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57화 (58/202)
  • 57. 바우르삭과 라그만

    “저는 대사관에서 찾아오시는 손님들에게 주로 한식을 대접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한식도 좋아하세요? 한국어를 이렇게 잘하시는 거 보면 드셔 보셨을 것 같은데.”

    방금까지 살벌하던 분위기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한국 음식 얘기를 꺼냈다.

    지금까진 괜히 내가 중간에서 끼어들면 윤아에게 방해가 될 거 같아서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이 분위기라면 서로 인사도 없이 돌아설 것 같아서 억지로 입을 열었다.

    적어도 오늘 이 방을 나갈 때 ‘꼭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세요.’라는 말이라도 건네기 위해서.

    “요리사님이셨구나.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계시길래 누군가 했네요.”

    “제가 파나르어를 할 줄 몰라서 조용히 있으려 했는데, 여러분들의 한국어가 이렇게 훌륭한 걸 보니 말이라도 한번 걸어 보고 싶더라구요.”

    불쑥 끼어들었기 때문에 최대한 나를 낮춘 뒤 본론을 꺼내 볼 생각이었다.

    윤아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졌을지언정 나에 대한 믿음이 생긴 건 아닐 테니까.

    차근차근 조심히 다가갔다.

    “연습실에서 종종 식사도 만들어 드시나 봐요?”

    “네? 뭐… 하루 종일, 아니 몇 박 며칠 동안 이곳에서 먹고 자고 하기도 하니까요.”

    “와아 역시… 그 정도는 연습을 해야 이런 나이에 이 정도 실력을 갖추나 봐요. 저도 여러분들의 무대 영상 많이 봤습니다.”

    아까부터 쭉 연습실을 둘러보니, 구석에는 작지만 냉장고 하나와 가스버너, 오래돼 보이는 냄비와 프라이팬 몇 개가 눈에 띄었다.

    쌓인 먼지가 없는 걸 보니 아직도 종종 이곳에서 밥을 만들어 먹는 것 같았다.

    “직접 식사도 준비하면서 노래도 만들고, 안무 연습까지 하시다니. 저는 그렇게는 못 할 거 같네요.”

    “하하하 한 나라의 대사관에서 요리사로 일하시는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은데요? 저희는 음악이지만 요리사님도 그 젊은 나이에 나라를 대표해서 요리를 하시는 거 보면 엄청 노력하셨을 텐데요.”

    과도한 겸손 작전이 조금씩 먹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얼어붙을 것 같았던 리더 에이스의 표정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하하 그런가요? 저는 한국 요리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서요. 여튼 한국 음식 드셔 본 거 있으세요?”

    “음… 사실 멤버들이랑 몇 번 먹어 보긴 했는데 입맛엔 잘 안 맞더라구요. 그렇지?”

    에이스가 뒤돌아서 멤버들의 의견을 묻자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어떤 면에서 별로던가요?”

    “마늘을 빼곤 향신료 같은 것도 많이 사용 안 하고, 고기도 너무 적게 사용하고, 전체적으로 너무 가벼웠어요. 아무리 먹어도 배가 안 부르는 느낌이랄까요?”

    “아 정말요?”

    “근데 그 프라이드치킨 하나는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그거 하나만 기억에 남네요.”

    파나르에선 고수나 파슬리, 허브 등을 다채롭게 사용한다. 또 100g 단위로 고기를 파는 한국과 달리 파나르에선 최소가 1kg.

    만약 그보다 적게 구매하려고 하면 장난치지 말라며 종종 쫓아내기도 한다.

    말이든 소든 닭이든 돼지든 일단 듬뿍 넣어 먹는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칼로리가 높은 음식들이 많았다.

    “하긴 파나르 음식에 비하면 한국 음식들은 간식이나 다름없죠.”

    “하루 종일 연습하고 나서 한국 음식을 먹으면 하나도 충전이 안 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좀 아쉬웠어요.”

    “나중에 한국에서 활동하게 되면 힘 좀 드시겠어요?”

    “하하하 벌써 그런 고민을 할 단계는 아닌 거 같지만 골치 좀 아플 것 같네요.”

