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56화 (57/202)
  • 56. 제안

    -안녕하세요. 저는 대한민국 대사관 임윤아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나인티나인의 리더 에이스라고 합니다.

    신비주의로 활동하는 그들이었기에 냉소적이고, 폐쇄적일 줄 알았는데, 우려와 달리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나인티나인 리더의 목소리는 친절하고 따뜻했다.

    “저희를 섭외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K-문화의 날이라고 파나르 한인회와 한국 대사관이 주최하는 행사에 여러분들을 섭외하고 싶습니다.”

    행사 날짜, 행사의 목적 등 기본적인 내용을 전부 알려 준 뒤 출연료나 노래 곡 수 등 구체적인 사항을 조율하려 했다.

    “음… 일단 만나는 건 어떠실까요?”

    “네? 직접 만나자구요?”

    에이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윤아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골수팬까지는 아니어도 윤아 역시 나인티나인을 좋아했으니까.

    윤아 입장에서도 직접 만나서 설득하는 게 좀 더 가능성이 높을 거라 판단했다.

    * * *

    알려 준 연습실 주소로 찾아가자 허름한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들어가 보지 않아도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울 게 뻔한 오래된 건물이었다.

    똑똑똑.

    “안녕하세요 전화드렸던 임윤아라고 합니다.”

    문이 열리자 윤아가 앞장서서 파나르어로 인사를 건넸다. 건물은 허름했지만 그곳에서 연습 중이었던 나인티나인 멤버 5명에게선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역시 연예인은 연예인이구나.

    소속사도 없고, 스타일링도 본인들이 직접 한다지만 한눈에 봐도 연예인이었다.

    “와아.”

    윤아의 입에선 자기도 모르게 감탄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외모에 놀란 것도 잠시 더 큰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인티나인의 리더 에이스라고 합니다.”

    “에?”

    이전에 통화를 사람과 같은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리더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은 분명 한국어였다.

    “하… 한국어를 할 줄 아셨어요?”

    “네 조금 할 줄 압니다. 들어오세요. 건물이 조금 허름하죠?”

    “허… 름?”

    조금 할 줄 아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직 몇 마디 나눠 보지 않았지만 수준급의 한국어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저희 나인티나인 멤버들입니다.”

    “안녕하세요. 나인티나인입니다.”

    “어… 진짜 당황스럽네요. 반가워요.”

    리더인 에이스는 물론이고, 나머지 네 명의 멤버 역시 능숙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윤아는 한동안 멍한 상태로 그들을 쳐다봤다. 하나같이 다 잘생겨서 눈을 떼지 못한 것도 있지만 저 입에서 어떻게 한국어가 유창하게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럼 멤버들이 전부 한국어를 할 줄 아시는 거예요?”

    “네 제가 리더라 주로 나서서 말을 하긴 하지만 나머지 친구들도 전부 저 정도는 할 줄 알아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한국은 물론이고, 해외 공연 한 번 해 본 적 없던 이들이 한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이유는 있었다.

    “대충 아시겠지만 저희는 한국 아이돌 문화에 영향을 받은 그룹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음악 자체는 저희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지만 스타일링이나 안무, 팬덤 문화 등은 한국의 아이돌 문화를 배우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도 그래서 배우는 거구요.”

    그렇다 해도 한국어를 이 정도 수준으로 배운 이유가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지금도 한국어가 아닌 파나르어로 활동을 하면서 인기가 많아지고 있었는데.

    오히려 좀 더 현지화에 올인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앞섰다.

    “한국 대사관에서 저희를 섭외하고 싶다고 하길래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싶었어요.”

    “기회라면…?”

    “저희의 꿈에 아주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기회랄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리더 에이스는 멤버들과 눈빛을 주고받더니 사르르 녹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윤아는 그 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따라서 웃고 있었다.

    “사실 저희는 최초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아이돌 그룹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네?”

    “K-팝을 하는 전원 외국인 아이돌 그룹.”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가 이어졌다. 이들이 한국어를 이렇게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이유는 명확했다.

    “아이돌 문화가 전혀 없는 파나르에서 젊은 팬분들 덕분에 저희가 제법 자리를 잡긴 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희가 한 노력에 비해 훨씬 부족한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마땅한 소속사도 없이 작사 작곡, 안무, 스타일링, 섭외까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능숙한 한국어 실력까지 갖춘 걸 보면 한국의 아이돌들보다 훨씬 피나는 훈련을 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국만큼 아이돌 문화가 발전된 나라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노력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한국에서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군요 멋있습니다. 저도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일단 구체적인 내용을 협의해야겠지만 저희는 한국과의 작은 연결 고리라도 만들 수 있는 이 행사가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큰 이견이 없으면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윤아는 이들을 섭외하러 왔는데 잘생긴 외모에 치이고, 엄청나게 노력을 했다는 것에 또 한 번 팬심이 발동했다. 잠시였지만 보면 볼수록 나인티나인은 멋있고,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덕수만큼 재능 있고,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여기에도 5명이나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윤아는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본업으로 돌아왔다. 아직 구체적인 조건은 말하지도 않았는데 섭외는 거의 성사된 분위기였다.

    “그래서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금액은 이 정도고, 한국어로 된 커버곡 3곡, 혹시 가능하시다면 한국어로 팬들에게 인사 몇 마디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잠시만요. 저희한테 한국 아이돌들의 커버곡을 부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것도 안무까지 해 가면서?”

    대화 주제가 본업으로 돌아가자 그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다른 건 몰라도 음악만큼은 자기들이 원하는 음악을 하겠다는 게 그들의 철학이었다.

