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53화 (54/202)

53. 자신의 역할

“아이고 이쁘다. 너 이름이 뭐니?”

주인아줌마의 두 손에 꼭 잡혀 있는 녀석은 이제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지난 강아지였다.

말로만 듣던 시골의 잡… 종 강아지.

“이래 봬도 어미 개가 굉장히 똑똑한 개라서 밥값은 할 겁니다.”

“아… 저는….”

내가 강아지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키울 상황이 아니었다. 살고 있는 집이 원룸이라 장소가 협소한 것은 물론이고, 우리 아파트는 애완동물 금지라 강아지를 데리고 갈 상황이 안 된다.

이 녀석이 굉장히 귀엽지만 내가 끝까지 책임질 수 없었다. 게다가 난 3년이 지나면 이곳을 떠날 거고….

“감사하지만 이 아이는 이곳에서 잘 키워 주세요. 마당도 넓고 친구들도 많으니 여기가 더 살기 좋을 겁니다.”

내가 정중히 거절을 하자 주인아주머니는 아쉬운 듯 강아지를 내려놓았다. 자기보다 훨씬 큰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그런지 강아지는 땅바닥에 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저런 표정을 지으면 괜히 내가 버려 두고 가는 것 같잖아….

“그러면 이제 출발할까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출발하려는 찰나 김용수 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요. 장 셰프가 힘들면 이 강아지 제가 데리고 가도 될까요?”

“네?”

아까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쭉 지켜보고만 있던 김용수 대사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계속 도와 달란 눈빛을 보냈지만 아무 말이 없어서 거절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가 데리고 가겠다니.

“관저가 혼자 살기엔 규모가 너무 커서 적적하거든요. 요 녀석이라도 같이 지내면 조금 덜 심심할까 해서요. 괜찮죠, 장 셰프?”

“저요? 저는 당연히 괜찮습니다.”

“내가 장 셰프의 선물을 빼앗는 게 아닌가 해서요.”

“그럴 리가요. 관저에서 키울 거면 어차피 저랑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텐데요.”

누군가에게는 크고 호화로운 관저에서 사는 게 마냥 부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두운 저녁이 되어 혼자 그곳에 남게 되면 외롭기도 하고, 누군가 들어올까 봐 무섭기까지 하다.

김용수 대사 역시 그런 감정을 거의 매일 느끼고 있을 거다.

“요놈 우리 관저에서 잘 먹이고, 몸집 좀 커지면 도둑도 잡고, 관저도 지켜 주고 하지 않을까요?”

“이 조그만 놈이 할 수 있을까요?”

지금 모습으로 봐선 집을 지켜 주기는커녕 하루 종일 돌봐 줘야 할 것 같은데.

옆에서 주인아주머니는 3개월만 지나면 든든한 모습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관저를 지키는 것까지는 안 바라도 귀찮게나 하지 마라.

“그럼 너도 차에 타 어서.”

처음엔 낯을 좀 가리는 것 같았지만 차에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 안을 열심히 돌아다니는 녀석이었다. 몇 시간 만에 적응이 완료된 듯했다.

덕분에 6시간이 걸리는 차 안이 지루하지 않을 수 있었다.

* * *

월요일 아침 사무실.

“휴우 이제 본격적으로 편집을 해 볼까요?”

“영상 편집해 보신 적 있으세요, 서기관님?”

“저요? 당연히… 처음이죠.”

연습 삼아 촬영을 해 봤으니, 이제 연습 삼아 편집을 해 볼 차례였다. 김준우 서기관은 길게 한숨을 쉰 뒤 워크샵 때 찍은 영상을 재생했다.

“아이고 무슨 영상 길이가 4시간 넘네… 이거 언제 다 보냐.”

아무런 계획 없이 막무가내 찍었으니 영상의 길이는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대부분은 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보여 주거나 하늘, 산 등을 비추는 영상이 전부였다.

편집은 고사하고 전부 다 잘라 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장면들이었다.

“그래그래 여기부터가 그나마 쓸 만한 영상이네.”

아무런 내용 없는 영상의 앞부분을 잘라 내고 나니 숙소에 도착했을 때의 장면이 나타났다.