    “뭐 인기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금방 원하는 목표를 이루실 것 같습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대화 주제를 돌려 분위기를 바꾸는 데는 성공했다. 초조해하던 윤아도 소소하지만 웃음 소리가 오고 가자 조금 안심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그냥 서로의 말속에 박힌 가시만 뺐을 뿐 원하는 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속으론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어느 하나 양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가 음식 한번 대접해 드려도 될까요?”

    “정말요? 좋죠.”

    “근데 한국 음식 별로라면서요. 다른 걸 만들어 드릴까요?”

    “그렇긴 해도 대사관 요리사님의 음식은 달라도 뭔가 다르겠죠?”

    “하하 저 역시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오늘 말씀하신 내용은 저희가 다시 회장님들을 설득해 볼 테니 한 번 더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 협상을 오늘 당장 결판 지을 생각이 아니었다. 오늘의 일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주워 담기보다 빨리 새로운 물을 떠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저희도 이번 기회가 굉장히 커다란 기회이고 또 쉽게 오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네 이해합니다.”

    “요리사님도 젊은 나이에 대사관의 요리사가 되셨으니 잘 알 거라 생각합니다. 요리도 음악도 예술의 한 분야입니다. 근데 아무런 철학도 없이 예술을 하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저희는 반짝하고 끝이 나는 스타가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 저희한테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의 말에 에이스는 되레 부탁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 역시 우리만큼 간절하게 이 협상이 잘 마무리되길 바라고 있었다.

    “덕수야. 그냥 나오면 어떡해. 오늘 어떻게든 결판을 지어야 하는데.”

    “어차피 오늘은 안 돼.”

    “그럼 내일은 뭐 되냐? 회장님도 고집 꺾을 생각 없으신데. 나인티나인보다 회장님 설득하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회장님을 다시 만날 필욘 없어.”

    “왜? 회장님을 설득해 보겠다고 했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회장님을 설득하는 것보다 나인티나인을 설득하는 편이 훨씬 수월해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엔.

    에이스의 말대로 요리라는 것도 큰 맥락으로 봤을 땐 음악처럼 예술의 범주에 포함된다.

    나 역시 어릴 땐 접시 위에 그림을 그리고, 칼과 도마로 연주를 한다는 표현 같은 걸 좋아했었다.

    나인티나인처럼 젊은 나이의 예술인들이 왜 저런 고집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비슷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나인티나인 쪽을 설득하는 편이 수월했다.

    “바뀌는 건 없어. 커버곡 2곡, 아니 처음 계획대로 3곡 불러 달라는 걸로 협상해 보자.”

    “단 한 곡도 안 부른다는 사람들이야….”

    “일단 해 보자. 어차피 다른 방법 없잖아. 아님 다른 가수들 부르든지.”

    “일단 하는 데까진 해 보고….”

    윤아 역시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나인티나인을 섭외하면 행사의 흥행은 확실히 보장된다. 이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재외 국민 투표라는 어려운 일을 확실하게 지원해 준 한인회에게 실패했다는 말은 전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편으론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지만, 어느 때보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 보이는 윤아였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데?”

    “나는 요리사니깐 밥 한번 만들어 주지 뭐.”

    “밥?”

    * * *

    이틀 후 나인티나인 연습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윤아 씨 그리고 요리사님.”

    저번에 서로 얼굴을 붉힌 것과는 달리 나인티나인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오늘은 저번과 달리 오전에 찾아와서 아직 연습 전이라 힘도 많아 보였다. 그래서 덜 예민한 거겠지.

    일단 우리와 만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게 아니란 게 느껴져서 다행이었다.

    “오늘도 연습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죠. 공연이나 스케줄 없는 날엔 하루 종일 연습실에 박혀 있습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혹시 식사들은 하셨어요?”

    “식사요? 아직 안 먹었긴 한데….”

    “괜찮으면 제가 음식 한번 대접해 드려도 될까요?”

    나는 두 손 가득 담아 온 재료들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데뷔 후에도 여전히 연습실에서 끼니를 해결한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재료를 들고 왔다.

    “하하 조금 당혹스럽긴한데 저희가 언제 대사관 요리사의 음식을 먹어 보겠어요? 완전 좋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곧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넘쳐날 텐데요.”

    “젊은 사람들이나 저희를 좋아해 주지 대사관 같은 곳에선 저희 거들떠도 안 봅니다.”

    “두고 보시죠!”

