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51화 (52/202)

51. 요리 연구가

“즐거운 워크샵을 영상에 담아야 하는데….”

“서기관님 카메라 내려놓고 편하게 즐기세요. 대사님이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카메라가 문제가 아닌데 이건….”

김준우 서기관의 말대로 즐거운 워크샵을 영상에 담는 것도 중요했지만 카메라가 꺼져도 우리가 즐거워야 하는데….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밥 먹고 나면 할 게 없을 것 같은데.

아우우우.

아직 어두워지기 전이었지만 하늘엔 수천 개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고, 종종 늑대인지 올빼미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그만큼 물 맑고 공기 좋은 시골로 왔다는 의미.

“이렇게 공기도 좋고, 경치가 좋은 곳이 한국에는 잘 없잖아요. 저는 오늘 워크샵 장소가 아주 맘에 드는데요?”

“저도 맘에 듭니다. 이런 곳에선 아무리 마셔도 잘 취하지 않더라구요.”

김용수 대사와 안지용 참사관은 윤아가 고른 이 시골 숙소가 썩 맘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중년의 남성들은 이렇게 조용하고, 공기 좋은 장소를 좋아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홍보 영상을 찍는 목적은 젊은 요리사들을 유혹하기 위함이 아닌가.

은퇴를 앞둔 중년의 남성들이라면 열에 아홉은 넘어올 것 같았지만 젊은 요리사들은 금세 실증을 느낄 만한 장소였다.

“일단 저녁 식사부터 할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에라이 모르겠다. 밤새워 먹고 마시면 되죠 뭐!”

이 말 한마디에 분위가 갑자기 반전되었다.

오랜 시간 차를 타고 온 우리는 이미 굉장히 허기진 상태였다. 중간중간에 휴게소도 없으니 간식 따윈 구경도 못 했고.

“카메라는 그냥 거기 박아 놓고 앉으세요.”

“그럼 예의상 켜 놓기만 하겠습니다.”

한국인들끼리 모이니 식사는 결국 불을 피워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방식이었다. 사실 그게 제일 푸짐하기도 하고, 맛도 좋았으니깐 아무도 거기에 불만을 가지진 않았다.

“크으 파나르의 숯 향도 장난이 아니네요.”

“이 장작이 무슨 나무라고 했죠 장 셰프?”

“삭사울이라고 합니다. 저도 말만 들어 봤지 이걸로 구운 고기는 처음 먹어 봅니다.”

한인회 김상율 회장님이 한국의 참숯 못지않은 좋은 숯이 파나르에도 있다고 하도 자랑을 하길래 그 맛이 궁금하긴 했었다.

파나르에선 꼬치 요리인 샤슬릭을 만들 때 주로 사용하는데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 사용해도 그 향이 일품이었다.

왜 그렇게 강력 추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 숯보다 향이 좀 더 세긴 한데 이것도 아주 좋네요.”

“그런 것 같네요.”

“저기 요리사님 아주머니께서 그 소금 조금 얻을 수 있냐는데요?”

“소금이요? 뭐 그 정돈 당연히 되죠.”

“그리고 이 쌈장도 조금….”

“어… 네 뭐 넉넉하니깐 좀 드려도 됩니다.”

삭사울에 샤슬릭이 아닌 다른 음식을 굽는 광경이 신기했는지, 아니면 뭐 더 챙겨 줄 게 없는지 주인아줌마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한식당에서 받아 온 천일염 한 줌을 얻어 가기고 하고, 삭사울에 구운 삼겹살 한 점을 쌈장과 함께 얻어먹으면서 감탄을 하기도 했다.

“고기랑 소스가 너무 맛있대요. 고맙다고 이것 좀 드셔 보시래요.”

이것저것 얻어먹은 게 미안했는지 아줌마는 창고에서 페트병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뭔가가 담긴 통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안지용 참사관은 본능적으로 쿠므스란 걸 알아챘다.

“오!!!!! 쿠므스!”

“직접 담근 거니깐 드셔 보시래요.”

“이야 이 귀한 수제 쿠므스를 내어 주시다니. 오늘은 맛있는 김치도 있으니 술술 들어가겠네요.”

“김… 취?”

주인아줌마는 김치라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윤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한국인들이 쿠므스랑 김치가 어울릴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지 물었다.

“우리나라에도 쿠므스랑 비슷한 술이 있어요. 그 술은 이런 묵은지 한 점이랑 먹으면 최고죠!”

