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54화 (55/202)

54. 도시락

이전에도 파나르 한식당들은 도시락 주문을 종종 거절했다.

일은 번거롭고, 돈은 안 되는 도시락을 굳이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냥 교민들끼리의 의리?

하지만 나는 거절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대사관에서 음식과 관련된 일은 전부 요리사가 해야 할 일이었고, 오, 만찬 행사나 일상식이 없으면 딱히 할 일도 없었다.

* * *

며칠 전 회의.

김용수 대사와 김상율 한인회 회장의 대화는 투표장 운영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점점 산으로 가고 있었다.

“저희 한인회에도 식사 예산이 따로 있으니깐 다른 한식당에 도시락을 주문해도 됩니다만 장덕수 셰프가 나서 주신다면 저희는 그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에이 굳이 뭐 하러 돈 낭비 하십니까? 있는 예산 잘 아껴서 내년에 또 더 많은 행사 치러야죠.”

“꼭 돈 때문은 아니고, 그냥 한식당에서 주문하는 도시락은 영 재미가 없어서요….”

“재미가 없다고요?”

“네 투표 기간 5일 내내 유일하게 엉덩이를 떼는 시간이 식사 시간일 텐데, 밥이라도 제대로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식당 도시락들이 별로인가요?”

맛이 없거나 퀄리티가 떨어질 리는 없다.

특히 상섭과 민경의 실력은 내가 봐도 수준급이었으니까. 도시락이 돈이 안 된다고 하나 그들의 성격상 대충 해 주진 않았을 거다.

“맛이 문제가 아니라… 반찬들이 너무 똑같아서요.”

“아….”

“불고기 아니면 제육볶음, 그것도 아니면 닭갈비나 잡채, 국은 된장국이나 콩나물국 이 정도가 전부예요. 뻔하다고 해야 하나?”

그 두 분이라면 메뉴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진 않았을 거다. 솔직히 모험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게 도시락이라면 더더욱 그랬을 거고.

맛은 충분히 있었겠지만 오늘 점심 메뉴는 뭐가 나올까라는 소소한 기대는 하지 못했을 거다.

“근데 우리 장 셰프님이 해 주신다니 도시락은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하하하 투표율이 얼마나 높을지, 교민들의 투표소 평가가 어떨지 이런 건 안 궁금하시구요?”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좀 철딱서니 없는 말을 했죠? 농담이니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들은 내용을 신경 안 쓸 수는 없다. 예전 한인회 만찬은 콩나물을 직접 키우고, 아귀 대신 동태를 직접 말릴 정도로 머리를 쓰고, 신경을 쓴 메뉴들이었으니까.

비록 도시락이지만 나에 대한 기대치가 꽤 높아져 있을 것이다.

뭐 하나 편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구만….

예전에 호텔에서 도시락을 만들었던 때를 떠올려 봤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만들어 봤지만 메뉴는 항상 거기서 거기였다.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란 걸 알 만한 사람은 알 거다.

* * *

몇 년 전 호텔 주방 회의.

“이번에 기업체 워크샵 겸 체육 대회에서 쓸 도시락 주문이 들어왔는데 메뉴를 좀 색다르게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

“색다르게면 어떻게요?”

“글쎄다. 그걸 고민해 보려고 모인 거지.”

“근데 이번엔 몇 개나 주문했습니까?”

“올해는 1,500개.”

남들이 보기엔 헉하는 숫자지만 올해는 오히려 500개나 줄어든 숫자였다. 매년 2,000개 이상, 몇 년 전에는 3,000개까지도 주문을 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특급 호텔이라도 그 정도의 숫자는 뚝딱 해치울 양이 아니었다.

설령 공장이라고 해도 하루를 꼬박 가동해야지만 감당이 될 숫자.

“도시락이 1,500개요? 150개가 아니라요?”

“막내야. 올해는 많이 줄어든 거다.”

1,500개라는 숫자에 놀라는 것은 몇 달 전 들어온 막내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직원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데 어떻게 1,500개의 도시락을 만들어 낼지 막막한 표정이었다.

“근데 저희끼리 도시락 1,500개가 가능한가요? 제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것 같은데….”

“네 머리로는 힘들 수 있지. 근데 1,500개쯤은 충분히 가능하니깐 걱정 마라. 선배들이 보여 줄게.”