    재미로 커버곡을 부를 순 있어도 연습까지 해 가며 남의 노래로 공연은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려고 한국어를 연습한 게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팬들이 원한다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나요?”

    “저희 팬들은 이런 걸 원하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원하지 않은 걸 원하는 팬은 팬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윤아와 나인티나인의 사이의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이들.

    긍정적이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저희는 훗날 한국에서 활동을 하게 되더라도 저희가 직접 음악 만들고, 가사도 쓰고 할 겁니다. 다른 가수의 노래로 공연을 하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휴우… 일단 알겠습니다. 그러면 한인회 회장님과 한 번 더 상의한 뒤 와도 되겠습니까?”

    “네 저희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커버곡을 부르는 건 저희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습니다. 얘기 좀 잘 부탁드릴게요.”

    윤아는 일단 한 발 후퇴를 선택했다.

    나인티나인을 설득하는 것보다 김상율 회장을 설득하는 편이 나을 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윤아 씨.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네요. 그런 거면 나인티나인 말고도 훨씬 인기 있는 파나르 가수들을 섭외하는 편이 낫죠. 그들만의 행사도 아니고….”

    김상율 회장도 더 이상 고집부리는 게 미안했는지 본인이 직접 나서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냥 섭외는 저희가 직접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어려운 부탁을 했네요.”

    “아! 아닙니다. 제가 해 볼게요. 다시 설득해 보겠습니다.”

    “네? 괜찮으시겠어요?”

    포기하려는 찰나 윤아의 눈앞에 자신과 비슷한 나이인 덕수와 나인티나인 멤버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본인도 파나르어를 능숙하게 하긴 했지만 그것 말곤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지금은 이 정도지만 몇 년만 지나면 그들과 자신의 격차는 더 많이 벌어져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뭔가라도 결과를 내고 싶었다.

    “제가 어떻게든 섭외해 오겠습니다!”

    * * *

    “서기관님 한 번만 저랑 같이 가 주세요.”

    “미안해요 윤아 씨. 제가 오늘은 아들내미랑 밤낚시 하러 가기로 했거든요.”

    “아… 혼자는 좀 그렇던데. 그쪽은 다섯 명이라 괜히 기 싸움에서 밀리는 거 같고.”

    준우는 가족들이 파나르로 온 이후부터 초과 근무나 야근을 자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과도하게 넘치는 열정도 예전만 하지 않았다.

    어느새 확실한 워라밸을 추구하는 공무원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정 그러면 요리사님한테 부탁해 보는 건 어때요?”

    “요리사님이요?”

    “네 어차피 머릿수 채우려는 거면 요리사님이 가도 되잖아요.”

    “하… 그래야겠네요.”

    나인티나인과 두 번째 약속을 잡은 윤아는 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협상은 자기가 하겠으니 옆에서 서 있기만 해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그래서 퇴근하고 나랑 같이 좀 가 주면 안 돼?

    -내가 큰 도움이 될까?

    -그냥 옆에 앉아 있어 주기만 하면 돼. 말은 내가 다 할게. 근데 걔네들 다 한국어 할 줄 알아.

    -정말? 그러면 옆에서 맞장구라도 쳐 줄게. 어차피 마치고 할 것도 없으니까. 근데 뭐 때문에 섭외를 못 하고 있는 거야?

    윤아는 마치 하소연을 하듯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김상율 회장님의 고집이 너무 세다는 둥, 나인티나인 얼굴을 보니 말이 제대로 안 나온다는 둥.

    커버곡이라는 이유 때문에 섭외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까지 전부 다 털어놓았다.

    -만만치 않겠네. 그냥 한인회보고 직접 하라고 넘겨 버리지.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 일이잖아.

    -그… 그렇긴 한데.

    -뭐 일단 맡은 일이니깐 최선을 다하고 싶은 거겠지.

    -그렇지.

    -그럼 나중에 퇴근하고 보자!

    윤아는 일단 덕수를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나인티나인이 저번과 똑같은 태도로 일관한다면 설득시킬 자신은 없었다. 특별한 전략 또한 없었다. 그냥 이번엔 좀 더 차분하고 확실히 자신의 의견을 말해 볼 생각이었다.

    * * *

    나인티나인의 연습실.

    “안녕하세요 저희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행이 있으시네요.”

    “와 대박. 한국어 엄청 잘하시네요.”

    “과찬이십니다.”

    윤아는 두 번째라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덕수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한국어를 할 줄 안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과찬이십니다라니.

    평범한 말발론 설득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회장님하고 얘기를 나눠 봤는데, 나인티나인 여러분들의 노래를 전부 부르고 마지막에 2곡 정도만 한국어 커버곡을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면 1곡이라도….”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커버곡은 안 됩니다.”

    “여러분들한테 솔직히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저희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저희도 한국과 관련된 행사라 꼭 하고 싶습니다만….”

    에이스는 진심으로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

    윤아 역시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덕수를 쳐다봤다. 김상율 회장에서 반드시 섭외해 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분위기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꼭 그게 아니라도 덕수 앞에서 본인도 해낼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커버곡을 단 1곡이라도 불러야 하는 조건이라면 아쉽지만 저희는 이 섭외를 거절하겠습니다.”

    “제발요. 팬들도 여러분들이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르는 걸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저 역시 그렇구요.”

    “이런 식의 대화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돌아가 주세요.”

    리더 에이스의 말에 전부 동의한다는 듯 뒤에 있는 멤버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윤아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옆에서 잠자코 지켜만 보던 덕수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대로면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한 번의 기회라도 더 얻어 보려면 일단 과열된 분위기를 조금 가라앉히는 게 중요해 보였다.

    “저는 한국 대사관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장덕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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