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너의 목소리가 보여
나인티나인은 내가 파나르 음식들을 오늘 처음 만들었다는 말에 놀란 굉장히 눈치였다. 하지만 그보다 왜 자기들을 위해 영상을 100번이나 돌려 보며 파나르 음식을 준비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저희야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좋긴 한데 왜 이렇게까지….”
“제가 할 수 있으니까요.”
“네?”
나는 저들의 입에서 이 질문이 나오도록 대화를 유도했다. 이 젊은 예술인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사실 윤아 씨가 여러분들을 섭외하는 자리에 같이 가 달라고 했을 땐 별생각 없었습니다. 왜냐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거든요. 제 파나르어 실력이 형편없어서요.”
“…….”
나인티나인과 윤아 둘 다 이해한다는 듯 가만히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여러분이 한국어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윤아 씨가 어려움을 겪자 저에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기회라면요?”
“제가 할 줄 아는 요리로 윤아 씨를, 아니 대사관을 도울 수 있는 기회요.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파나르 요리를 만드는 제 실력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요. 며칠 동안 연습을 하고,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 형편없는 음식을 만들었을 겁니다.”
“덕분에 저희는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나인티나인은 내가 뭘 말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오늘 플롭과 라그만, 바우르삭 같은 음식을 만들어 드린 저에 대한 감정이 어떠셨어요?”
“당연히 훌륭한 요리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분명 한식 요리사라고 밝혔는데 다른 음식을 하는 모습이 부자연스럽거나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나요?”
“글쎄요. 더 대단하다고 느꼈지 이상한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혹은 줏대가 없다고 느껴지지 않았나요?”
“전혀요.”
내가 대사관에서 요리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한식 실력은 증명되었다. 나인티나인 역시 자신들의 음악 실력이 훌륭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제가 오늘 이 음식들을 준비한 이유는 여러분들이 원해서였습니다. 여러분들이 한식을 원했다면 저는 이곳에 근사한 한식 뷔페를 차렸을 겁니다. 하지만 한식이 입에 맞지 않다고 했으니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했습니다. 이게 제 일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거든요.”
“…….”
“팬들이 종종 한국어로 된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한 적 없나요?”
“사실은… 있습니다. 아니 많았습니다. 저희들의 목소리로 어떤 노래를 듣고 싶다는 연락을 많이 받습니다.”
“그렇지만 본인들의 노래가 아니란 이유로 계속 거절하고 있었구요? 이번처럼요.”
“네 저들은 저희들의 진정한 팬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항상 거절해 왔습니다.”
나인티나인 멤버들은 이제야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챈 것 같았다.
“음악이나 요리는 물론이고, 모든 예술은 그것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냥 먹고사는 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음악 왜 하세요? 자기만족? 물론 그것도 중요하죠. 그렇지만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까?”
나의 물음에 5명의 멤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자기만족만을 위해서 이렇게 뼈와 살을 깎는 노력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많은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최종 목적일 터. 많은 예술가들의 목표이고 꿈일 것이다.
“제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도 맛있게 먹어 줄 손님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음악 역시 그것을 들어 주는 팬들이 없다면 그냥 취미 생활에 지나지 않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팬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 주세요. 그리고 당신을 고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 보세요. 예상치 못한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나는 청와대에서 요리를 하는 것이 목표이고 꿈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 파나르 대사관을 선택했고, 이 자리 그리고 내 채용을 허락해 준 김용수 대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실력이 좋다 한들 그것을 알아주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판을 깔아 줄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필요하다. 나에겐 그게 김용수 대사였고.
나인티나인이 원하는 것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부와 명예, 인기를 전부 가진 아이돌이라면 이런 구석의 연습실에서 고집만 부리고 앉아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판을 깔아 준 윤아와 김상율 회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태도 역시 필요한 것이다.
“파나르 안에서 그것도 젊은 사람들만 알아주는 가수가 되는 게 목표인지, 한국을 발판 삼아 전 세계가 알아주는 가수가 되는 게 목표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
“저는 나중에 한국의 블루 하우스에서 한국 요리를 하는 것이 꿈입니다. 그래서 제 실력 향상에, 그리고 제 목표에 좀 더 빨리 도달할 수 있게 도움이 되는 거라면 뭐든지 배우고 익힐 겁니다. 저 스스로에게 한계를 주고 싶지 않거든요.”
나인티나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말을 하고 김상율 회장님의 연락처를 건넨 뒤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윤아는 옆에서 한마디도 거들지 않았지만 한결 가벼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휴우 이제 모르겠다. 네가 잘하는 파나르어로도 설득해 봤고, 내가 잘하는 요리로도 설득해 봤는데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덕수야.”
“응?”
“고마워.”
“아직 섭외 성공한 것도 아닌데 뭐.”
“그거 말고.”
“응? 뭐가?”
윤아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불타오르고 있었다. 뭔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난 그냥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만 집중하며 살았거든. 꿈이나 목표 같은 건 없고, 그냥 남에게 짐이나 되지 않을 정도로만 사는 거.”
“갑자기 그런 말을 왜 해? 대사관에서 근무할 정도면 엘리트지.”
“아니야. 나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내전이 없었다면 난 여기서 일하지 못했을 거야.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지원했을 테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윤아였다.
“근데 이번에 너랑 나인티나인을 보고 결심한 게 하나 있어. 나랑 나이도 비슷한데 한쪽은 세계적인 가수를 꿈꾸고 있고, 누구는 청와대에서 요리를 할 꿈을 꾸고 있는데 난 겨우 오늘 하루만 잘 보내 보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야 뭐 사람마다 생각하는 건 다르니까.”
“너희들에 비해 조금 늦었지만 나도 인생의 목표가 하나 생겼어.”
