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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55화 (56/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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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부탁은 이번처럼 운영 위원들을 위한 도시락을 준비해 달라는 것.

    투표 때보다 기간은 짧았지만 인원도 많고, 점심과 저녁 두 끼를 요구했기 때문에 준비해야 할 도시락 수는 훨씬 많았다.

    “이번엔 개수가 많으니깐 반찬은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번엔 도시락값을 제대로 지불하고 구매를 하겠습니다.”

    “구매요?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10~20개도 아니고, 그리고 대사관 자체 행사도 아닌데 어떻게 전부 지원을 받습니까? 저희도 한참 동안 행사를 못 치러서 모아 둔 예산이 제법 됩니다. 구매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사관의 예산으로 단체나 기업체 등을 지원한 적은 있었지만 반대로 대사관 측에서 돈을 받고 뭔가를 팔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예산에 대해서 항상 철저했던 김용수 대사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뭐 이상한 데 돈 쓰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재룟값 받고 정당하게 파는 거니깐 문제없을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감사합니다. 장덕수 셰프의 도시락이 있으면 회원들을 달래는 게 조금 수월하거든요. 이런 데 돈 쓰는 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직원의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또 협조가 필요하다는 게 어떤 건가요?”

    이번에 주최하려고 하는 K-문화의 날 행사는 한인회에서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행사였다.

    난생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것들이 많아 대사관의 폭넓은 인프라나 인맥들이 절실히 필요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번엔 내전 때문에 쓰지 못한 예산이 제법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행사에 많은 돈을 투자하려고 합니다.”

    “음… 그렇게 하시려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당연히 교민들 때문이죠. 제가 투자한 한식당을 빼고도, 이제 다른 식당이나 한국식 카페, 옷가게 등을 준비하고 있는 교민들이 제법 많이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반가운 소리네요.”

    급격하게 따뜻해지는 파나르의 분위기 속에서 한국 교민들 역시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문의는 전부 김상율 회장의 귀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들을 한꺼번에 도울 수 있는 건 부지런한 활동으로 한국을 최대한 알리는 것.

    이번 행사를 크게 기획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예산이 넉넉하다곤 하지만 그걸 제대로 쓸 수 있는 인프라나 정보가 많이 부족합니다.”

    “이제 본론을 말해 보세요 회장님. 뭐든 힘닿는 데까지 협조하겠습니다.”

    뭐 얼마나 큰 부탁을 하려고 그러나 싶어 김용수 대사와 지켜보던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국에서 아이돌 그룹 한 팀만 섭외해 주세요.”

    “아이돌이요?”

    “네 제가 아이돌에 대해선 영 무지해서 정확하게 어떤 그룹이라곤 말 못 하겠지만 이름을 들으면 다 알 만한 그룹으로요.”

    대사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교민들의 집합체인 한인회에서 협조 요청이 들어왔으니 적어도 연결 고리 정도는 만들어 줘야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파나르 한인회는 이번 행사를 통해 큰 반전을 이룰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복잡한 건 모르겠고, 나는 아까 말한 도시락이나 제대로 준비하면 되겠지. 그것만 신경 써도 할 게 천지였으니.

    “저희 대사관의 인프라가 거기까지 닿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꼭 좀 부탁합니다. 이번 행사의 흥행 여부는 애석하게도 어떤 그룹이 섭외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겁니다.”

    참으로 단순하고도 어려운 미션을 남기고 떠나는 김상율 회장이었다.

    알차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계획해서 행사를 흥행시키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파나르의 젊은 사람들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데이터도 전혀 없었고, 단기간 치러지는 행사에 강력한 관심사가 없으면 일단 사람들이 방문 자체를 하지 않을 거다.

    아이돌이든 뭐든 강한 임팩트가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김상율 회장은 진부하더라도 아이돌을 선택했다. 이렇게 예산이 여유 있을 시기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 * *

    “임윤아 행정원. 아이돌 섭외는 좀 알아보셨어요?”

    “네 서기관님 몇 군데 전화해 봤는데 대부분 돈도 돈이지만 여기까지 올 스케줄이 안 된다는데요.”

    “하아… 당연히 그렇겠죠. 파나르까지 오려면 적어도 2박 3일은 잡아야 하니까요.”

    황금 같은 주말에 굳이 파나르까지 오지 않아도 잡힌 스케줄이 넘치는 아이돌들이었다. 소속사들은 스케줄이 적은 신입 그룹들을 제안했지만 김상율 회장의 생각은 확고했다.

    어중간하게 쓰는 것보다 확실하게 쓰는 것이 낫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좀 더 힘써 달라는 대답뿐.

    업무를 담당한 윤아와 김준우 서기관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전화를 들었다.

    “우리 미친 척하고 PTS 뚫어 볼까요?”

    “그럴까요? 명색에 대사관에서 섭외하는 건데 그 정도는 해야 급이 맞는 거 아닙니까.”

    두 사람은 점점 미쳐 가고 있었다.

    * * *

    파나르의 샤슬릭 식당.

    “그래서 아직 아무도 섭외 못 한 거야?”

    “우리가 방송국 사람들도 아니고, 어떻게 아이돌까지 척척 섭외하냐… 그것도 인지도가 꽤 있는 그룹만 원하시는데….”

    오랜만에 성사된 맛집 탐방 모임이었는데 윤아의 표정이 썩 밝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렇게 힘이 없었던 적이 있었나?

    며칠 동안 제대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나 보다.

    “에라 모르겠다. 맛있는 거나 먹고 일단 오늘은 잊자.”

    “그래 퇴근하고까지 무슨 일 생각이냐? 샤슬릭이나 먹자.”

