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46화 (47/202)
  • 46. 관저로 초대 1

    다음 날 관저.

    “안녕하세요 대사님.”

    “장 셰프 오랜만이에요. 어서 와요. 휴가는 잘 보냈어요?”

    “네 덕분에 알차게 보내고 왔습니다.”

    관저에 들어서서 김용수 대사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습관적으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싱크대 주변을 둘러보니 싱크대엔 이런저런 그릇들이 제법 쌓여 있었다. 하지만 설거지를 끝낸 그릇도 건조대에 많이 널려 있었고.

    김용수 대사는 나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일주일 동안 꽤나 최선을 다한 것 같았다.

    “미안해요. 냄비를 두 개나 태워 먹었어요.”

    “아….”

    싱크대 안에는 시꺼멓게 변해 버린 냄비 두 개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며칠 물에 불려서 닦으면 된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나 보다.

    “어이구 일주일 동안 식사는 제대로 하셨어요?”

    “보다시피 건강에 문제가 없을 정도론 먹었습니다.”

    자기 가슴을 내밀며 손바닥으로 몇 번 치는 김용수 대사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라면이나 김치 정도로만 끼니를 떼웠겠지.

    그 와중에도 최대한 설거지는 하려고 노력한 김용수 대사였다.

    냄비 두어 개 태워 먹은 것 정도는 큰일도 아니었다.

    “냄비는 새로운 걸로 사요. 내 잘못이니 내 사비로 사요….”

    “아닙니다. 이거 제가 닦을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안 되던데….”

    처음 왔을 때 윤아에게도 보여 줬지만 나 같은 요리사들이 가장 잘하는 게 요리 말고도 설거지나 청소다.

    식초와 베이킹 소다면 이런 냄비 100개쯤 살리는 거는 일도 아니었다.

    “그럼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은 차차 들려주는 걸로 하고 일 얘기부터 할까요?”

    “네 그러시죠.”

    오자마자 급하게 일 얘기를 꺼내는 김용수 대사.

    일터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김용수 대사는 내가 없는 동안 어지간히 달리고 싶었던 것 같았다.

    비록 일주일이었지만 얼마나 답답해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장 셰프가 한국에 가기 전에 내가 말했던 거 기억나죠?”

    “재밌는 만찬 하나 계획하고 있으시다구요?”

    그땐 약속이 확정은 아니었는데 어제가 되어서야 정확한 대답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당장 3일 후에 그 만찬이 확정되었다고 했다.

    “당장 3일 후에요? 조금 급하네요.”

    “그렇죠? 중요한 일정이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래도 외교적으로 부담을 가질 만한 손님들은 아니니깐 맘 편히 먹어도 돼요.”

    그렇다곤 해도 음식을 대충 준비할 수는 없는 법.

    게다가 휴가까지 다녀왔으니 나도 이번 만찬에 좀 더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근데 누가 오나요?”

    “장 셰프 혹시 피겨 스케이팅 좋아해요?”

    김용수 대사의 입에서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곧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세계 선수권 대회.

    “몇 년 전에 취소됐던 피겨 세계 선수권 대회가 이번에 다시 열리는데 거기에 우리 한국 선수들이 참가해요. 응원도 할 겸 그 선수들이랑 감독님만 관저에 초대했으면 하는데.”

    “아하.”

    역시나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한 번 취소되었던 대회에 다시 참가하는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워 줌과 동시에 파나르 대사관이 이런 부분까지 관여를 한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한 만찬을 주최하기로 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세계적인 행사는 아니라 큰 영향력은 없을지언정 외교부 내에서 괜찮은 사례로 남기기엔 충분했다. 초대할 가치가 얼마든지 있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난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공항에서 그냥 떠나보냈던 임현아 선수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중요한 대회 때 이것저것 챙겨 주는 게 꽤 재밌었는데, 그 재미를 한참이나 잊고 지냈었다.

    얘기가 이렇게까지 흘러가니 이건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다시 임현아 선수의 덕질을 시작하라는 운명.

    이전처럼 그렇게 열심히 덕질을 할 순 없겠지만 그때의 기억이 온몸 구석구석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아직 국민 영웅이 되기 전이라 예전처럼 가까이서 얘기할 기회가 생긴 것도 좋았고.

    소위 슈퍼스타가 된 이후에도 현아는 여전히 날 반겨 줬었다. 하지만 그 사이엔 매니저나 소속사 등이 끼어서 예전처럼 지낼 순 없었고, 그렇게 덕질이 끝이 났다.