나 대신 안지용 참사관이 나서서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주인아줌마는 그 맛이 궁금했는지 직접 만든 쿠므스 한 잔에 김치 한 조각을 얻어먹었다.

그리고 조용히 올라오는 엄지손가락.

예상치 못한 쿠므스와 김치의 훌륭한 조합에 놀란 눈치였다.

“요리사님 이거 직접 만든 김치냐고 묻는대요?”

“이거요? 제가 직접 담근 건 아니지만 제가 만든 것보다 훨씬 맛있는 김치예요.”

내가 관저에 와서 만들어 둔 김치는 아직 제대로 익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워크샵에서 구워 먹고 김치찌개를 끓일 때 쓸 김치는 한식당에서 조금 사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치 하나 정돈 나보다 나은 것 같았으니.

“근데 주인아줌마께서 한국 요리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아까부터 이것저것 궁금해하시는 거 보면.”

이런 시골에서 한국 음식을 직접 겪어 봤을 리는 없고, 그냥 외국인들이 와서 처음 보는 요리를 만드니깐 신기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자기가 만든 쿠므스와 낯선 음식의 궁합이 잘 맞는 게 놀랍기도 했고.

“주인아주머니는 한국 음식 드셔 보신 적 있으세요?”

윤아가 묻자 아줌마는 그제야 자기가 조금 선을 넘었다는 걸 눈치챈 느낌이었다. 살짝 미소 지으며, 곧바로 사과를 한 뒤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제가 요리 연구를 취미로 하고 있습니다.”

“네? 요리 연구요?”

요리 연구라니. 주인아주머니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한국에서 가져온 천일염이긴 했지만 그냥 굵은 소금일 뿐이고, 보통 조미료들일 뿐인데 왜 이렇게 관심을 가졌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취미로 파나르 요리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요리를 연구하고 있다는 주인아주머니.

“이런 촌 동네에서 요리 연구를 한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거나 인정을 해 주는 건 아니지만 난 누구보다 내 요리 지식과 실력을 믿고 있는 사람이에요.”

공식적으로는 민박집 주인이 직업이지만 그 누구보다 요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조용하고, 방해할 사람도 없으니 오히려 이런 환경이 좋다고 했다.

또 이곳은 보기와 달리 인터넷도 제법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었고.

“여기서 당신이 요리사죠?”

“저요? 어떻게 아셨어요?”

굳이 내가 요리사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여기 와서 내내 고기를 굽고, 이것저것 상차림을 준비했으니 눈치챌 만하지.

본인도 요리 연구가라 했으니 내 몸놀림을 보면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근데 이 김치… 정말 맛있네요. 나는 예전에 김치를 먹어 봤지만 이런 맛인지 몰랐어요.”

“김치를 드셔 보셨어요?”

“네 비록 통조림 김치였지만 아주 힘들게 구했었어요. 그걸로 김치찌개까지 만들어 봤는데 맛이 영….”

그랬겠지. 이런 시골에서 김치를 구해 먹어 봤단 것도 신기했는데 김치찌개까지 만들어 봤다니.

이렇게 열정 있는 요리 연구가가 처음 맛본 김치가 통조림이란 사실에 내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한국 음식에 관심을 가진 분이 여기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해 봤습니다. 반갑네요.”

“한국 음식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음식이란 음식은 전부 관심이 있죠. 다만 최근에 제 팔로워들이 한국 얘기를 워낙 많이 해서 관심을 가졌던 거구요.”

그러면서 자랑스레 휴대폰을 보여 주는 주인아줌마였다.

“헐… 이거 진짜 아주머니 안스타예요?”

“이런 귀하신 분이….”

사실 반갑긴 했지만 이런 시골에서 제대로 된 요리 연구를 할 수나 있었을지 의심했었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보여 준 자신의 안스타 팔로우는 10만 명이 넘고, 여태까지 만든 음식에 대한 피드는 1,000개를 가뿐히 넘기고 있었다.

“조용하고, 인터넷도 잘되니 이것저것 해 보긴 좋은데 솔직히 좀 외롭긴 하더라구요. 그래서 하나둘씩 만든 걸 올리다 보니 이렇게 좋아해 주는 사람이 제법 생겼죠.”

“정말 대단하세요.”

별거 아닌 일인 양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는 주인아주머니.