    윤아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겠지만 나 역시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라 위로 말곤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냥 맛있는 거나 먹고 잊으라는 말만 해 줄 뿐이었다.

    “One two three~~”

    방금까지 침울해 있던 윤아였지만 입에 먹을 게 들어가자 금세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파나르어로 된 가사라 알아듣지 못했지만 멜로디는 낯이 익었다. 마트나 백화점, 요즘 어디를 가도 들려오는 노래였다.

    “윤아야 지금 흥얼거리는 노래 누구 노래야?”

    “응? 내가 흥얼거렸어?”

    “사실 거의 열창 수준이었지.”

    “아… 미안. 이거 나인티나인 노래인데 너도 들어 본 적 있지 않아? 요즘 어딜 가나 나오던데.”

    “나인티나인? 나도 들어 본 적은 있어. 근데 가사는 못 알아들어서.”

    식당 안에서 그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사람은 윤아뿐만이 아니었다. 윤아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은 전부 손이나 발을 구르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근데 얘네들 인기 많아? 다 따라 부르네.”

    “나인티나인? 장난 아니지. 적어도 파나르 안에서는 PTS랑 맞먹을걸?”

    “아 그 정도야?”

    “응 사실 파나르 전체로는 아니고, 젊은 사람들만 좋아해. 왜냐면 파나르에서 얘네가 최초면서 유일한 아이돌이거든.”

    그러면서 윤아는 영상 몇 개를 보여 줬다. 옷이며 스타일링이며 전부 한국 아이돌과 비슷했지만 내뱉는 노래는 파나르어였다.

    아이돌 문화가 없는 파나르의 아이돌 그룹이라 해서 조금 촌스러울 거라 생각했는데, 영상 속 나인티나인의 모습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수준 높은 무대들이었다.

    “우와 음악도 엄청 트렌디하고, 솔직히 스타일링이 한국 아이돌이라고 해도 믿겠다.”

    “맞아. 그래서 파나르에선 요즘 제일 인기가 많아. 한국 문화 좋아하는 애들이 많거든.”

    “뭐지? 한국에서 연습생 한 애들인가? 아우라가 다른데.”

    “저번에 인터뷰 보니깐 한국 아이돌 문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

    음소거를 하고 보면 한국에서 새로 데뷔한 아이돌 그룹이라도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럼 얘네들도 몸값 장난 아니겠네?”

    “아닐걸?”

    “왜? 인기도 많고, 실력도 엄청 수준급인 거 같은데.”

    “사실 파나르에서 아이돌 문화는 주류 문화가 아니거든. 젊은 사람들이 좋아해서 인기는 많지만 가수로서 그리 인정받는 분위기는 아니야.”

    “그럼 K-문화의 날엔 얘네들 섭외하면 안 돼? 어차피 거기 오는 애들 나이 많아 봐야 우리보다 어린 애들일 거잖아.”

    한국에서도 탑급 아이돌을 섭외하려는 이유가 흥행 성공을 위해서 아닌가?

    그러면 굳이 무리해서 한국어를 쓰는 한국 아이돌을 쓸 필요가 없지. 바로 같은 나라에 팬들과 소통이 가능한 훌륭한 가수가 있는데.

    “그러고 보니 그러네. 오히려 어중간한 한국 아이돌보다 나인티나인 온다고 하면 파나르 젊은 애들은 전부 다 몰려올걸?”

    “그럼 됐네. 왜 힘들게 한국에서 찾고 있었어?”

    “회장님이 꼭 그렇게 부탁하셔서.”

    “회장님을 먼저 설득해 봐 봐. 어차피 한국 아이돌에서 대해서 잘 모르신다며. 잘 설명하면 이해하실 거 같은데?”

    * * *

    “회장님 며칠 동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그룹보다 나은 애들을 섭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요? 파나르도 아이돌 그룹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어차피 행사 흥행을 위해서 아이돌 그룹을 부르시려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그러면 저 한번 믿어 보세요. 적어도 파나르 안에선 이 그룹이 확실한 흥행 카드입니다.”

    윤아는 혼신의 힘을 다해 김상율 회장을 설득하고 있었다. 사실 윤아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이유는 덕수 때문이었다.

    자신은 5년 넘게 파나르에 살면서 이렇다 할 인맥이나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동갑내기 덕수는 몇 달 만에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도시락 하나로도 투표장의 분위기를 바꿔 버린 덕수를 보며 이번 일을 반드시 성사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저는 이번 행사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설령 예산을 뛰어 초과하라도 확실한 흥행 카드만 섭외할 수 있다면 내년 예산까지 끌어와 쓸 생각도 있습니다.”

    “그러니깐 그 확실한 흥행 카드가 이 나인티나인입니다. 파나르에서 하는 행사에 이보다 더 좋은 카드는 없습니다 회장님.”

    몇 분간의 설득이 이어지자 확고했던 김상율 회장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한국 아이돌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지만 김상율 회장도 나인티나인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다만 맘에 걸리는 게 한 가지가 있었다.

    “제가 굳이 한국 아이돌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K-문화의 날이기 때문에 가수와 팬들이 함께 한국어로 노래를 하고, 미숙해도 팬들과 한국어로 대화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습니다.”

    외국인 가수들이 내한 공연을 와서 팬들과 함께 떼창을 하고 어색한 영어로 대화를 하는 그런 훈훈한 장면을 원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파나르인에게 한국어로 팬들과의 대화까지 요구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고, 한국어로 된 노래 몇 개는 불러 줄 수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윤아도 이젠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섭외에 실패했단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어려운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한국어로 된 노래 몇 곡만이라도 불러 줄 수 있으면 나인티나인으로 선택하겠습니다.”

    “일단 만나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결국 김상율 회장을 설득한 윤아는 나인티나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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