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44화 (45/202)

44. 첫 만남

임현아 선수.

설마 이런 곳에서 나의 스타를 만나게 될 줄이야.

데뷔 후 은퇴를 할 때까지 거의 10년 동안을 쫓아다녔는데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다니.

그땐 임현아 선수도 나를 알아볼 정도로 자주 마주쳤는데 그것도 이미 20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임현아 선수의 실물을 본 게 20대 중반 때의 모습이니, 앳된 지금의 얼굴을 못 알아본 게 어쩌면 당연했을 수도….

하지만 괜히 죄책감이 느껴졌다.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돼?”

“주방장님 저 사인 좀 받고 올게요.”

임현아 선수를 보고 이성을 잃은 나는 인터뷰가 끝날 때를 기다렸다가 선수단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면 임현아 선수가 반갑다며 알은체를 해 줄 것만 같았다. 스케줄이 바빠져서 서서히 멀어지기 전까진 정말 동네 오빠 동생 같은 사이였으니까.

“덕수야 잠깐만.”

“잠시만요 주방장님 빨리 가서 인사만 하고 올게요.”

“야 인마. 가지 말라고.”

뒤통수에서 주방장님이 소리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방장님은 내 손목을 꽉 쥐고 있었다.

“왜요. 사인 딱 한 장만 받을게요.”

“대회 앞두고 선수들 예민할 텐데 방해되니깐 가지 말라고. 나도 참고 있으니깐 내 말 들어라.”

주방장님은 진정한 스포츠 팬이었다.

피겨는 잘 몰랐지만 대회를 앞두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니 선수들을 귀찮게 하지 말라 했다.

아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잠시만.

임현아 선수까지 참가하는 대회라면 혹시 세계 선수권 대회를 말하는 건가?

세계 대회는 첫 출전이라 아무 메달도 따지 못하지만 꽤 괜찮은 성적을 냈었다.

내가 임현아 선수의 팬이 된 계기가 그 대회 이후였는데 기억이 맞다면 그 대회가 열리는 곳이 아마 그곳일 것이다.

“근데 주방장님 이번에 세계 선수권 대회가 열리는 나라가 어디죠?”

주방장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마치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동공이 커졌다.

“맞다 파나르다 파나르. 이번 세계 선수권 대회가 열리는 곳이. 이게 왜 이제야 생각났지?”

“맞죠?”

“원래 2년 전에 열렸어야 할 대회가 내전 때문에 취소가 되었거든. 그래서 이번에 다시 파나르에서 열린다고 하더라. 내가 이 뉴스를 왜 기억하냐면 너 때문이야.”

취소되었던 세계 선수권 대회가 다시 파나르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듣고 가장 먼저 나를 떠올렸다는 주방장님.

“저거 듣고 파나르도 이제 살 만해졌구나 싶었지. 사실 좀 걱정했었거든.”

“그랬구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그러면 저 사람들도 6시 비행기 타는 거 아니냐?”

“오?! 그렇겠네요.”

파나르에서 열리는 피겨 스케이팅 세계 선수권 대회.

거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나와 비슷한 시간에 공항에 도착.

오늘 파나르로 출발하는 비행기는 딱 한 대.

전세기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면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는 게 확실했다.

“대박이다 덕수야 선수들이랑 진짜 같은 비행기인가 봐.”

“그러게요. 완전 대박이네요.”

“이번 대회 직관하면 되겠다. 네가 있는 도시랑 가깝지?”

“네 아마 같은 도시일 거예요.”

주방장님의 말대로 나는 피겨 선수들과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임현아 선수는 어릴 때 고소 공포증이 있어서 비행기를 타는 것도 어렵다고 했는데, 컨디션 유지나 제대로 할 수 있을는지.

멀리서 보니 그냥 안대를 쓰고 자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방해가 될까 봐 최대한 신경을 안 쓰려고 했는데, 자꾸 눈길이 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저러니 대회에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수 없었겠지.

조금만 컨디션 조절을 잘했다면 세계 선수권 대회 사상 첫 메달은 양현경 선수가 아니라 임현아 선수의 차지였을 것이다.

“우리 비행기는 파나르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파나르 공항에 내려서도 요동치는 맘을 억지로 부여잡고, 겨우 선수들을 외면했다.