“정말? 뭔데?”
“정식 외교관이 된 후 공관장까지 하는 게 내 목표야.”
대사관 근무 경험과 능숙한 파나르어 실력, 그리고 몇 년 공부에 집중한다면 외교관은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꿈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공관장까지 하겠다는 윤아.
동갑내기들 사이에서 며칠 동안 주눅 들어 있었단 사실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섭외에 목을 매고 있었는지 조금 이해가 되었다.
“이번에 나인티나인 섭외가 되든 안 되든 이제부터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달려가야겠어.”
“멋있다 임윤아. 나중에 청와대에 와서 대사 임명장 받을 때 내가 밥해 줄게.”
“정말? 임명장보다 그때 네가 무슨 음식을 만들어 줄지 더 기대된다.”
“하하하. 기대해도 좋지.”
나와 윤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 * *
다음 날.
-여보세요 파나르 대사관 임윤아 행정원입니다.
-아! 여보세요 행정원님. 저 한인회 회장 김상율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회장님.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한인회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아직 섭외 확답 연락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죄송해요 회장님 아직 확답을 못 받아서요. 급하신 거면 다른 분들 섭외하셔야 할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이세요? 섭외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전화한 건데.
-네? 나인티나인이 행사에 참여하겠대요?
-네 한국어로 된 노래 3곡이랑 본인들 노래는 원하는 만큼 부르게 해 달라는 조건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정말요? 다행이네요!
-네 안 그래도 저희 딸이랑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깐 나인티나인 인기가 엄청나더라구요. 벌써부터 사인받아 달라고 난리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임윤아 행정원 아니었으면 괜히 돈만 낭비할 뻔했네요.
-맞습니다. 확실히 흥행할 겁니다 회장님!
윤아는 회장님의 전화를 받고 뛸 듯이 기뻤다. 비록 덕수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자신이 시작한 일을 자기 손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어서 뿌듯했다. 게다가 결과도 만족스러웠고.
자기들 노래를 원하는 만큼 부르게 해 달라는 건 몇 시간이고 공연을 할 수도 있다는 의미 아닌가?
걱정거리가 사라지자 이제 팬으로서 나인티나인이 어떤 커버곡을 부를지 궁금해졌다.
* * *
“모든 게 궁금해 How’s your day~”
나인티나인의 목소리로 한국 아이돌의 노래가 들려오자 행사장은 순식간에 광란의 파티장이 되었다.
나인티나인이 초대되었다는 말만으로 행사 기간 동안에 몰린 사람들은 수천 명이 넘었고, 특히 공연이 있는 날에는 주변의 대로변까지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몰렸다.
“우와!!! 에이스, 알램, 바라 사랑해요.”
“오빠들 사랑해요.”
“저희도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한국 교민 여러분들께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미숙하게나마 한국어로 인사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다는 김상율 회장의 입꼬리는 귀에 걸리다 못해 하늘을 향해 퍼덕이고 있었다.
한국어 커버곡 떼창은 물론이고, 수천 명의 팬들이 나인티나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춤을 추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과 달리 춤을 더 좋아하는 파나르 사람들은 나인티나인의 모든 안무를 따라 하며 공연을 즐겼다. 또 예상했던 공연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어서 열창을 하고 있는 나인티나인을 보면 출연료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닭강정 오늘 준비한 거 벌써 다 팔렸어?”
“말도 마세요. 지금 새로 준비하는 중인데 순식간에 사라져요.”
“직원들 식사는 했어?”
“식사는커녕 화장실도 한번 못 갔어요.”
“아이고 끝나면 다른 걸로 확실하게 보상해 줄 테니깐 좀만 파이팅 합시다!”
“아자 아자!”
한인회 사람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몰린 인원 덕분에 정신없이 움직였다. 중간에 따로 식사를 할 시간도 없었고, 화장실 한번 다녀오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한인회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인 행사의 한 부분을 맡았다는 사실에 그 누구 하나도 기분 나빠 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덕수가 준비한 도시락은 급하게 입 속으로 들어가기 바빴다. 저번처럼 도시락에 대한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러분들 덕분에 저희 나인티나인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해요 여러분!”
한국어로 노래를 하고 안무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온 나인티나인의 모습은 각종 SNS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데뷔 이래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인티나인의 모습을 본 팬들은 기뻐했다. 그리고 자랑스러워했다.
* * *
M-mag 방송국.
“아씨 이번 주는 어찌어찌 넘겼는데 또 무슨 수로 사람을 구하냐….”
하루 종일 너튜브와 안스타그램을 뒤져 봤지만 여태 쓸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이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는 반전의 인물을 찾기 위해 몇 달째 온 사방을 뒤지고 있었다.
“어? 이 사람들은 뭐지 한국 사람인가?”
그러던 중 낯선 언어로 된 피드에서 익숙한 노래가 들려오는 걸 발견했다.
한참을 봐도 확실히 한국은 아니었다. 낯선 나라의 풍경이었지만 영상 속 5명의 입에선 능숙한 한국어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몇 번이나 영상을 돌려 봤지만 분명 라이브가 맞다. 조작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만약 조작한 영상이라면 엄청난 편집 기술을 가진 실력자일 터.
이 사람들을 섭외할 수 있다면 그날의 방송은 안 봐도 엄청난 이슈를 몰고 올 게 뻔했다.
제발.
진짜 절실하면 이뤄진다 했던가.
막내 작가는 며칠 동안 수소문한 끝에 영상 주인공들의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파나르 한인회를 통해서.
그리고 몇 주 후.
“너의 목소리가 보입니다 팀. 촬영 시작합니다.”
“벌써요? 지금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