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45화 (46/202)

45. 열악한 환경

“몇 분이세요? 혼자세요?”

“네? 아… 저 타러 온 건 아니구요.”

덕수는 이런 곳에 와 본 게 처음이었다. 스케이트를 타러 온 건 아니었지만 들어가려면 입장권을 사야 된다는 말에 덜컥 돈을 내고 들어갔다.

그래도 신발까지는 빌리지 않고 얼음판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와아… 여기서 훈련을 한다고? 그냥 애들 노는 곳 아닌가.”

사실 덕수는 아이스 링크장을 보며 영업이 끝나면 얼음판이 선수 전용으로 싹 변하고 그럴 줄 알았다.

방금까지 수십 명의 어린애들이 놀고 간 얼음판 위에서 국가 대표들이 훈련을 할 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저 이제 영업 끝나서 일반 손님들은 나가셔야 하는데요?”

“아… 저는 그냥 손님이 아니라.”

덕수는 주섬주섬 준비해 온 플래카드를 살며시 보여 주었다. 직원은 훈련에 방해되지 않게 조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근처에 빌린 스케이팅 슈즈도 없는 걸 보니 난입하고 선수들을 방해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빙질이고, 뭐고 그런 게 중요하다던데 생각보다 별거 아닌가 보네.”

덕수는 이곳에 직접 오기 전에 피겨 스케이팅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했다. 필요한 장비는 뭐고, 피겨 선수들의 특성은 어떤지, 우리나라의 피겨 상황은 어떤지 등등

그러다 보니 경기 규칙이나 성적에 영향력을 주는 요소들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어! 나왔다.”

그래도 잠시 얼음의 표면을 다듬는 작업을 거친 후 선수들이 입장했다. 세계 선수권이라는 큰 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선수가 있는데도 열악한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어? 없네. 뭐지?”

한 명씩 얼음판 위로 올라오긴 했지만 10분이 다 되도록 선수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선수촌 식당에서 본 사람도 있었고, 새로운 얼굴도 보였지만 이번에 메달을 딴 양현경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덕수는 임현아 선수 때문에 여기 온 거긴 했지만 조금 의아했다.

“다른 스케줄이라도 있나…?”

덕수는 스마트폰에서 양현경 이름 세 글자를 검색하고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양현경 선수는 피겨 선진국이라는 일본으로 따로 전지훈련을 떠났다는 걸.

연봉이 높은 선수들이 사비를 들여 전지훈련을 떠나듯 양현경 선수도 사비를 들여 일본으로 훈련을 떠났다.

나머지 선수들은 아이스 링크장을 따로 빌릴 정도의 재력은 없으니, 좋은 성적을 내고도 그냥 일반 아이스 링크장으로 훈련을 오게 된 거고.

“진짜 너무들 하는구만.”

고르지 못한 얼음 때문인지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임현아 선수도 자주 넘어졌다. 프로 선수들은 넘어지는 게 익숙해서 아파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고통은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임현아 선수 항상 응원합니다.

훈련이 한창 진행되고 덕수는 조용히 가방에서 준비한 플래카드를 꺼냈다. 플래카드랄 것도 없이 그냥 스케치북에 글 몇 자 끄적인 게 전부였다.

플래카드를 들고 아무런 환호성도 하지 않고, 눈에 띌까 봐 동작도 조심하며 선수들의 훈련 장면을 지켜봤다.

나 말고도 양현경 선수를 응원하러 온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함께 훈련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금세 돌아갔다.

“에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하지도 못하고, 자기 말곤 응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갑자기 허무해졌다. 하지만 훈련이 끝날 동안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는 내리지 못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처음엔 동정심 때문에 임현아 선수에게 관심을 가진 게 맞다.

국가 대표인데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상황, 떡볶이 하나도 맘대로 먹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음에도 달라진 게 없는 협회의 지원.

호텔에서 보육원에 식사 봉사를 가는 것처럼, 처음에는 그런 맘으로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기 위해.

사실 내 처지가 누구를 응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런 교만한 맘으로 임현아 선수에게 관심을 가진 게 맞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임현아 선수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으니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넋을 놓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동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아무런 수식어도 필요 없이 집중하게 되는 임현아 선수의 연기였다.

“자 오늘 훈련은 여기서 끝이다. 스트레칭 제대로 하고 해산!”

“수고하셨습니다.”

“수~ 고~ 하~ 셨~ 습~ 니~ 다.”

선수들의 훈련이 끝나자 덕수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쳐 버렸다. 덕분에 임현아 선수는 물론이고, 모든 선수의 시선이 덕수를 향했다.

