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워크샵 한 번 갑시다
“해외 공관 관저 만찬 우수 사례를 활용한 홍보 영상과 관저 요리사 채용 모집 영상 촬영의 건이란 게 정확하게 뭘 말하는 거죠?”
요리에 관련된 용어가 아니라 그런지 호텔에서 보던 공문들처럼 바로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음… 쉽게 말해서 우리 파나르 대사관을 이용(?)해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우리나라 공관들을 홍보하겠다 이 말입니다.”
“대사관이나 총영사관은 그냥 국민들의 필요에 의한 기관인데 꼭 홍보를 해야 하나요?”
영리를 목적으로 한 회사나 가게 같은 곳이라면 홍보가 필요하겠지만 해외 공관들은 대한민국 교민이나 기업들을 위해 존재하는 공공 기관이었다.
왜 홍보가 필요한 건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허허 항상 장 셰프에게 배우기만 한 거 같은데 이건 내 전문 분야니깐 설명해 줄게요.”
요구 사항 자체는 간단했다.
촬영, 그리고 영상 자료 제작.
임현아 선수 인터뷰 영상에 앞뒤로 붙일 수 있게 해외 공관 업무에 대한 영상을 촬영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게끔.
“손님들을 대면하는 것 외에도 많은 업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영상을 찍으면 돼요. 이를테면 피겨 선수단을 초대해 격려해 준 것 등등.”
“그러면 관저 요리사 채용 모집의 건은 뭔가요?”
앞의 내용은 내가 주도적으로 나설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관저 요리사 채용 모집에 대한 건은 100% 나와 관련이 있는 일이겠지.
“이건 참 장 셰프가 대단하다고밖에 말을 못 하겠네요.”
“그건 무슨 뜻이십니까?”
“나도 이런 식으로 채용 공고를 올리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김용수 대사는 날 자랑스럽다는 듯이 몇 초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원래 재외 공관 요리사들은 거의 중견급만 뽑는 거 알고 있죠?”
“네 물론입니다.”
“근데 그게 본부 내부에서 규칙으로 정해지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게 나이 제한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아예 지원조차 받지 않았겠지.
김용수 대사 본인도 처음엔 어리다는 이유로 이미 뽑힌 날 못마땅해했으니, 모를 수가 없는 내용이다.
“근데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안 돼라는 의도가 아니란 건 몇 달 겪어 보니 알겠죠?”
이 물음엔 적어도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어리다는 이유로 정규직 계약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나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재외 공관 요리사의 업무는 초보 요리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요리의 수준이 높거나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젊은 요리사들이라도 재능이 많은 사람이라면 완성도 높은 요리를 충분히 만들어 낼 순 있다.
하지만 이 재외 공관 요리사는 그 외에도 손님들의 종교, 성향, 만찬의 성격들에 따른 다양한 메뉴 구상에서부터 재료 구입, 보관, 재고 관리, 회계 등등 부수적으로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적어도 호텔이나 레스토랑 경영에 조금은 참여하는 부주방장 또는 수셰프 정도는 되어야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도 회귀하기 전 이 나이였다면 잘 해낼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확실한 건 지금처럼 빠르게 자리를 잡진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근데 장 셰프가 그 편견을 깨 버린 장본인이 된 겁니다.”
“제가요?”
“네 젊은 사람들도 역량만 된다면 충분히 재외 공관 요리사 업무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잖아요.”
“그런가요?”
“규칙을 바꾸는 것보다 편견을 깨는 게 더 어려울 수 있는데, 장 셰프가 그걸 해냈네요.”
나도 젊은 요리사가 아닌데….
그렇지만 외교 역시 트렌드라는 게 있고,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요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트렌드가 돌고 돈다.
비록 경험은 부족할지언정 젊은 요리사들의 이런 감각이 공관장들의 업무에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냥 보여 주시면 됩니다.”
“뭘요?”
“대사관 요리사의 일상을요.”
대사관 요리사의 일상을 그냥 보여 주면 된다라.
외교 오, 만찬 말고 또 보여 줄 만한 게 있을까?
요리사니깐 요리하는 것만 제대로 보여 주면 되겠지 뭐.
“근데 나는 장 셰프가 요리하는 것 말고도 다른 걸 좀 보여 줬으면 해요.”
“다른 거라면… 어떤 거 말씀이신가요?”