    “장 셰프는 양현경 선수라고 몰라요? 요즘 인기가 좋다던데.”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김용수 대사 역시 양현경 선수에 대해 먼저 묻는 걸 보니 나 말곤 모두가 양현경 선수가 가장 인기가 많고, 메달 가능성이 높은 선수로 알고 있다.

    “사실 나도 잘 모르는데 아직 어린 선수들이 여기까지 와서 나라를 대표하는 게 기특하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초대해서 맛있는 거나 먹게 해 주고 응원해 줍시다. 혹시 선수들 중에 메달이라도 따면 우리 대사관의 성과도 될 수 있는 거니까요.”

    몇 달 사이에 곰에서 여우가 되어 버린 듯한 김용수 대사였다.

    한 번 최우수 공관 타이틀을 달아 봐서 그런가. 성과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오히려 그런 김용수 대사의 태도가 훨씬 맘에 들었고.

    가능만 하다면 분기별로 뽑는 최우수 공관 타이틀을 전부 가져오고 싶은 맘이었다.

    “대사님 그러면 메뉴를 어떻게 계획해 볼까요?”

    “글쎄요. 선수단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양현경 선수도 아직 19살이라니깐 젊은 사람들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야겠죠?”

    “음….”

    “나는 그런 거 전혀 모르겠으니깐 이번엔 장 셰프가 원하는 대로 메뉴 짜 봐요. 전혀 관여하지 않을게요.”

    “저 맘대로요?”

    “네 어차피 잘하니깐 전적으로 믿고 맡길게요. 선수들은 여기 사는 사람들도 아니고, 대회만 끝나면 돌아갈 테니 그냥 좋아할 만한 음식들도 준비해도 좋을 것 같아요.”

    진짜 전적으로 믿어서 맡기는 건지 어린 애들 입맛은 짐작하기 어려우니 떠넘기는 건지 모르겠지만 메뉴 결정은 나한테 전부 맡기겠다는 김용수 대사였다. 아예 상의도 없이 전부 맡긴 적은 이번이 처음이긴 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준비 시간과 메뉴 구성이라는 미션을 남기고 김용수 대사는 관저를 떠났다.

    이젠 팬심을 잠시 묻어 두고 본업에 집중을 해야 할 때였다.

    뭘 만들어야 할까?

    10대의 선수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의 식습관을 생각하고 메뉴를 구성해야 했다.

    당장 며칠 후면 대회인데 마냥 비싸고,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차려 준다 해도 제대로 먹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건 나의 또 다른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었다.

    임현아 선수를 챙겨 주며 이것저것 얼마나 공부를 했었는데….

    떡이 없는 떡볶이는 물론이고, 글루텐 프리 디저트, 밥이 없는 김밥, 설탕 없이 만든 샐러드 드레싱 등등.

    이런 음식은 한번 배워 두니 나중에 결혼하고도 한샘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몸매 관리에 예민한 여자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으니까.

    옛날 기억들을 더듬어 가며 메뉴를 짜고 레시피도 생각해 냈다. 하다 보니깐 결국 현아 선수가 좋아했던 음식들 위주로 구성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다. 같은 피겨 선수들이니깐 성향은 비슷하겠지.

    베테랑답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내가 현아 선수에게 음식을 만들어 줄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거다. 설령 또다시 회귀를 한다 하더라도….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 음식들을 만찬에 올려도 될까?

    조금 어색할 것 같긴 한데….

    에라 모르겠다. 그래도 내 맘대로 하라고 했으니 한 코스 정도는 넣어도 되겠지.

    “그래서 요즘 젊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압도적으로 떡볶이란 말인 거죠?”

    “네 맞습니다. 대사님이 만찬 분위기만 조금 가볍게 만들어 주시면 대사관에서 만찬 메뉴로 떡볶이를 냈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분위기를 가볍게라… 알겠어요 좀 더 고민해 볼게요.”

    어차피 떡볶이는 10대 여자들이라면 모두가 좋아하고, 양배추와 깻잎이라면 한국 사람들은 크게 호불호가 갈리는 채소는 아니니 누군가를 편애한다는 느낌을 주진 않을 거다.

    지금은 임현아 선수가 이 떡볶이를 좋아하는지조차 모를 테니.