그것도 짐을 풀자마자 거의 켜 두기만 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오….”

“서기관님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근무 시간에 일 안 하시고 재밌는 거 본다고 대사님한테 일러도 돼요?”

윤아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김준우 서기관은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새 영상에 깊이 빠져들어 가 있었다.

“어! 윤아 씨 언제 왔어요?”

“언제라니요. 한 5분은 지난 거 같구만. 뭘 그렇게 보나 했더니 아직도 워크샵 영상 보세요?”

“네 생각보다 길이가 길어서요.”

“근데 쓸 만한 내용이 있어요?”

김준우 서기관은 아무런 말 없이 윤아에게 옆자리를 내어 줬다. 그리고 모니터를 가리키며 함께 영상을 시청했다.

10분 후.

“우리 요리사님 말 되게 잘한다 그쵸?”

“그러니깐요. 저도 통역이긴 하지만 되게 전달 잘하는 거 같지 않아요?”

“잘 모르겠는데요?”

“쳇.”

어느새 두 사람은 덕수와 민박집 주인아주머니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웃기거나 재밌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영상에선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거 이상하게 재밌네요. 그쵸?”

“네 맞아요. 뭔가 새벽에 볼 거 없어서 틀어 놓은 다큐멘터리가 의외로 재밌어서 끝까지 보게 되는 그런 느낌이에요.”

“오 적절하네요. 두 사람이 대화하는 내용 수준도 다큐멘터리죠 이 정도면.”

요리에 대한 철학을 주고받았으니 예능보단 다큐멘터리에 좀 더 가까웠다.

아는 얼굴은 덕수와 윤아가 나와서가 아니라 워크샵 때의 영상엔 생각보다 알찬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본부에서도 같은 의견이었다.

* * *

외교부 본부.

“장관님 파나르 대사관에서 보내온 영상 보셨나요?”

“마침 지금 보고 있었습니다.”

김준우 서기관이 어설픈 솜씨로 편집한 영상은 장관에게까지 전해졌다. 장관 역시 웃음소리 하나 안 들리는 이 심심한 영상에서 몇 분째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이었다.

“근데 저 요리사 20대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니면 무척 동안인 건가요?”

“20대가 맞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저런 말들이 20대의 입에서 나올 만한 내용인가요? 난 아무리 봐도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베테랑의 입에서나 나올 말 같은데.”

“장관님도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본인 직업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도 느껴지고, 철학도 느껴지지 않습니까?”

의아해하던 두 사람은 또다시 몇 분 동안 영상에 빠져들었다.

덕수와 주인아주머니의 대화가 담긴 영상의 편집 기술은 어설펐고,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한 장의 공문과 함께 날것 그대로 전 세계의 재외 공관으로 전해졌다.

내용인즉, 재외 공관 요리사를 채용할 때는 나이와 경력에 상관없이 좀 더 폭넓은 채용 시스템을 이용하라고.

글로 적힌 스펙보다 진짜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지시까지 내려왔다.

덕분에 가족들의 직업까지 적어야 했던 재외 공관 요리사의 오래된 이력서는 이제 이름을 제외하곤 아무런 신상도 기입할 수 없는 블라인드 시스템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신 본부에선 필요하다면 요리 테스트까지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다.

“이제 바뀐 시스템을 언론에다가도 실컷 알리고, 많은 젊은 요리사들이 지원할 수 있도록 홍보를 시작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덕수로 인해 한 명이라도 더 젊은 요리사가 채용될 수 있다면 그건 의미 있는 변화였다. 덕수만큼 산전수전 다 겪은 젊은 요리사는 많지 않겠지만 충분히 배워 가며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면 젊은 요리사들의 습득력은 중견 요리사들보다 훨씬 훌륭할 거라 믿었다.

* * *

이른 아침 관저.

“주말 잘 보내셨습니까 대사님?”

“어서 와요. 주말엔 이놈 산책 시켜 주느라 진땀을 뺐네요.”

“왜요? 집에 안 가려고 하던가요?”

“아니요. 그 반대예요. 나가자마자 겁먹어서 꼼짝을 안 하더라구요.”

“정말요?”