당황한 덕수는 서둘러 자리에 앉아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임현아 선수를 위해 준비한 플래카드는 제대로 접지 못했다.

“현아야 너도 팬이 생겼네. 훈련장에 팬 찾아온 거 처음 아니야?”

“에이 팬은 무슨 팬이에요. 그냥 언니들이랑 전부 응원해 주러 온 거겠죠.”

“저기 네 이름 세 글자 적힌 거 나만 보이냐? 신발 벗고 가서 연습한 사인이라도 한 장 해 주고 와. 우리는 팬들 한 명 한 명이 엄청 소중한 종목인 거 알지?”

“네 알겠습니다.”

임현아 선수는 쑥스러움에 덕수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비인기 종목에게 팬 한 명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선배들의 가르침에 팬 서비스를 해 주러 관중석으로 다가갔다.

마침 세계 선수권 대회가 끝나고 사인 요청이 종종 있을 테니 연습을 해 두라고 해서 해 두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임현아 선수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팬입니다.”

덕수 역시 이렇게 누군가를 응원해 주기 위해 찾아와 본 게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경기는 잘 봤다, 몸 상태는 좋냐, 어려운 점은 없냐 등등 물어볼 게 많았지만 두 사람은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멀뚱히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인해 드릴까요?”

“아 사인! 맞다 사인. 해 주세요.”

덕수는 가방에서 노트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준비해 온 선물 하나를 함께 건넸다.

임현아 선수는 새로 연습한 사인이 아직 어색한지 그림 그리듯 사인을 해 주었다.

“이거 마카롱인데 달콤한 거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고… 고맙습니다. 근데 저희는 이거 못 먹어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 맞다 이건 칼로리가 너무 높죠?”

임현아 선수는 미안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수는 호텔 파티시에에게 부탁해 마카롱 몇 개를 얻어서 여기로 왔다. 피겨 선수들이 평소에도 철처하게 몸 관리를 해야 한다는 걸 잠시 잊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다음에 올 땐 드실 수 있는 걸로 준비해 올게요. 제가 요리사거든요. 드시고 싶은 건 다 만들어 드릴게요.”

“네? 또 오시려구요?”

“네 팬이니까요.”

임현아 선수 역시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눈치였다.

“저는… 분식류는 다 좋아합니다. 떡볶이나 김밥 같은 거요.”

“맞다! 저번에 떡볶이 앞에서 한참 서 있었죠?”

덕수가 선수촌에서 한번 봤다고 말하자 임현아 선수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결국 빵 터지고 말았다.

“원래 채소랑 샐러드도 좋아하는데 그날은 유난히 떡볶이가 맛있어 보였거든요.”

“그거 제가 만든 거예요!”

“정말요?”

“네 얼마나 맛있었는데 운이 없으시네요.”

서로 공통 주제가 나오자 이제야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몇 분뿐이었지만 덕수는 팬이 되는 법을 그리고 임현아 선수는 팬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 익숙해졌다.

“그러면 다음에 또 올게요. 다음 훈련은 어디서 해요?”

“아직 몰라요 헤헤.”

웃으며 대답하고 있었지만 참으로 씁쓸한 대답이었다.

덕수가 훈련장도 대관해 주고 장비도 지원해 주고 그러진 못하겠지만 종종 찾아와서 응원해 주고 맛있는 거나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제가 알아서 찾아올게요. 못 찾으면 못 만나는 거죠 뭐.”

“하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제 팬이라는 사람이랑 대화해 본 적이 처음이라 재밌었습니다.”

“네 저도 누구를 응원해 본 적 처음이라 신기했습니다.”

그렇게 매번은 아니었지만 덕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현아의 훈련장과 대회를 찾아가 응원했다.

“야 장덕수. 너 갑자기 뭐 만드는 거냐? 퇴근 시간 다 됐잖아.”

“이거 떡볶이 좀 만들려구요.”

“떡볶이는 갑자기 왜? 그리고 주방에 떡 남은 거 없는데?”

“필요 없어요.”

“미친놈. 떡이 없는데 떡볶이를 어떻게 만드냐. 어쨌든 마무리 잘하고 퇴근해라.”

“네 알겠습니다.”

떡이 없이 떡볶이를 만든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떡볶이 양념에 다른 재료들을 넣는다는 게 맞을 거다.

그 후로 임현아 선수를 몇 번 찾아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원래 피겨를 시작하기 전엔 거의 매일매일 떡볶이를 즐겨 먹었는데 최근엔 제대로 된 떡볶이를 먹어 보지 못했다고 했다.

