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48화 (49/202)
  • 48. 분명 동메달이었는데

    세계 선수권 대회장.

    “현아야. 몸 상태는 어때?”

    “괜찮아요 다 좋아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어제처럼만 하자 알았지?”

    의외로 차분한 현아에 비해 감독과 코치가 훨씬 더 긴장한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임현아 선수는 전날 있었던 쇼트 프로그램 점수에서 무려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런 점수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거기다가 감독과 코치가 더욱 흥분된 이유는 좋은 성적을 낼 거라 예상했던 양현경 선수 역시 예상대로 선전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두 명의 한국 선수가 동시에 메달권에 있으니 흥분을 안 할 수가 없지.

    “현아야. 나는 솔직히 말하면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금메달까지 욕심이 좀 난다. 그래도 너무 부담은 가지지 말고 편하게 해.”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현아는 얼음판 위로 미끄러지듯 나섰다.

    어제만 해도 겨우 15살짜리 여자 꼬마 아이에게 대회장의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단 하루 만에 현아는 얼음판 위의 슈퍼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눈빛이 부담스럽지도 않은지 현아는 태연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포즈를 잡았다.

    그리고 시작되는 연기.

    방금까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던 커다란 환호성 소리는 이제 완전한 고요함으로 변해 있었다.

    임현아 선수는 타고난 재능도 재능이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멘탈이 가장 큰 무기였다.

    어떤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절대 실수를 하지 않기로 유명한 멘탈.

    이때부터 저런 멘탈을 가지고 있었구나.

    “제발… 제발.”

    “어후… 살 떨려.”

    감독과 코치는 임현아 선수의 경기를 보다가 발끝에 너무 힘을 줘서 쥐가 올라오기까지 했다.

    아파하는 와중에도 얼음판 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드디어 임현아 선수가 연기를 마칩니다.”

    “대박입니다 그리고 이건 기적입니다. 잔실수가 하나도 없이 완벽한 연기였습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오늘 역사가 다시 쓰여질 것 같은데 점수를 지켜볼까요?”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이게 겨우 15살짜리의 연기라는 게 믿어지십니까?”

    현장에 있던 한국 중계진들 역시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모두 의자에서 일어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더 어려울 테니까.

    전날 있었던 쇼트 프로그램에서의 임현아 선수 돌풍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세차게.

    “드디어 최종 점수가 나왔습니다.”

    “우어워우어워 금메달. 임현아 선수 금메달입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연기를 하는 내내 차분했던 임현아 선수는 점수가 공개되자 그제야 아이처럼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성인 선수들이었다면 감격의 눈물이나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을 테지만 임현아 선수는 스케이트를 신은 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아이처럼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결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사실 동메달, 아니 전체 순위에서 5위 안에만 들어도 엄청난 성과라고 할 수 있는데 무려 금메달과 동메달! 이번 대회에서 메달이 두 개나 나왔습니다.”

    이번 파나르 피겨 선수권 대회에서는 엄청난 이변이 발생했다.

    유력한 메달 후보로 거론되던 양현경 선수는 예상대로 동메달을 거머쥐었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이라는 나라, 게다가 그중에서도 가장 막내인 임현아 선수가 무려 금메달을 획득하게 된 것이었다.

    좋은 일이긴 한데… 이상하다.

    금메달은 분명 이번이 아니라 다음번 대회일 텐데.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틀린 걸까?

    “와아아아 장 셰프! 금메달이래요 금메달.”

    “미쳤습니다 대사님!!! 동메달이 아니라 금이네요 금!”

    메달 색깔이야 어찌 됐든 일단은 기쁨을 실컷 만끽하고 보자. 김용수 대사님 덕분에 우리는 가장 상석에서 선수들의 연기를 직관할 수 있었다.

    비행기라곤 제주도 갈 때 빼곤 타 본 적 없던 내가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 직관이란 걸 해 봤을 리가 없다.

    예전엔 티브이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직접 현장을 느끼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양현경 선수가 동메달을 확보했을 때도 경기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는데 임현아 선수의 금메달이 확정되자 나와 대사님은 서로를 강하게 껴안고 관중석이 무너질 듯 뛰며 기쁨을 만끽했다.

    마치 내 가족이 메달을 딴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임현아 선수!!! 축하드립니다. 여기예요 여기.”

    “우리가 응원 왔어요 임현아 선수.”

    김용수 대사는 메달을 받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가는 임현아 선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나는 여러 장 준비해 온 플래카드 중 임현아 선수이 이름이 써진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경기장을 몇 바퀴 돌았다.

    임현아 선수, 양현경 선수 이 두 선수가 한국인이란 걸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마치 어릴 적부터 먹이고 업어 키운 막둥이들이 상을 딴 것처럼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대사님! 약속한 거 지키셔야 합니다.”

    “약속이요?”

    “선수들이 메달 따면 다시 한번 관저로 초대한다는 거요.”

    “그렇지! 걱정 마세요. 내가 책임지고 데리고 올 테니 선수들 좋아하는 음식들로 잔뜩 준비하세요. 비용은 걱정 말고요. 내 사비라도 쓸 테니.”

    시간이 조금 타이트해서 밤 비행기를 타기 전 저녁만 간단하게 먹고 가는 일정으로 결국 선수단을 다시 초대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두 번째 관저 만찬은 임현아 선수의 적극적인 동의가 있었기에 이뤄질 수 있었다고 했다. 사상 첫 금메달을 딴 선수의 힘이 이렇게나 대단한 것이었다.