사실 도시락이 500개 정도만 넘어가도 들어가는 메뉴나 반찬은 단조로워진다. 반찬 개수는 줄어들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칸은 대량으로 조리 가능한 메뉴들로 채워진다.

제육볶음, 불고기, 잡채, 닭갈비 등등.

국물 요리 역시 된장국이나 미역국, 콩나물국 등 끓이기 쉽고, 대중적인 메뉴들로 채워진다.

그래야지 주문한 양을 제 시간 안에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

이 정도 양의 도시락 주문이 들어왔을 때 최대한 깔끔하고, 제 시간에 만들어 내는 것에 포커스를 둔다.

특이하거나 색다른 도시락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근데 색다르게 해 달라는 요구 사항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주방장님.”

“에휴 그러게 말이다. 말이야 쉽지 손이 조금이라도 더 가는 메뉴를 고르면 제 시간에 완성하지도 못하는데.”

“주문하는 사람들도 한 번씩 와서 견학이라도 하고 가야 색다른 메뉴 이런 소리 안 하지요.”

“10~20개만 주문해 봐라. 도시락 용기에 수라상을 차려 줄 수도 있지. 우리가 그럴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단체로 주문받는 도시락을 만들 때는 항상 이런 고충이 따라왔다.

약초를 넣은 한방 불고기나 콩나물 잡채 등으로 조금 차별화를 둬 봤지만 크게 만족스러워 하진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큰 불만도 없었는지 그 후로도 10년이나 더 기업체의 주문은 이어졌다.

왜냐면 다른 업체에 주문해도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엔 대사관 직원들을 포함해서 10명 남짓한 숫자였다. 최고로 많은 날이라고 해 봤자 12명.

이 정도면 혼자서도 수라상을 차려 줘도 될 인원이지.

한번 만족한 사람을 또다시 만족시키는 게 더 어렵지만 제대로 보여 줘야겠다.

도시락 용기에 담겨 있기엔 낯선 음식으로 채워 볼 생각이었다.

* * *

대사관 민원실.

“형님 오늘 점심은 메뉴는 뭡니까?”

“비밀. 대신 기대해도 좋다.”

“에이 뭔데요? 귀띔이라도 해 줘요.”

“사실 말해도 모를걸?”

“엥? 도시락이 거기서 거기지.”

“어선이라고 들어 봤어? 나도 처음 보는 음식이었어.”

첫날 덕수의 도시락이 제공되고 난 후 다음 날부터 사람들은 점심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사실 처음엔 장덕수 셰프의 도시락이라고 기대를 했었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니 정신없이 바빠서 밥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냥 교대 시간이 되면 후딱 가서 먹는 수준.

하지만 후다닥 먹기엔 뭔가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만 할 것 같은 도시락들이 제공되었다.

“고작 이 플라스틱 통에 이런 귀한 음식들이 올라와도 되는 거야?”

“형님 저 이런 음식 처음 봐요. 생선으로 김밥을 만들어 놨네요.”

“이게 어선이라는 거야. 궁중 음식 중 하나였다더라.”

“이야… 어쩐지 생긴 거부터 고급지네요.”

생선살을 얇게 포를 떠서, 안에 당근, 호박, 계란 지단 등을 넣어 말아 쪄 낸 어선이라는 요리는 고난도에 아주 손이 많이 가는 요리였다. 그래서 궁중 요리 중에서도 고급 음식으로 통했다.

만찬에나 나올 법한 메뉴들이 도시락에 담겨 있으니 사람들을 어리둥절하면서도 식사 시간만을 기다렸다.

“오늘은 족발이라며?”

“대사관 요리사가 직접 삶았다더라. 냄새 끝장난다.”

“예전에 족발 먹고 싶어서 한국까지 간 적도 있는데 제대로 된 족발을 드디어 여기서 먹네요.”

식당에서도 삶기에 번거로운 족발까지 도시락 메뉴로 나오니, 몇 명은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이제 대사관 직원들은 물론이고, 운영 위원으로 지원한 한인회 사람들은 고된 업무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밝아 보였다.

적어도 오전 동안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업무에 집중했다.

“자 드디어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만 고생해 주세요!”

