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관저로 초대 2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만찬에 어울릴 만한 메뉴는 처음 나온 샐러드가 끝이었다.
그다음부터는 그냥 친구 집에서 좋아하는 음식이나 먹으며 수다를 떠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이번 만찬의 목적이었다.
샐러드도 채소를 제외하곤 연어나 해산물 등 생으로 들어가는 재료들은 전부 배제했고, 드레싱도 마요네즈나 크림 없이 최대한 가벼운 드레싱으로 준비했다.
“대회 중에는 엄청 신경 써서 음식을 드신다고 하길래 저희 요리사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음식이 조금 허전하다 느껴져도 이해 좀 해 주세요.”
“아닙니다. 솔직히 그 부분에 대해서 저희도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커다란 스테이크가 나오거나 살아 있는 해산물 같은 게 나올까 봐서요.”
“아무래도 그런 건 좀 부담이 되죠?”
“네 저희 입장에서는 거절하는 게 쉽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걸 다 먹을 수도 없거든요. 근데 오늘 메뉴를 보니 마치 선수촌에 담당 요리사가 따라온 줄 알았습니다. 좀 놀랐습니다.”
일단 샐러드는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의 주식이라고 할 정도니 입맛을 맞추는 게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솔직히 소스도 없이 채소만 먹는 선수들도 많았으니까.
이제부터가 진짜 내 실력 발휘를 할 차례였다.
“아무리 그래도 배가 부를 만한 메뉴가 좀 있어야겠죠?”
“네네 뭐가 나오든 저희가 알아서 조절해서 먹겠습니다. 그것만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얼마든지요.”
편한 복장 덕분인지 김용수 대사의 역량 때문인지 외교 만찬에서는 조심할 만한 내용의 말도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었다.
“그러면 오늘의 메인 메뉴를 한 번에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스테이크 같은 메인 메뉴는 없었다. 그러니 코스로 만찬이 진행되지도 않았다. 샐러드를 제외하곤 모든 음식을 한 번에 가지고 나왔다.
“허….”
“선수들 입맛 위주로 메뉴를 구성해 봤습니다. 그래서 편하게 드실 수 있도록 분식을 주제로 음식들을 준비했습니다.”
“아… 이건 좀 곤란한데요.”
눈앞에 김밥이며, 빨간 떡볶이며 야채 튀김으로 보이는 음식들이 잔뜩 올라오니 선수들은 신이 난 눈치였지만 감독과 코치들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방금 샐러드를 칭찬한 걸 취소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대회가 임박해서 이런 음식은 지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수단을 대표해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는 감독이었다. 선수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고.
하지만 이건 그냥 분식이 아니었다.
“그러지 말고 안에 든 재료가 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요리 설명이나 한번 들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로 듣는 건 몸 관리에 문제가 되지 않으니 그것까지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나는 자신 있게 나가서 음식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이 음식들은 전부 피겨 스케이팅 선수단 맞춤 메뉴라는 걸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훗.”
맞춤 메뉴라는 말에 코치가 자기도 모르게 콧방귀를 꼈다.
선수촌에서도 자기들의 맞춤식을 제대로 준비해 주지 못하는데 자신들을 처음 만난 요리사가 무슨 수로 피겨 선수 특별식을 만든단 말인가.
피겨 선수 출신 요리사가 아닌 이상 내 말에 대해 전혀 기대도 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 떡볶이는 소화를 돕는 양배추와 다이어트에 좋은 깻잎을 듬뿍 넣어서 독특한 맛을 내 봤습니다. 떡과 어묵이 없으니 당연히 배에도 훨씬 무리가 적을 거구요.”
“……!”
떡볶이에 떡과 어묵이 없다는 말에 감독과 코치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렇지만 김밥과 튀김만으로도 선수들의 배에 무리를 주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이 김밥은 쌀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김밥입니다.”
“쌀이 없다구요?”
엉덩이를 살짝 들어 김밥에 가까이 다가가 살펴본 감독은 하얀 게 쌀이 아니라 양배추 채와 계란이란 걸 확인하고 다시 한번 놀랐다.
“사실 모양만 김밥이지 다른 음식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흠….”
굳어진 표정이 음식을 소개할 때마다 서서히 풀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마도 맘에 드는 모양이겠지. 맘에 들 수밖에 없다. 이건 내가 현아 선수를 쫓아다닐 때 본인들에게 직접 허락을 받은 음식들이었으니까.