    그리고 만찬 메뉴로 떡볶이나 분식류를 선택했다는 것도 선수들의 몸 관리라는 명분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떡이 없는 떡볶이뿐만 아니라 밥이 없는 김밥, 튀기지 않고 구운 야채 스틱 등등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김떡튀를 만들 생각이었다.

    “메뉴는 특색 있고, 좋네요. 분식을 만찬으로 낸 대사관들은 없을 거예요 그쵸?”

    “그럴 겁니다 하하하.”

    “어쨌든 장 셰프는 음식에만 집중해요. 나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 방법에 대해서 고민할 테니까.”

    김용수 대사도 이번 만찬 성과에 평소와 다르게 욕심을 부리는 거 같았다. 치고 나간 김에 한 발자국 정도만 더 치고 나가겠다는 생각.

    그 생각에 나도 120% 동의하고 있었다.

    성과를 낼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 *

    3일 후 관저.

    “안녕하세요 감독님, 코치님 그리고 선수단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감독과 코치는 그래도 이런 분위기가 많이 어색해 보이진 않았지만 어린 선수들은 관저에 들어설 때부터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국제 대회에 여러 번 나갔다 하더라도 대사관이나 총영사관에서의 초대는 처음이었을 거다.

    특히 해외 대회는 처음인 막내 임현아 선수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도 모르는 듯한 표정.

    나중에는 대통령하고도 독대를 할 정도로 이런 자리가 편해질 텐데, 긴장하는 모습이 색다르게 보일 정도였다.

    “시차에 적응하시느라 피곤하시죠? 오늘은 그냥 가볍게 저녁이나 먹자고 모인 자리니깐 맘 편히 있으셔도 됩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원하시면 바닥에 누워서 진행해도 좋구요.”

    “하하하하.”

    김용수 대사의 가벼운 농담 덕에 선수들도 빠르게 긴장이 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분위기를 가볍게 해 달라는 내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시작부터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농담도 농담이지만 선수들의 긴장이 단번에 풀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나는 종종 김용수 대사의 파격적인 행보에 놀라곤 했다. 이미 한 번 퇴임을 했기에 이렇게 과감하게 생각을 할 수 있는 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하곤 했다.

    “겉옷은 저기 옷걸이에 걸거나 그냥 의자에 걸어 두시면 됩니다.”

    이번 만찬을 대비해 김용수 대사는 사전에 감독님과 협의한 게 하나 있었다.

    감독과 코치, 그리고 선수단 모두 트레이닝복을 입고 관저에 방문하기로.

    괜히 격식을 차린답시고 불편한 옷을 입고 오면 오히려 체하거나 컨디션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김용수 대사 역시 위아래로 트레이닝복을 입고 만찬을 진행했다. 깔끔하게는 입었지만 트레이닝복 덕에 만찬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 만찬은 성과도 중요했지만 선수단의 컨디션 유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거기에 중점을 두고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반가워요. 양현경 선수, 박지아 선수, 남호연 선수, 한상희 선수 그리고 임현아 선수.”

    “……!”

    김용수 대사는 선수들의 이름 한 명 한 명을 부르며 준비한 꽃다발을 하나씩 건넸다.

    막내인 임현아 선수는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김용수 대사에게 굉장히 놀란 눈치였다.

    나는 만찬 전에 선수단 중 막내가 가장 심적으로 부담을 가질 테니 좀 더 상냥하게 챙겨 주라는 말로 힌트를 건넸다.

    레전드가 될 임현아 선수에게 좀 더 신경을 쓰라는 의미였다.

    “임현아 선수. 여기까지 오는 데 힘들지 않았어요?”

    “네? 아니요. 감독님이랑 코치님 그리고 언니들이 잘해 주셔서 괜찮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이건 임현아 선수에게만 주는 선물이니깐 나중에 숙소 가서 언니들이랑 나눠 먹어요.”

    “감사합니다.”

    단체 선물로 준비한 초콜릿은 원래 최고참이고, 가장 인기 있는 양현경 선수에게 주려고 계획했지만 내가 막내에게 주면 모양새가 좀 더 좋을 거 같다고 말해서 계획이 변경되었다.

    “감사합니다. 대사님.”

    “여기까지 와 줘서 아저씨가 더 고마워요. 그러면 이제 식사할까요?”

    임현아 선수는 두 손 가득히 받은 선물이 맘에 드는지 폴짝폴짝 뛰듯이 식탁으로 향했다.

    피겨 선수답게 그냥 바닥에서도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그럼 먼저 샐러드부터 드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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