“장 셰프도 곰곰이 생각해 봐요. 대사관 요리사로 처음 왔을 때 요리하는 것 때문에 힘들었어요?”
김용수 대사의 물음에 나는 이곳에 온 첫날을 곱씹어 보았다. 요리하는 것 때문에 힘이 들었는가?
그건 아니다.
인정을 받기 전 처음 몇 번 빼고는 내가 원하는 메뉴, 내가 하고 싶은 메뉴를 실컷 할 수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선 오히려 스트레스가 적었다.
다만 재료를 사기 위해 시장을 갔을 때 의사소통 문제, 식재료 재고 관리, 친구나 가족이 없다는 외로움 등등, 요리보단 다른 부분이 더 신경 쓰이고 걱정이 되었다. 나는 운 좋게도 전부 만족스러웠지만.
“요리하는 것 자체는 제 음식을 맘껏 만들 수 있으니깐 오히려 좋았습니다.”
“요리사들을 유혹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말은 없겠죠?”
“그렇죠. 특히 젊은 요리사들은 자신만의 음식을 하는 거에 엄청난 갈증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젊은 요리사들은 경력이 적으니 주방장이나 오너 같은 누군가가 만들어 준 레시피대로만 요리하는 게 대부분일 거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 20대에 자기 레스토랑을 창업할 수도 없을 거고.
그런 면에서 재외 공관 요리사는 젊은 요리사들의 자기 요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데 있어 적합한 직장이었다.
“그럼 요리에 대한 내용은 그거면 충분하고, 즐거운 해외 공관 생활을 보여 주면 어떨까요?”
“즐거운 해외… 공관 생활이요?”
“아! 혹시 즐겁지 않은가요? 너무 내 위주로만 생각했나?”
“아닙니다. 충분히 즐겁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거의 40년 전 처음 해외 공관에 파견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엔 낯선 업무에 적응하는 게 제일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기를 바랐다고 한다.
해외에서 직장 동료들은 동료임과 동시에 가장 가까운 친구나 다름없었다. 특히 한국인이 많지 않은 지역의 공관에선 서로가 더욱 의지가 되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장 셰프가 나와 김준우 서기관, 안지용 참사관 그리고 윤아 씨까지 우리 대사관 식구들과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 줬으면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자기의 요리를 충분히 할 수 있고, 함께하는 동료들까지 좋다면 젊은 요리사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직장이 있을까?
물론 중견 요리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지만 김용수 대사는 나처럼 젊고 역량 있는 요리사들을 많이 채용할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어떻게 보여 주면 될까요?”
나도 김용수 대사의 말에 대부분 동의했다. 영상을 촬영한다는 거에도 적극 협조할 생각이었고.
그런데 어떤 걸 보여 주면 사람들이 재외 공관 요리사 생활이 즐겁다고 생각할까?
“만찬 행사는 조만간 캐주얼한 분위기로 진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겠습니다. 그때 촬영 협조를 요청하면 되고, 동시에 식재료를 사러 시장을 갈 때도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관저에서 나와의 일상 모습은… 그냥 뺍시다.”
오, 만찬 행사가 없을 땐 나와 김용수 대사 둘이서 그냥 식사를 하는 게 전부다. 중년 남성 둘이 영상을 남길 만큼 알콩달콩한 일들은 벌어지지도 않을 테고.
그리고 그런 일상을 촬영한다고 하니 괜히 부끄러웠다.
“당장 급한 거 없으니 우리 워크샵 한 번 갑시다.”
* * *
워크숍 당일.
갑작스레 계획된 워크샵이었지만 모두가 들뜬 표정이었다.
윤아를 제외하곤 전부 파나르에서 산 지 1년이 넘지 않았다. 파나르 곳곳에 엄청난 볼거리 많다는 걸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직접 가 보진 못한 상황이었다.
“드디어 이 도심을 떠나 보는군요.”
“그러게요. 제가 제대로 가이드하겠습니다. 파나르의 진짜 아름다움을 보여 드릴게요.”
이번 워크샵의 장소와 숙소 예약 등등 모든 것을 윤아가 담당해서 정했다. 어차피 파나르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사람도 윤아뿐이었고, 자신만만하게 나서는 모습을 보고 김용수 대사는 전부 믿고 맡겨 버렸다.
“윤아 씨. 카메라랑 삼각대, 그리고 조명. 이 정도만 있으면 될까요? 나 영상 촬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서 제대로 준비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글쎄요… 저도 영상 촬영은 해 본 적 없어서.”