그때도 선수들의 건강을 위해 허락했던 거라면 그 선택이 바뀌진 않았을 거다.
“그리고 이 야채 튀김처럼 보이는 음식은 튀긴 게 아니라 구운 겁니다. 밀가루 대신 쌀가루 반죽을 사용해 양파, 샐러리, 콜라비를 구워 냈습니다.”
“콜라비… 를 아시는군요.”
감자나 고구마, 옥수수 등은 탄수화물이 많으니 이것들도 피겨 선수들이 먹기엔 부담이 되는 음식들이었다.
대신 달달하고 포만감도 느끼면서 성분도 거의 수분으로 채워진 콜라비를 자주 먹었다.
나도 처음엔 생소한 식재료라 잘 몰랐었는데 현아 선수가 쿠키처럼 먹는 걸 보고 알게 되었다.
“어떠세요 감독님? 이 정도면 선수들이 먹어도 크게 부담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네 맞습니다. 이런 음식들이면 충분히 먹을 수 있죠. 과식만 조심하면 충분히 먹어도 되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만찬 내내 조용히 음식만 먹던 임현아 선수가 목소리를 높여 잘 먹겠다고 소리쳤다.
그렇게 젓가락을 들더니 깻잎 떡볶이와 김밥, 튀김 등을 순식간에 비워 버렸다.
나는 조용히 가서 깻잎 떡볶이를 리필해 줬고, 꾸벅하며 또다시 젓가락을 집어 드는 임현아 선수였다.
“천천히 드세요 임현아 선수.”
내 음식을 저 정도로 맛있게 먹어 주니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도 차갑게 식어 버린 떡볶이였지만 어찌나 맛있게 먹어 주던지.
그 맛에 계속 이것저것 공부해서 음식을 만들어다 갖다줬었다.
“자 후식으론 커피나 주스 대신 파나르 차 한잔 드셔 보시죠. 식사 후 배를 다스리는 데 아주 좋답니다.”
“그럴까요?”
만찬 음식은 전부 익숙하고 좋아할 만한 메뉴로 구성했지만 마지막으로 차는 파나르식으로 준비해 봤다. 그래도 하나 정도는 이국적인 느낌을 주면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비쉬파르막을 먹고 속을 다스릴 때 마시는 차를 준비해 줬다.
“감사합니다 대사님. 오늘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허전하진 않으십니까? 저는 만찬에 고기가 없으니 영 아쉽긴 하던데.”
“그렇습니까? 저희는 오랜만에 대회 기간에 포만감이란 걸 느껴 본 것 같습니다. 정말 건강하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닙니다. 오늘 준비해 주신 메뉴가 훨씬 더 대단했습니다.”
“그래요?”
“네 음식 하나하나 저희 종목에 대해 많이 연구하셨다는 게 100% 느껴졌던 메뉴입니다. 비인기 종목이라 이렇게 세세한 대접을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감독은 감사의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괜히 비인기 종목이나 뭐니 하면서 선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릴까 봐 말을 조심하는 눈치였다.
“혹시나 대회 중에 어려운 일이 생기시면 곧바로 대사관으로 연락 주십시오. 24시간 항상 대기 타고 있을 테니 대회에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네 덕분에 든든합니다. 오기 전에 많이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파나르도 안전한 거 같구요. 그간 대사관에서 많이 노력하신 게 눈에 보입니다.”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감독과 코치, 그리고 선수단은 진심으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처음 왔을 때처럼 주눅이 들어 있는 선수들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임현아 선수 역시 대회 기간에 좋아하는 떡볶이를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른지 신이 난 표정이었다. 꽃다발과 초콜릿 선물을 한 아름 안고서.
“그러면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 한번 찍으시는 게 어떨까요?”
“사진이요? 좋습니다. 얼마든지요.”
김용수 대사의 트레이닝복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마치 선수들과 같은 소속 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가운데 서서 마치 오래된 명장의 포스를 내며 사진을 찍는 김용수였다.
옆에서 나만 하얀 조리복을 입고 이방인 티를 내고 있었고.
이 사진은 꼭 얻어서 보관할 예정이었다.
회귀하기 전보다 더 빨리 덕질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날을 기념하고 싶었다.
“이번 대회에 너무 부담 가지시지 말고, 계획했던 목표를 이루시길 응원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수단은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이른 시간에 만찬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관저를 나섰다.
나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려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결국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저… 잠시만요.”
“네?”