    “자 술까지는 무리지만 적어도 음식은 맘껏 드세요. 피겨 선수단의 역사적인 메달 획득을 축하드리고, 앞으로 더욱 승승장구할 수 있기를! 위하여!”

    “위하여!”

    나는 약속대로 떡과 쌀, 그리고 기름을 이용해 튀긴 분식 세트는 물론이고, 대회 동안 부족했던 영양을 보충할 수 있도록 스테이크며, 생선이며 많은 양의 음식들을 준비했다.

    솔직히 혼자서 하기 힘든 양이었지만 신이 나서 만들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신세를 지고 갑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신세라니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하죠. 이렇게 역사의 한편에 숟가락이라도 얹을 수 있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감독님과 코치님은 진심으로 김용수 대사에게 감동받은 눈치였다. 본인들은 이미 선수로서 은퇴를 했지만 자기 후배들만큼은 본인들 같은 대우를 받지 않길 바랐었다는데….

    파나르 대사관에서 그런 느낌을 처음으로 받아 봤다고 한다.

    “임현아 선수 다시 한번 금메달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요리사님. 다 요리사님 덕분이에요.”

    “에이 제가 뭘 한 게 있다구요.”

    예의상 하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대답하는 임현아 선수였다.

    “아니에요. 원래 대회를 앞두곤 배탈이라도 날까 봐 항상 먹는 걸 조심하거든요. 그래서 대회 때는 기본적으로 힘이 없어요.”

    “……!”

    내 귀에 익숙한 대답이었다.

    임현아 선수를 응원하기 시작하고 동계 전국 체전 전날 처음으로 떡볶이를 만들어 줬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게 임현아 선수의 첫 공식 메달이었는데.

    이제는 세계 선수권 대회의 메달이 첫 메달이 되어 버렸구나.

    “근데 이번엔 요리사님이 만들어 주신 떡볶이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어요. 그 후로 그 맛이 이상하게 계속 생각났었거든요.”

    “정말요?”

    “네 메달을 따면 한국 가기 전에 또 그 맛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평소보다 좀 더 열심히 했어요 헤헤.”

    이 말은 당연히 농담일 것이다. 진심이라 해도 내가 만들어 준 떡볶이 때문은 아니었을 거다. 그냥 본인 스스로 최선을 다했던 거지.

    그때도 지금도 본인이 잘해서 받은 메달을 내 덕분이라고 말해 주는 임현아 선수의 팬질을 어떻게 멈출 수 있었을까.

    그래도 이번 생에는 멀리서나마 잊지 않고 응원해 주는 걸로 만족해야겠다.

    혹시 모르지.

    몇 년 후에 내가 청와대 요리사로 근무하게 되면 임현아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청와대로 초대될지도 모른다.

    그땐 떡볶이나 김밥보다 훨씬 비싸고 좋은 재료들로 고급 음식을 만들어 줘야겠다.

    * * *

    인천 국제공항 출국장.

    임현아 선수와 양현경 선수 말고도 다른 선수들도 애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성적들을 냈다. 그래서 그런지 피겨 선수단은 출국할 때와 전혀 다른 분위기로 입국할 수 있었다.

    “우와아아 임현아 임현아 임현아!”

    “양현경 양현경 양현경.”

    파나르로 출국할 때 나와 주방장님이 쉽게 끼어들 수 있을 정도로 소박한 규모의 취재진이었는데 입국장은 티브이로 봐도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비인기 종목이라는 설움은 벗을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선수들 모두 며칠 만에 엄청난 스타가 되어 버렸네요.”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나와 김용수 대사는 대회 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피겨 선수단의 입국 행사까지 챙겨 보게 되었다.

    며칠 전에 자기가 초콜릿도 주고, 같이 사진도 찍은 사람들이었는데 갑자기 너무 멀어진 느낌이라며 서운해했다.

    “대사님 그래도 뿌듯하시죠?”

    “당연히 뿌듯하죠. 뭔가 저들의 커다란 성과에 작게나마 도움을 준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그러게요. 실질적으로 도움 된 건 없겠지만 괜히 뿌듯하네요.”

    끊임없는 구애로 만찬을 이뤄 냈고, 유례없던 트레이닝복 차림의 만찬을 주최한 것도 본인이니 본인의 덕이 더 크다고 자랑하는 김용수 대사.

    반면 피겨 선수들의 입맛을 만족시키면서도 동시에 몸 관리까지 할 수 있게 한 메뉴 덕분에 힘이 빠지지 않고 메달을 딸 수 있었다고 자랑하는 나까지.

    선수단의 선전은 며칠 동안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러면 먼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피겨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임현아 선수. 제대로 인터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회 전엔 선수단 중 임현아 선수의 인터뷰가 가장 마지막 차례였지만, 이젠 고민할 것도 없이 가장 먼저 인터뷰를 시작했다.

    금메달을 딴 선수에 대한 예우이니 그 정돈 당연했다.

    “임현아 선수 먼저 축하드린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깜짝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시 우리가 모르는 특별 훈련이라도 있었나요?”

    엠씨의 물음에 임현아 선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생각에 빠졌다. 엠씨 역시 어린 임현아 선수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더 마이크를 살며시 뒤로 뺐고.

    몇 초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한 임현아 선수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이번에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떡볶이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네? 떡볶이요? 먹는 떡볶이 말씀이신가요?”

    현아의 한마디에 많이 인파가 몰린 출국장이 술렁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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