김용수 대사는 지쳐 있을 직원들과 운영 위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며 재외 국민 투표의 마지막 날을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직원들과 운영 위원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형님. 오늘은 내가 먼저 점심 먹고 오면 안 됩니까?”

“안 돼. 오늘은 이 형님한테 양보 좀 해라.”

“기왕 양보한 거 오늘까지 양보 좀 하세요 형님.”

“오늘은 무슨 메뉴길래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냐?”

“간장게장이요. 파나르에서 간장게장이 말이나 됩니까? 저는 투표소가 아니라 팝업 레스토랑 그런 건 줄 알았네요.”

관저와 사무실이 그리 멀지 않으니, 도시락 개념보단 새참 같은 느낌이었다. 용기가 작으면 그릇에 담아 보내기도 하고, 냄비째 끓여 먹으라고 보낸 적도 있었다.

“여튼 오늘은 내가 먼저 간다. 하루쯤은 나한테 양보해라.”

“아 형님!”

식사 시간 교대까지 요구하는 사람들을 보며 김상율 한인회 회장은 이 상황이 오히려 고마웠다.

사실 투표 운영 위원이라는 게 일종의 자원봉사나 다름없었다. 식사나 자잘한 지원은 되지만 따로 급여가 나오거나 특별한 혜택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 일을 5일 동안 군말 없이 협조해 주는 한인회 회원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힘든 와중에 점심 식사라도 기대하게 해 준 장덕수 셰프에게도 고마웠고.

그 소소한 기대 때문에 이번엔 큰 불만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항상 재외 국민 투표의 운영 위원들을 달래느라 고생했었는데 장덕수 셰프의 도시락 덕분에 올해는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사님, 일동 직원 여러분.”

“아닙니다. 한인회분들의 협조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무사히 끝낼 수가 없었을 겁니다.”

김용수 대사와 김상율 한인회 회장은 두 손을 꼭 잡고 서로 감사함을 전하고 있었다. 두 조직 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는데, 아무 탈 없이 넘어간 이 상황이 고마웠다.

“파나르가 거의 정상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예전에 비해 교민 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투표하는 인원들도 당연히 줄었고요. 그래서 좀 더 수월했던 것도 있고, 사실 매일매일 점심이 너무 기대돼서 힘이 났던 것도 있습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대사관에서 그나마 드릴 수 있는 거라곤 식사뿐이었는데 맘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식사뿐이라니요. 도시락으로 이런 대접 받아 본 적은 처음입니다. 정말 대단했어요.”

“사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이제 장덕수 셰프의 칭찬이 전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본인도 항상 믿고 의지하고 있었으니까.

이번 도시락들은 장덕수 셰프가 정말 맘먹고 했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저 그래서 말 나온 김에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네 말씀해 보세요.”

이번 투표 땐 대사관이 한인회의 협조를 받았다. 김상율 회장은 다음 달에 있을 한인회 행사에 대사관 협조를 요청할 예정이었다.

“다음 달에 저희 한인회 주관으로 K-문화의 날이라는 행사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아하 저번에 관저에 말씀하신 그 행사 말이죠?”

“네 맞습니다. 파나르 젊은이들도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관심이 굉장합니다. 그래서 공연도 하고, 한국 음식들도 맛보게 하고, 전통 놀이 같은 것도 체험할 수 있게 행사를 진행하려 합니다.”

“이야 기획이 좋네요. 시기도 딱 적절하구요.”

“그래서 말인데 대사관 측에서 협조가 조금 필요합니다.”

“얼마든지요. 필요한 게 뭔가요? 한국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코너도 있으면 또 장 셰프의 도움이 필요한 건가요?”

장덕수 셰프의 칭찬에 이어 나온 말이기에 김용수 대사는 또다시 장덕수 셰프의 능력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김상율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아닙니다. 한국 음식을 맛보는 코너는 저희 한식당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만들어야 하는 양도 많고, 떡볶이나 닭강정 같은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간단한 음식 몇 가지만 할 거라 장덕수 셰프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어떤 걸 도와 드리면 될까요.”

“그때 일하는 직원들 도시락을 한 번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행사 음식 만들면서 직원들 식사까지 준비하는 건 힘들 것 같아서요.”

“결국엔 장덕수 셰프네요?”

멋쩍은 웃음을 짓는 김상율 회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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