    오늘도 역시 몇 번 띄워 주자 금세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그러면 염치 불고하고 오늘 점심은 요리사님 음식으로 식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아….”

    리더 에이스의 고급진 어휘력에 또 한 번 감탄이 터져 나왔다.

    나도 이제부터 파나르어에 좀 더 집중해야겠다.

    “저번에 프라이드치킨 좋아한다 하셨죠?”

    “네 맞습니다.”

    “프라이드치킨이랑 다른 음식들 몇 가지를 준비해 드릴게요.”

    내가 가지고 온 버너에 깨끗한 기름을 채워 치킨을 튀겨 냈다. 그리곤 옆에다 파나르식 도넛인 바우르삭 반죽을 튀겨 설탕을 살짝 뿌려 준비했다.

    “이거 바우르삭이에요 설마?”

    “네 치킨 튀길 때 같이 튀겨 봤어요.”

    “와아 이런 것도 할 줄 아세요?”

    맛있게 먹은 치킨도 반가웠지만, 익숙하고 좋아하는 음식들을 만들자 멤버들은 하나둘씩 주방으로 들어왔다. 방금까진 내가 뭘 만들든 연습에만 매진하고 있었는데.

    “윤아야 그 삶은 면 좀 체에 밭쳐서 줄래?”

    “응 알았어.”

    오랜만에 주방 보조로 돌아온 윤아 역시 잠자코 자신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늘은 여태 바빴던 입 대신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자 이제 다 같이 식사할까요?”

    “와아… 이게 다 뭐예요?”

    “프라이드치킨과 바우르삭, 그리고 라그만과 플롭입니다.”

    튀김 종류인 치킨과 바우르삭 외에도 파나르 전통 면 요리인 라그만과 플롭까지 준비해 상차림을 완성했다.

    “아니 요리사님. 한식 요리사라고 하셨지 않나요?”

    “한식 요리사 맞습니다.”

    “저번에 한국 음식 말곤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으시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셨네요.”

    “아니요. 그건 사실입니다.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음식은 한국 음식뿐입니다.”

    내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나인티나인 멤버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포크만 오고 갔다.

    “와아 이 바우르삭 우리 엄마가 해 준 거랑 똑같은데.”

    “라그만은 내가 딱 좋아하는 맛이야.”

    “직접 만든 플롭은 진짜 오랜만이다.”

    멤버들은 내가 만든 파나르 음식들이 입에 맞는지 금세 접시를 비워 냈다.

    그나마 입맛에 맞았다던 한식인 프라이드치킨까지 전부 먹어 치웠다.

    “이야 오늘 연습은 몇 시간은 더 할 수 있겠다.”

    “배 터지겠다. 오랜만에 진짜 맛있는 음식 먹었네.”

    식사를 끝낸 멤버들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보였다.

    요리라고 해 봤자 빵이나 계란 몇 개 구워 먹는 게 전부였는데, 자기들의 연습실에서 이런 요리가 가능하다는 것도 신기해하는 표정이었다.

    “입맛에 좀 맞으셨어요?”

    “맞은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훌륭했습니다. 역시 대사관 요리사 정도 되는 사람들은 어떤 요리라도 다 잘하는 건가요?”

    저번에 말했던 내용들을 기억해서 오늘 음식을 만들었다. 한국 음식엔 고기가 적다는 말에 플롭에는 쌀알보다 말고기가 더 많이 보이도록 만들었고, 다채로운 맛이 부족하다는 말에 라그만엔 고수와 마늘을 듬뿍 넣어 만들었다.

    또 버터를 푸짐하게 넣어 반죽한 바우르삭은 고소한 기름에 튀겨 내어 준비했다.

    파나르 음식도 음식이지만 그때 했던 말을 기억해서 음식을 만들었다.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은 단연 미각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감각은 청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손님들이 음식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엿들을 수 있는 청각과 다양한 의견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청각은 요리사에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사실 플롭을 빼고 바우르삭과 라그만은 오늘 처음 만들어 봤습니다.”

    “네? 정말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인데요?”

    “며칠 동안 공부를 하고, 만드는 동영상을 거의 100개는 찾아본 것 같네요. 만드는 건 오늘 처음이구요.”

    “정말요? 왜 그렇게까지…?”

    파나르 음식을 만들기 위해 이틀 동안 내가 한 행동을 말해 주자 에이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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