“그래서 내가 안고 산에 올라갔다 왔어요. 나만 괜히 더 힘들었네요.”

“아이고. 요놈 밥값이나 하려나 모르겠네요. 수상한 사람이 오면 지가 제일 먼저 도망가겠네요.”

“그럴 수도 있어요.”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낯선 사람을 무서워했다. 관저를 지키기 위해 데리고 왔는데…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역시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름은 지으셨어요?”

“이름이요? 하나 짓긴 했는데….”

“뭐예요? 평일에 대사님 출근하면 이제 제가 돌봐야 하잖아요. 이름이라도 부르면서 친해져야죠.”

“이름은 지나예요.”

“지나요? 이쁘네요. 무슨 의미예요?”

“우리 와이프 별명이요.”

“아….”

김용수 대사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나는 서둘러 주제를 돌렸다. 내가 괜히 불편해질까 봐.

“이번 주에 관저에 초대 손님 오신다고 하셨죠?”

“아 맞아요. 만찬은 아니고, 그냥 회의만 하고 갈 거라 장 셰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래요? 차 같은 것도 필요 없을까요?”

“그러면 그냥 커피나 차 한잔 정도만 준비해 주면 돼요.”

대한민국은 곧 총선을 앞두고 있었다. 해외에 있는 교민들도 국적을 바꾼 게 아닌 이상 투표를 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곧 있을 재외 국민 투표를 위해 파나르 한인회와 대사관이 다시 한번 뭉치게 되었다.

* * *

며칠 후.

김용수 대사는 한인회 사람들이 오기 전 마당에서 지나와 잠시 놀아 주고 있었다. 요즘엔 지나와 노는 시간이 가장 재밌다며 자투리 시간이 생길 때마다 마당으로 나갔다.

드르르르륵.

“지나야! 손님들 왔나 보다. 빨리 숨어라.”

약속된 시간이 되자 커다란 현관문이 열렸다.

김용수 대사는 겁이 많은 지나가 놀랄까 봐 목줄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숨겼다.

현관문이 닫히고 한인회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자 김용수 대사 뒤에 숨어 있던 지나가 갑자기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왈왈! 왈왈!

아직 울음소리도 앳되고, 몸집이나 다리도 짧아서 전혀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지나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오 이놈 갑자기 왜 이래?”

“안녕하십니까 대사님. 갑자기 무슨 강아지입니까?”

“어디서 한 마리 얻었습니다. 쫄보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밥값 제대로 하는데요?”

“쫄보요? 벌써부터 이러는 거 보면 몇 달 지나서 몸집 좀 커지면 든든하겠는데요?”

“그래 보입니까? 다행이네요 하하하.”

한인회 임원진이 한 명씩 도착할 때마다 겁 많던 지나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어미가 똑똑하단 말은 다행히도 사실이었던 것 같다. 재롱이나 피울 줄 아는가 싶었더니 관저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그러면 회의를 시작해 볼까요?”

“네 시작하시죠.”

“아시다시피 다음 달에 재외 국민 투표가 있습니다. 5일 동안 투표소를 운영해야 하는데 한인회분들의 인력 지원이 필요합니다.”

5일 동안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영하는 투표소는 대사관 직원만으로는 부족했다. 교대도 해 줘야 하고, 식사 시간도 필요했으니 좀 더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네 필요하신 인원수를 알려 주시면 회원들에게 공지하겠습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다음 주까지 말씀해 주시면 운영 위원으로 등록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투표소에 있는 직원들의 식사는 저희 대사관에서 준비할 테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정말입니까? 그러면 저희 또 장덕수 셰프의 음식을 먹게 되는 겁니까?”

“하하하 그런 셈이죠.”

그때 만찬 이후로도 몇 번이나 관저에 오고 싶다고 말을 했지만 공식적인 초대는 없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만찬을 주최하는 건 예산 낭비였으니까.

김용수 대사는 누구보다 철저하게 예산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장 셰프. 5일 동안 운영 위원들의 도시락을 준비해 줄 수 있나요? 나도 그 기간 동안은 사무실에서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물론이죠.”

한인회 임원진들의 짧은 박수 소리와 함께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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