요리를 하고 저렇게 기록으로까지 남기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호텔에서 분기마다 하는 신메뉴 테스트도 일지에 남기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데, 거의 매일매일 기록을 남긴 거 보면 경이로울 정도였다.

“저번에 통조림으로 김치찌개를 만들어 보셨다 했죠?”

“네. 해 봤긴 해 봤는데 이 근처엔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을 먹어 본 사람도 없어서 제대로 만들어진 건지 확인해 볼 수도 없었네요.”

“그럼 잘됐네요. 어차피 저희 고기 다 먹고 김치찌개 끓여서 식사하려고 했거든요. 제가 제대로 된 김치찌개 알려 드릴게요.”

“정말요?”

이렇게 요리에 열정적인 사람이 통조림 김치만 맛봤다는 사실에 참을 수가 없었다. 한국인 요리사로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걸로는 아무리 조미료를 때려 넣어 봐도 제대로 된 김치찌개 맛을 낼 수 없을 거다. 마침 한국 최고 수준의 실력자가 만든 김치도 남아 있고, 질 좋은 돼지고기도 듬뿍 있으니 이걸로 진정한 김치찌개의 맛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면 혹시 카잔이란 게 있으면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카잔이요?”

사실 나도 써 본 적은 없고, 이름만 들어 봤던 물건이다. 파나르에 한국의 무쇠솥과 같은 냄비가 있다는 걸 들어 봤는데 생각보다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식 무쇠솥이라도 관저에선 자주 쓰지 않을 테니 굳이 구할 필요성도 못 느꼈고.

하지만 이렇게 공기 좋은 곳에서 가마솥에 끓인 김치찌개를 맛볼 수 있다면?

그 맛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요리 연구가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물어봤다.

“역시 요리사님은 달라도 뭔가 다르네요. 잠시만요.”

외국인이 파나르 문화 중 하나인 카잔을 찾자 뿌듯해하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주인아줌마가 김치찌개를 만들어 봤다고 했을 때 그런 기분이었다.

“자 이걸 사용하세요. 제가 애지중지하며 써서 코팅도 잘되어 있고, 깨끗합니다.”

“이야. 영락없이 무쇠솥이네요.”

말로만 듣던 카잔은 뚜껑의 손잡이 모양만 조금 다를 뿐 무쇠솥과 거의 비슷한 생김새였다. 국을 끓이고, 밥을 볶는 등 사용법도 거의 비슷했고.

“제대로 된 김치찌개가 나오겠네요.”

“기대가 됩니다.”

나는 남은 삼겹살과 김치만을 듬성듬성 준비했다. 그러는 중에 카잔은 삭사울을 태우며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차르르르를.

두꺼운 무쇠솥에 지방 덩어리 몇 개를 먼저 넣어 돼지기름을 빼 주었다. 거기에 나머지 삼겹살을 넣고, 몇 분 볶아 내자 갈색이 된 삼겹살에서 고소한 기름이 또다시 녹아 나왔다. 그리고 썰어 둔 김치를 넣고 한 번 더 볶아 주기 시작했다.

“이야 소리도 냄새도 끝내주네요.”

주인아줌마 역시 자기가 김치찌개를 만들 때랑은 사뭇 다른 냄새라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맛있는 김치만 구할 수 있다면 김치찌개만큼 쉬운 요리도 없다. 고기만 듬성듬성 썰어 넣고 끓여 주기만 하면 요리가 완성되니까.

별도의 조미료도 쓸 필요 없고, 간을 해 줄 필요도 없다. 그냥 고기의 육즙과 김치의 맛이 제대로 새어 나와 어우러질 시간만 주면 된다.

“육수를 사용하면 좋지만 없으면 쌀을 씻은 물을 사용하면 좋아요. 그것도 없으면 그냥 물을 써도 되구요.”

“아하 그건 우리 파나르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에요. 걸쭉한 스프를 만들 때 주로 사용하죠.”

척하면 척이었다. 쌀뜨물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전부 알고 있었다.

“이렇게 30분 정도 끓이면 김치의 섬유질이 부드러워지고, 육수도 반 정도로 줄어들면 완성입니다.”

“이게 끝인가요?”

끝났다는 나의 말에 주인아줌마는 놀란 눈치였다. 30분 내내 끓이면서 그 흔한 소금이나 후추도 넣지 않았고, 육수나 쌀뜨물은커녕 맹물만 사용했으니까.

이제 진짜 제대로 된 김치찌개인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한번 드셔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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