컵 떡볶이, 즉석 떡볶이, 짜장 떡볶이 등등 가리는 것 없이 다 좋아하는데 떡볶이는 하나같이 고칼로리 음식이라는 거.

피겨 선수들이 가장 피해야 할 음식들 중 하나였다.

“그러면 제가 특별한 떡볶이 만들어 오면 드셔 보실래요?”

“특별한 떡볶이요? 어떤 떡볶이든 다 안 될 거 같은데요….”

“일단 만들어 올게요. 감독님한테 물어보고 괜찮다 하면 종종 만들어 줄게요.”

“감독님이 괜찮다고 하시면야….”

덕수는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몸 관리에 철저한 선수들이 먹을 수 있는 떡볶이가 뭘지.

일단 떡볶이 재료 중 가장 칼로리가 높은 재료는 양념과 떡이었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빼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떡보단 양념이 더 중요할 것 같았다.

떡볶이를 먹을 때 떡보다 어묵을 좋아하거나 계란을 양념에 섞어 먹는 사람은 있어도 그냥 떡만 익혀 주면 그건 아예 떡볶이가 아니게 되니깐.

“채소들은 다 좋아한다 했으니깐 이렇게 해 보자.”

결국 떡을 빼고 피겨 선수들을 위한 특별한 떡볶이를 만들 수 있었다.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일단 맛은 보여 주고 싶었다. 떡이 없으니 포장을 해 가도 불진 않을 거다.

“안녕하세요 임현아 선수.”

“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되게 일찍 오셨네요?”

“이거 주려구요.”

“뭐에요?”

“저번에 말한 떡볶이요. 감독님한테 여쭤보고 괜찮다 하면 먹고 훈련 시작해요.”

덕수는 일반적인 떡볶이 양념에다 양배추와 깻잎을 잔뜩 넣고, 칼로리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곤약 몇 조각을 넣어 현아만을 위한 떡볶이를 만들어 왔다. 곤약도 뺄까 했지만 그래도 씹는 맛이 하나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감독님이 이건 먹어도 될 것 같대요!!”

“정말요?”

“네 원래도 양배추는 몸을 가볍게 해 주고, 깻잎은 다이어트에 좋으니깐 선수들이 먹기에 좋은 음식 같대요.”

“오! 다행이다. 그러면 제가 다음에 많이 만들어 올게요. 오늘은 현아 선수 혼자만 먹어요.”

아무리 칼로리가 적다 해도 매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현아는 덕수에게 대회 전날이나 힘든 훈련 정도 때만 한 번씩 해 줘도 충분하다고 말해 주었다.

안 그랬다가 매일 만들어 올 기세였으니까.

* * *

동계 전국체전 전날.

“현아야 이번에는 좀 넉넉하게 만들었으니깐 선수들이랑 나눠 먹어. 내일은 그냥 응원만 하러 갈게.”

“네 항상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서 이런 것도 만들어 주시구요.”

두 사람은 어느새 말까지 편하게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덕수가 만들어 온 떡볶이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제법 인기 있는 음식이 되었고, 영양적으로나 맛으로나 훌륭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맘 같아선 장비도 턱턱 지원해 주고, 아이스 링크장도 대관해 주고 싶은데 그 정도는 안 되네. 그냥 요리사니깐 소소하게 떡볶이나 만들어 주고 열심히 응원할게. 목청은 멀쩡하거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헤헤.”

대회 전날 덕수의 떡볶이를 먹는 현아는 전국 체전에서 중등부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5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이건 현아의 공식 대회 첫 수상이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었지만 이번 수상을 시작으로 긴 전성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현아야! 축하해. 대박이다 진짜.”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 짧은 다리로 쭉쭉 뻗을 수 있지?”

“짧다니요! 아직 성장기가 안 끝나서 그렇거든요?”

비록 국내 대회지만 1등을 했다는 건 현아에게 큰 성과였다. 물론 응원하는 덕수에게도 의미 있는 날인 건 마찬가지.

“대회 전날에 배탈이라도 날까 봐 항상 먹는 걸 조심하거든요. 그래서 대회 때는 기본적으로 힘이 없어요.”

“그래 보이더라.”

“근데 이번엔 오빠가 만들어 주신 떡볶이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어요. 이건 오빠 덕분에 딴 메달이에요.”

“오… 빠? 그냥 삼촌이라 해도 되는데.”

“그렇게 나이 많지도 않잖아요. 근데 무슨 삼촌이에요.”

덕수는 그 말을 듣자 울컥할 뻔한 걸 겨우 참고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 가수나 연예인들을 덕질하고, 좋아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제 내 선수가 국제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낼 때까지 목이 터져라 응원해 줄 차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