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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49화 (50/202)
  • 49. 공문이 도착했습니다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사람이라든가, 그게 아니면 뭔가 대단한 훈련 비법이라도 있으면 알려 달라니깐 뜬금없이 떡볶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은 베테랑 엠씨마저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현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예전 인터뷰를 훑어보니깐 떡볶이를 되게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임현아 선수의 떡볶이 사랑은 여전한가 보군요.”

    “네 저는 떡볶이를 아주 좋아합니다. 훈련이 잘된 날에도 먹고, 훈련이 안된 날에도 먹고, 힘든 날도, 기쁜 날도 다 먹어요 헤헤.”

    맛있는 음식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건지 말을 하다가 배시시 웃는 임현아 선수였다. 이런 순수한 매력 덕분에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되었지.

    은퇴 후에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은 스포츠 선수는 임현아 선수 말곤 드물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떡볶이가 금메달을 따게 해 준 비법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냥 떡볶이가 금메달의 비법이라고만 하면 저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거든요.”

    “음….”

    임현아 선수는 그때의 기억을 곱씹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대회를 앞두고 파나르 대사관에서 깻잎 떡볶이랑 양배추 김밥 그리고 구운 야채 튀김을 만들어 주셔서 다 같이 먹었어요.”

    “파나르 대사관에서요? 그리고 잠시만요. 방금 말씀하신 메뉴 이름들이 제가 알고 있는 거랑 조금 다른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분식들이 맞나요?”

    임현아 선수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숨어 있는 맛집을 소개하는 사람처럼.

    너희들은 이 맛을 절대 모를 거다라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아니요! 떡볶이엔 떡 대신 곤약이 조금 들어가 있고, 양배추와 깻잎만 듬뿍 들어간 떡볶이예요.”

    “떡은 하나도 없이 양배추와 깻잎만 잔뜩이요?”

    “네 그리고 김밥엔 밥 대신 양배추샐러드랑 계란이 들어가 있고, 야채 튀김은 양파랑 샐러리, 콜라비를 구워서 만들었대요.”

    음식 설명을 듣자 엠씨도 구경하는 사람들도 그런 음식은 처음 들어 본다며 놀라워했다. 흔한 음식이긴 했지만 사용한 재료들은 낯설었다.

    “그런 음식은 처음 들어 보네요. 깻잎 떡볶이와 양배추 김밥, 그리고 콜라비 야채 튀김이라….”

    “당연하죠. 그건 우리 피겨 선수들만을 위해 요리사님이 만들어 준 특별식이라고 했거든요.”

    “피겨 선수들만을 위한 특별식이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 베테랑 엠씨는 임현아 선수가 왜 ‘특별식’이라는 말을 강조하는지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주목받는 자리를 통해서 비인기 종목 선수들이 겪는 설움을 조금이나마 대변해 주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임현아 선수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엠씨는 본인이 나서서 좀 더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게 자신의 본분이라 판단했다.

    “원래 피겨 선수들이 따로 훈련을 할 아이스 링크장도 없는 걸로 아는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밤에 손님들이 다 나간 후에 훈련을 했어요.”

    “그리고 식단 조절도 굉장히 세세하게 필요한 종목인데 선수촌에선 따로 식사를 준비해 주지 않죠?”

    “네 그것도 맞아요. 맨날 풀만 먹었어요.”

    현아는 자신의 의도를 알아채 준 엠씨가 고마운지 신이 난 표정으로 힘차게 대답했다. 괴롭힌 애들을 선생님에게 일러바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 관련된 협회 분들은 전부 들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무려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낸 우리 피겨 선수단에게 앞으로는 적극적인 지원을 해 주시길 바라겠고, 선수촌에서도 하지 못한 피겨 선수들의 특별식을 제공해 주신 파나르 대사관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대신 전하고 싶습니다.”

    이때 임현아 선수가 다시 한번 끼어들었다.

    “이번에 제가 메달을 딸 수 있었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파나르 대사관입니다. 감독님, 코치님, 언니들 그리고 대사님, 요리사님 감사합니다.”

    엠씨의 간결하고 명확한 정리에도 조금 부족했는지 임현아 선수는 마이크를 들고 강한 어조로 감사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 목소리는 티브이를 보고 있던 우리들 귀로도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대사님 방금 들으셨어요?”

    “당연하죠. 아주 경사 났네요 경사 났어.”

    이런 자리에서 파나르 대사관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것도 신기했는데 대사님, 요리사님이라며 딱 집어서 우리를 직접 언급하기까지 했다.

    “장 셰프?”

    “네 대사님.”

    “우리 아무래도 이번 만찬 대박인 거 같죠?”

    “네 맞습니다. 지금까지 파나르에서 제일 뿌듯한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인터뷰 덕분에 멍해진 정신을 차리고 힘차게 하이 파이브를 했다.

    피겨 선수단들 중 한 명만이라도 메달을 땄어도 우리에겐 엄청난 도움이었을 거다. 동메달 딱 하나만이었어도 충분했지만 무려 금메달 하나와 동메달 하나.

    게다가 파나르 대사관에서 먹은 음식이 금메달의 비법이라고까지 말한 영상 자료까지 남아 버렸다.

    이 황금 같은 자료를 어떻게 쓸지 벌써부터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내일부터 부지런히 언론 보도 자료를 준비해야겠네요. 이런 건 생색 좀 내 줘야 제맛이겠죠?”

    “물론입니다. 정말 다행인 것 같습니다. 선수들이 메달도 따고, 우린 좋은 성과도 얻을 수 있어서요.”

    “그래요 이 모든 게 다 장 셰프 덕분입니다. 휴가 다녀오더니 감이 아주 살아서 돌아왔군요.”