지금 알은척을 하는 것보다 예전처럼 조용히 찾아가서 응원을 해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티켓 정도는 대사님에게 부탁하면 구할 수 있겠지?

커다랗게 이름을 쓴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 가는 걸 좋아했었으니깐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봐야겠다.

* * *

서울 H호텔.

“덕수야! 다 챙겼냐? 가자.”

“네 선배님. 바로 나가겠습니다.”

선배 두 명과 덕수는 오늘부터 며칠 동안 외근을 가게 되었다. 호텔을 운영하는 그룹에서 국가 대표 선수촌의 식당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부족한 인원 지원을 호텔에다 요청했다.

주방장급까진 갈 필요는 없었고, 중간급 두 명 그리고 심부름을 할 막내 한 명이 가게 되었다.

“덕수야 너 뭐 좋아하는 스포츠 같은 거 있냐?”

“저요? 스포츠는 전혀 관심 없습니다.”

“재미없는 놈. 나는 이번에 가면 축구 선수들 사인 전부 받을 거다.”

“저는 배구요.”

선배 두 명은 유명한 선수들을 만날 수 있단 생각이 신이나 있었다. 반면 덕수는 그냥 빨리 끝내고 호텔로 돌아가고 싶은 맘뿐이었다.

그곳엔 덕수가 관심 있는 선수도 아는 선수도 전혀 없었으니까.

“아이 장덕수! 거기 샌드위치엔 햄 말고 닭가슴살 넣으라고 했잖아.”

“방금 만들 땐 햄 넣었잖아요.”

“이거는 복싱 선수들이 먹을 거란 말이야.”

“뭐가 달라요?”

“전부! 모든 게 다르지 인마. 사용하는 재료도 마실 것도 종목별로 다 다르게 만들어야 해.”

절로 한숨이 나왔다.

국가 대표들이라 그런지 종목별로 먹는 메뉴도 먹는 시간도 전부 달랐다.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는 덕수는 음식을 어떻게 구분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헷갈려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지만 식사 시간은 어찌어찌 지나가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종목별로 특별식 배식이 끝난 후엔 섬세한 식단 관리가 필요 없는 선수들의 일반식이 시작되었다.

근데 지금 들어오는 선수들은 전부 말라서 뼈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그냥 일반식을 먹어도 될까?

몇 시간 근무하다 보니 선수들의 몸만 봐도 식단 관리가 필요한 종목인지 아닌지 정도는 감으로 알 수 있었다.

“휴우… 오늘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건 거의 없네.”

“그러게요. 항상 이런 식이지 뭐.”

“기대를 안 하면 실망도 없답니다 선배님들.^^”

선수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일상이라는 듯 소스도 없이 샐러드만 식판 한쪽에 담아서 자리에 앉았다.

선수 중 막내로 보이는 한 어린 선수는 샐러드가 먹기 싫은지 배식대 주변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임현아 뭐 해. 그렇게 열심히 봐 봤자 어차피 못 먹어. 포기하고 빨리 와서 풀떼기나 먹자.”

“네 알겠습니다.”

임현아라는 어린 선수는 뒤를 돌아설 때까지 배식대의 분식 코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떡볶이를 중심으로.

그래 한창 떡볶이를 좋아할 나이지. 몸 관리 때문에 좋아하는 음식도 먹지 못하는 삶이 얼마나 고달플까.

“불쌍하네.”

그런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덕수는 떡볶이 하나를 날름 집어 먹었다. 이렇게 쉬운 일인데….

“근데 선배님. 저 선수들도 체중 관리 같은 거 하는 사람들 같은데 아까 특별식 때 왜 안 왔을까요?”

“아아 저 선수들? 피겨 스케이팅 선수단인데 비인기 종목이라… 지원이 잘 안 나와.”

“엥? 선수촌 안에서도 그런 게 있어요?”

“최대한 배려해 주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맨파워가 약하다고 해야 할까… 암묵적으로 그런 게 있지. 너도 아까 봤잖아, 특별식으로 전 종목 챙기려면 우리가 죽어날걸?”

인기가 없어서 남들 다 먹는 특별식도 신청하지 못했다니. 그 어떤 종목보다 특별식이 필요한 종목 같은데….