윤아가 담당한 장소나 숙소를 정하는 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하지만 영상 촬영을 담당한 김준우 서기관 쪽은 시작부터 출발하기 직전까지 삐걱거렸다.
이번 워크샵은 단순히 놀러 가는 것뿐만 아니라 영상 촬영을 겸해서 가는 것이었다.
대사관 직원들 전부 너튜브나 영상 촬영 같은 경험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 골머리를 썩였다.
“일단 출발하면 6시간 넘게 가야 하니깐 꼼꼼하게 챙기셔야 해요 서기관님. 빼먹은 걸 다시 가지러 올 순 없으니까요.”
“휴우… 아들놈이랑 평소에 너튜브나 팅통 같은 것도 좀 해 볼 걸 그랬나 봐요. 인터넷 찾아보고 했긴 했지만 영 불안하네요.”
본부에서 직접 촬영팀을 파견해 주면 좋겠지만 내부 홍보용으로 사용할 영상을 찍으러 파나르까지 오는 건 낭비였다. 게다가 조금 어색하더라도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는 게 중요했으니, 본부는 직원들이 직접 촬영하는 걸 요구했다.
“김 서기관님. 어쨌든 이번 워크샵의 목적은 맘 편히 놀러 가는 거니깐 너무 촬영에 신경 쓰지 마요. 이번엔 그냥 연습 삼아 찍어 보고, 그중에 좋은 게 찍히면 쓰는 거고 아니면 다시 찍으면 되니깐 맘 편히 먹어요.”
“휴우… 대사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깐 이제야 맘이 놓이네요. 꼼꼼하게 준비했는데도 영 불안했거든요.”
“허허허 놀러 가는 분위기를 내가 괜히 망친 것 같군요. 그냥 거절하면 되는 거였는데. 이제부터라도 노는 거에 더 집중해 주세요.”
유난히 힘들어하던 김준우 서기관은 이제야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그래, 다 같이 놀러 가는 분위기를 촬영을 하느라 망칠 순 없지.
나도 억지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후배들을 위해 진짜 대사관 요리사의 상황을 보여 주고 싶었다.
“자 출발하시죠!”
그렇게 홍보 영상 촬영 연습 겸 워크샵을 위해 차에 올라탔다.
“근데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윤아 씨?”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숙소나 자세한 일정은 윤아가 끝까지 비밀이라며 알려 주지 않았다.
다만 호텔이나 펜션 등 좋은 시설이 아니라 파나르를 100% 느낄 수 있는 곳이란 힌트 정도만 줄 뿐.
“일단 오늘은 그냥 이동하는 데만 하루가 끝날 것 같으니, 도착하면 숙소에서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술을 한잔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예압.”
안지용 참사관의 짧은 환호성이 이어졌다.
세계에서 땅이 가장 큰 10개의 나라 중 하나인 파나르는 인근 도시로만 가는 데도 5~6시간이 걸렸다. 오전에 출발했지만 숙소에 도착하면 거의 저녁 시간이었다.
“드디어 저희 파나르 대사관의 첫 워크샵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김준우 서기관은 주변 환경도 보여 줄 겸 테스트도 할 겸 카메라를 켜서 사방으로 돌렸다.
하지만 장장 6시간 동안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벌판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저희 왔습니다.”
모두가 당황해하는 사이 윤아가 능숙한 파나르어로 마중 나온 주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직원이라고 해 봤자 40살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 한 명이 전부였다.
주인아주머니는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 듯 반갑게 우릴 맞아 주었다.
이런 시골에서는 외부인을 만나는 게 흔한 일이 아니겠지….
아줌마의 눈은 빠르게 우리들을 훑고 지나갔다.
“근데 저희 오늘 묵을 숙소는 어디예요?”
“숙소요? 바로 저곳이 오늘 숙을 숙소예요.”
“저… 기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딱 하나뿐인 조그만 건물이 오늘 우리가 머물 숙소라고 했다.
“네 이렇게 보여도 엄연히 숙박업을 하는 곳입니다. 한국에선 이런 걸 민박이라고 부르죠.”
그나마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밖에선 잘 보이지 않던 건물이 하나 더 있긴 있다. 방보단 창고에 더 가까운 겉모습이었지만….
보일러는 제대로 나올까라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