    감이 살았다기보다 운이 좋았지.

    임현아 선수의 오랜 팬이었지만 멀어진 지 20년이 지났다. 하지만 거기서 그렇게 임현아 선수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나한테도 임현아 선수한테도 훨씬 좋은 결과니깐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 *

    외교부 본부.

    “장관님 홍보 담당관입니다. 부르셨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노크를 하고 장관실에 들어서자 커다란 브리핑을 하는 티브이에는 임현아 선수의 인터뷰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과장님도 혹시 이 인터뷰 보셨어요? 요즘 제법 난리라던데.”

    장관은 외교부 홍보 담당관을 불러 임현아 선수의 인터뷰를 다시 한번 보여 주고 있었다.

    담당 과장 역시 인터뷰를 이미 여러 번 보고 혹시나 해서 검토까지 마친 후였다.

    “당연히 봤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어떻게… 라면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 인터뷰 내용 말입니다.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 것 같나요?”

    외교부 장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가 한 가지 비슷한 고민을 가지게 된다. 굵직한 정책들을 진행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

    몇십 년 전부터 이어져 온 해외 공관들의 불친절한 업무 태도로 인해 생긴 불신 그리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편하게 월급만 받아 간다는 오해들.

    각종 오해와 불편으로 쌓인 해외 공관의 나쁜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은 욕심을 누구나 가지게 된다.

    “이 영상 좀 쓸 만한 곳이 많지 않겠어요?”

    “음….”

    영상 전체에서 파나르 대사관이 언급된 시간은 그리 길지도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피겨 스케이팅 선수단이 역사에 남을 만한 성과를 확실히 얻었고, 그 영상에선 역사적인 성과의 이유가 우리 공관들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임현아 선수의 인기는 며칠 새 국민 여동생이라 불릴 만큼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런 임현아 선수를 도와 금메달을 딸 수 있게 해 준 대한민국 대사관이 있다?

    이 정도만 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엔 너무나도 충분했다.

    “지금 파나르 대사관에 김용수 대사님이 나가 계시죠?”

    “네 맞습니다.”

    “우리 선배님 늦었지만 아주 열일 하시는구만. 그리고 거기 대사관 요리사도 젊은 사람이라 했죠?”

    “네 그렇습니다. 중견 요리사는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아서요….”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관심을 가졌던 공관이었다. 하지만 정작 외교부 장관은 몇 달 동안 한 번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비록 퇴직한 한참 선배가 파견되어 나가 있지만 파나르 말고도 전 세계엔 180개국에 공관들이 설치되어 있었으니까.

    다른 대사관이나 총영사관들과 공평하게 똑같은 대우를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재밌는 조합이네요. 그 두 사람 손발이 잘 맞는 거 같으니 일 좀 더 하게 해 줍시다.”

    “일이라면…?”

    외교부 장관은 두 사람의 특이 케이스를 통해 해외 공관을 홍보할 생각이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회복시키고, 대대적으로 알리기 위해.

    백날 천날 어렵고 복잡한 일을 해내도 국민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국민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고 좋아할 만한 사례가 생겼는데 그냥 놔둘 순 없지.

    “일단 해외 공관들 이미지를 쇄신시킬 만한 홍보 영상이나 보도 자료 준비해 주시고, 요즘 대사관 요리사들도 채용이 어렵다고 했죠?”

    “네 아무래도 중견급 요리사들을 주로 뽑다 보니깐 지원자가 많지 않습니다.”

    대사관 요리사는 외교 오만찬의 메뉴 구성부터 식자재 구매, 조리, 청소까지 혼자서 모든 걸 해야 하다 보니 많은 공관장들은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중견 요리사들을 희망한다.

    그래야지 오만찬 행사를 진행할 때 음식을 전적으로 믿고 맡길 수 있고 신경 쓸 게 덜할 테니까.

    그래서 파나르의 장덕수 셰프처럼 젊은 요리사들은 다른 공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꼭 중견 요리사들이 아니어도 업무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게 파나르 요리사를 통해 증명되었으니, 요리사를 채용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자료도 한번 만들어 보세요. 이건 내부 자료로 사용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장관은 이번 임현아 선수의 인터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쥐어짜 볼 생각이었다. 한 번에 180도가 변하진 않겠지만 분명 좋은 기회인 건 확실했다.

    어차피 선배 장관들도 끊임없이 해 온 일이었고, 자기를 이을 후임들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중에서 조금 특별한 선례를 남기는 건 개인적으로 욕심나는 일이었다.

    * * *

    “안녕하십니까 대사님.”

    “어서 와요 장 셰프 잘 쉬었어요?”

    “네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아주 두 발 뻗고 잘 잤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부터 김용수 대사의 표정이 좋아 보였다. 임현아 선수의 인터뷰 말고도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이다.

    처음엔 그렇게 자책만 하더니, 요즘은 김용수 대사에게 계속 좋은 일들만 있은 것 같아 오히려 내가 기분이 좋았다.

    “우리 또 할 일이 생겼네요 휴우.”

    “할 일이요?”

    억지로 한숨을 쉬는 척했지만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지만 일단 시치미를 떼고 대화를 이어 갔다.

    “본부에서 우리한테 일을 너무 많이 주네요.”

    “또 무슨 일인데요?”

    김용수 대사는 준비해 놓은 A4용지 한 장을 나에겐 건넸다. 종이의 가장 위엔 공문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고, 첫 제목이 내 시선을 강하게 끌었다.

    -해외 공관 관저 만찬 우수 사례를 활용한 홍보 영상과 재외 공관 요리사 채용 모집 영상 촬영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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