프로 선수라는 게 원래 돈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거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게 억울하면 눈에 띄는 성과를 내면 된다고 하는데 말처럼 쉬운 거면 누구나 했겠지.

“그러면 저 선수들 유니폼도 제각각인 이유도?”

“응 맞을 거야. 아마 저것도 사비로 구매해서 입은 걸걸.”

단체복도 지원되지 않아 운동복도 사비로 구매했다는 피겨 선수들은 선수단끼리도 차이가 났다.

아까 떡볶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어린 선수는 사이즈도 제대로 안 맞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저래 가지고 제대로 훈련이 되나….”

“그렇게 안쓰러우면 덕수 네가 지원 좀 해 주든가.”

“제 코도 석 자인데 무슨 수로 지원을 해 줘요. 추리닝이나 장비 같은 거 엄청 비쌀 텐데.”

“당연히 비싸지. 그러면 네가 제일 잘하는 음식 같은 거 해 주면 되겠네.”

덕수는 선배의 농담에 대수롭지 않은 듯 그냥 웃어넘겼다. 하루 종일 주방에 붙어 있느라 시간도 없고, 월급은 쥐꼬리만 하니 누굴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한 종목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됐다는 거 자체가 자신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는 요리라는 종목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할 정도의 실력을 가질 수 있으려나. 아까 그 학생은 나보다 한참 어린 거 같은데 벌써 국가 대표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덕수보다 훨씬 나은 삶은 살고 있었다. 그 어린 학생은 허름한 추리닝이지만 가슴팍엔 태극 마크를 달고 있었다. 덕수가 더 나은 점은 떡볶이를 쉽게 먹을 수 있다는 것 정도?

덕수도 선수들처럼 언젠가는 태극 마크가 달린 새하얀 조리복를 입고 일해 보는 게 꿈이었다.

* * *

“오늘의 뉴스입니다. 파나르에서 열리는 피겨 스케이팅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리나라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이 큰일을 해냈습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특파원 연결하겠습니다.”

덕수는 일을 마치고 기숙사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있었는데 자정 뉴스에서 반가운 단어가 들려왔다.

피겨 스케이팅.

얼마 전에 선수촌에서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허름한 추리닝을 입은 그 학생이 떠올랐다.

그래도 한번 얼굴을 봐서 그런지 반가워서 뉴스에 집중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 중 양현경 선수가 동메달이라는 역사적인 성과를 이뤄 냈고, 그 밖에도 유망주 임현아 선수가 깜짝 5위를 기록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뉴스엔 양현경 선수의 연기가 수십 번 반복된 다음 마지막에 임현아 선수의 얼굴이 잠시 비쳤다.

이름은 잊고 있었는데 떡볶이 앞에서 서성거릴 때 선수들이 ‘임현아’라고 부른 것이 번뜩 생각이 났다.

‘저 선수 이름이 임현아구나.’

힘도 없고, 훈련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했었는데, 그래도 좋은 성적을 내긴 냈구나 싶어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특히 임현아 선수는 스케이팅을 할 개인 슈즈도 하나 없이 매번 빌려서 훈련을 해 왔다는데,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이뤄 낸 엄청난 성과입니다.”

뉴스는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저런 상황에서 대회를 치렀다는 게 기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임현아 선수의 상황은 열악했다.

“아무리 그래도 개인 장비도 없이 대회를 나가는 게 말이 돼요?”

덕수는 자기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언성을 높여 버렸다.

“워워 진정해 장덕수.”

“아니 그러면 재능이라도 없든가. 저 상황에서도 세계 5위라니. 진짜 실력이 아깝잖아요.”

“그래도 저 동메달 딴 양현경 선수 집에서 빵빵하게 지원을 해 주는데 덕분에 임현아 선수도 껴서 훈련하고 한다더라.”

“협회에서 할 일들을 선수들이 하고 있네요.”

덕수는 살면서 특정 스포츠나 어떤 사람에게 팬으로서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임현아 선수는 경기 장면을 실제로 한번 보고 싶어졌다.

한 분야에서 나라를 대표할 정도의 실력이 되고, 세계 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정도라면 얼마나 훈련을 혹독하게 하는지도 궁금했다.

집에서 지원을 빵빵하게 받는 양현경 선수 쪽보다 임현아 선수 쪽이 자신과 비슷한 유일 거란 직감이 들어 더 끌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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