보자마자 반가움에 달려들고 싶었지만 며칠째 꾹 참고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선수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계속 조심스러웠는데 그래도 지금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첫 번째 세계 선수권 대회를 치르기 전 임현아 선수의 사인.
정직하게 이름 세 글자만 또박또박 적은 그 사인이 받고 싶었다. 억지로 부탁할 순 있었지만 그건 의미가 퇴색된 사인이니까.
진짜 순수한 임현아 선수의 글씨체가 담긴 사인을 받고 싶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선수들 사인 한 장씩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사인이요?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요.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건 익숙하다는 듯 양현경 선수가 자연스레 앞으로 나섰다. 미안하지만 이번만 양보해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임현아 선수부터 사인 좀 부탁드릴게요.”
“저… 저요? 언니들부터 아니구요?”
“평소엔 언니들이 먼저 할 테니깐 오늘은 특별하게 막내부터 해 주세요 괜찮죠?”
막내인 자신에게 먼저 사인을 권했던 적이 처음이라 그런지 임현아 선수는 잠시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옆에서 최고참 양현경 선수나 감독, 코치님들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괜찮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요리사님.”
임현아 선수는 이런 대접이 나쁘지 않은 듯 능숙하게 사인을 해 주었다. 아직은 또박또박 이름 세 글자를 적는 게 사인의 전부였지만.
대신 밑에는 잘 먹었습니다 요리사님이라는 글로 사인을 마무리했다.
제일 먼저 사인을 한 임현아 선수 덕분에 모든 선수들이 잘 먹었습니다 요리사님이라는 인사를 사인에 남겨 주었다.
김현경 선수의 사인은 잘 보관해 뒀다가 주방장님께 드려야겠다. 잘 먹었습니다 요리사님이라는 문구는 주방장님께도 유효한 거니까.
“임현아 선수!”
“네… 네?”
“이번 대회 너무 부담 가지시지 말고 건강하게만 끝내 주세요. 잘 모르시겠지만 저희 대사관은 물론이고, 많은 국민들이 응원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 대회 때는 떡하니 금메달을 받게 될 테니 조급해하지 말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요리사님의 맛있는 음식 덕분에 대회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러면 혹시 이번에 대회에서 상 타게 되면 한국 가기 전에 다시 관저로 오세요. 그땐 떡 있는 떡볶이, 밥 있는 김밥, 기름에 튀긴 야채 튀김 실컷 만들어 드릴게요.”
“정말요?”
나는 김용수 대사를, 임현아 선수는 감독님을 서로 쳐다봤다. 두 사람은 알겠다는 고개를 끄덕였고.
안타깝지만 이번 대회에서 상을 타고 다시 관저로 올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내 응원이 힘이 되었다면 그걸로도 충분했다.
오늘 관저에서 선수들을 대했던 우리들의 태도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대접이었다고 한다.
피겨 선수들에 대한 이해도도 높고, 떡볶이라는 금기시하는 음식도 최대한 부담이 없도록 만들어 줬고.
이렇게 피겨라는 종목에만 포커스가 맞춰져서 대우를 받아 본 적은 처음이라 했다.
이번 대회에서 수상을 하게 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관저 만찬을 꼭 기억하겠다는 감독과 코치였다.
나 역시 그런 말을 들으니 선수단을 더욱 진심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어때요 장 셰프?”
“뭐가요?”
“저 선수들이 진짜 대회에서 상을 딸 거 같나요 못 딸 거 같나요?”
김용수 대사는 선수들이 돌아가고도 한참이나 현관에서 멀뚱히 서 있었다. 덩달아 나도 옆에서 멍하니 서 있게 되었고.
“대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양현경 선수는 예상대로 사상 첫 동메달을 따게 되고, 임현아 선수는 전체 5위라는 호성적을 내게 된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땁니다.”
“네?”
“저 중 한 명은 100% 메달을 땁니다.”
‘딸 것 같다’나 ‘딸 거라 생각한다’도 아니고 땁니다?
혹시 김용수 대사도 미래를 알고 있는 걸까?
너무나도 자신 있게 메달을 딸 거라 대답하는 김용수 대사였다.
“왜 그렇게 100% 확신하세요?”
“아 이거는 그냥 저만의 응원 방식이에요. 무조건 원하는 결과를 확신하는 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100% 확신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구요.”
“아… 좋은 방법이네요. 그러면 관저 만찬을 한 번 더 할 수 있도록 스케줄 빼 놓으셔야겠네요.”
“그거야 어렵지 않죠 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