과가 뭐가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파나르의 엘리트들이 가장 많이 진학하는 대학.

한국으로 치면 서울 대학교나 다름없는 게 파나르 국립 대학이었다.

“동아시아 학과에서 한국어 수업도 하고 있는데 근 몇 년간 학생 수가 많이 늘었대요.”

“그래요? 은근히 한국어가 인기 있나 보네요.”

“그런가 봐요.”

정식 학과까지는 아니었지만 학부 내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수는 매년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파견 와 있는 교수들도 몇 명 있는데 이번 행사를 보고 자기네들 학생들한테도 한식 강의를 좀 해 달라고 하더군요.”

“한식 강의요?”

“네 떡볶이나 닭강정 같은 게 제법 인기가 많았었나 봐요.”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도록 달달하게 만들었으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맛있게 먹어서 좋았지만 훨씬 훌륭한 한국 음식이 많은데 좋은 기회에 알리지 못한 게 조금은 아쉬웠다.

“그럼 또 대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로 강의를 해야 하나요?”

“아니에요. 이번 강의는 한국 문화나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좀 더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사례가 가미되어 있는 음식들이면 좋겠답니다.”

“정말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한식을 만드는 것만 주가 되지 않고, 음식에 대한 역사나 재밌는 이야기 등을 함께 가미해서 강의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긴 전통과 역사를 가진 한국 음식들을 많이 소개해 주지 못해 내내 아쉬웠는데 좋은 기회가 생겼다.

“조금 진부하겠지만 김치는 꼭 포함해서 강의를 해 줬으면 한대요.”

“전혀 진부하지 않습니다. 한국 음식을 말하는데 김치를 빼고 얘기할 수 있나요?”

보이는 외국인마다 두유노김치를 물어보거나 김치만이 한국 음식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건 나도 싫어한다. 하지만 한국 음식의 역사를 얘기할 때 김치 얘기가 빠진다는 건 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번 학생들은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테니 더더욱 김치 얘기를 제외할 수 없었다.

“네 그 강의 진행하시죠. 재밌을 거 같네요.”

“그렇죠? 나도 장 셰프가 수락할 줄 알았어요.”

“그럼 윤아 씨도 같이 가야겠죠? 통역이 필요할 테니.”

“아닙니다. 학생들 수준이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답니다.”

“역사에 대한 내용이나 한자 같은 것도요?”

“네 걱정 말랍니다.”

“파나르엔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참 많군요….”

진심으로 우러나서 나온 말이었다.

한국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노래를 시켜도 평균 이상은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많다. 마찬가지로 파나르는 2개 국어를 하는 사람은 평범할 정도로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다.

나인티나인 멤버들도 그렇고, 윤아와 한국어로 대화하며 걸어가는데 뜬금없이 ‘안녕’이라고 인사를 하며 지나간 사람도 있었다.

나만 외국어에 아무런 재능이 없었다. 파나르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고 싶은데….

“그럼 대학교 측에 연락해서 날짜 잡도록 하겠습니다.”

“네 강의 내용은 제가 준비하면 될까요?”

“먼저 준비해 주시고, 저랑 한번 검토한 뒤 진행하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이런 강의는 호텔에서 퇴직하기 몇 년 전에 많이 의뢰를 받았었다. 전국 대학교의 조리과들은 물론이고, 음식점 창업을 준비 중인 사장님들을 위해서 강의를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 전통 한국 음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쉽게 질려 했던 기억이 있다.

대학교의 조리학과 역시 단독으로 한식과를 가지고 있는 대학교도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양식이나 일식들을 하길 원했지.

사장님들 역시 일이 번거롭고, 돈이 안 되는 한식보단 양식, 중식, 일식 등을 선호했고.

그러다 보니 강의를 나가는 횟수는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오랜만에 강의를 준비하다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내가 한국 음식을 선택한 이유는 재밌어서였다.

김치가 원래는 빨갛지 않았다는데 그땐 빨갛게 끓인 김치찌개나 묵은지찜 같은 음식이 없었을까?

또 제일 처음 홍어를 삭혀 먹었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땠을까?

산에서 먹을 수 있는 버섯과 독버섯을 구분하기 위해 몇 명의 사람이 죽었을까?

한국 음식에서는 사용하는 식재료가 워낙 다양했기 때문에 많은 의문점이 생기곤 했다.

이런 얘기들을 해 주면 재밌어할 줄 알았는데 그냥 한국 역사나 음식 얘기는 전부 지루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한국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라니까 한번 작은 기대라도 해 봐야지.

* * *

파나르 국립 대학교.

“후우.”

오랜만에 하는 강의라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강의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커다란 강의실에 가득 찬 학생들과 교탁에 올려진 버너와 각종 재료들.

조리학과가 없어 별도로 조리 시연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마땅히 없었다.

그럼에도 꼼꼼히 준비했다는 게 단번에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교수님의 간단한 안내 후 한국어로 인사를 보내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익숙한 말소리.

영락없이 한국 대학교의 강의실이었다.

“안녕하세요.”

“왜 이렇게 젊어요 교수님.”

“저희랑 친구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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