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43화 (44/202)
  • 43. 설마

    “야 이한샘.”

    “응 덕수야. 오늘도 수고 많았어.”

    “자 받아.”

    짧은 일주일이었지만 어느새 우리는 말도 편하게 하는 사이가 되었고, 나는 약속대로 하루도 빠짐없이 김밥을 챙겨줬다.

    처음에는 그냥 그 김밥이 맛있어서 좋아했던 한샘이었지만 이제는 하루도 빠짐없이 자기를 챙겨 주는 모습에 감동한 거 같았다.

    “이게 마지막 김밥이야.”

    “진짜?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응 나 이제 내일 다시 파나르로 돌아가.”

    “아… 그렇구나. 시간 되게 빠르네.”

    그래 참 빠르지.

    호텔에서의 일주일은 말 그대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일을 할 땐 틈날 때마다 한샘과 잡담을 나누느라 시간이 빨리 지나갔고, 퇴근 후에는 주방장님이나 선배님들과 기숙사에서 야구, 농구 그리고 새벽 축구까지 보다 보니 24시간이 모자랐다.

    어쩌다 보니 한국까지 휴가를 와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을 했다. 하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 가족을 만나고 시간을 보낸 것처럼 기분이 편하고 상쾌했다.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한샘이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했고.

    주방장님은 말할 것도 없이 완벽하게 내 편이 되어 주셨다.

    “한샘아.”

    “응?”

    “나 파나르에서 3년만 일하면 되거든? 근데 벌써 6개월 넘게 일했어.”

    다시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거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할 거면서 사귀자는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부터 매일매일 한샘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거 같았다.

    한샘이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강한 기억 하나쯤은 남겨 주고 가야 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오면 예전처럼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고 나의 사랑스러운 딸과 손자까지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청와대에서 요리하는 한국 최고의 요리사가 되고 싶어.”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말을 했지만 듣고 있는 한샘의 표정은 그때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그때보다 훨씬 가까워졌으니 적어도 이런 포부를 가지고 있는 남자라는 것 정도는 말해 줘도 되겠지.

    “돌아올 때까지만 내 이름 기억해 줘. 그 후론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될게.”

    “…….”

    하지만 한샘은 이번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일주일 동안 많이 가까워졌다 생각했는데… 그렇다 해도 너무 성급했던 건가.

    다시 한번 화제를 바꾸려는 찰나 한샘이 입을 열었다.

    “응 그럴게.”

    “뭐? 뭐라고?”

    “기억한다고 장덕수라는 이름. 2년 6개월이면 되지?”

    “응응 정말이지?”

    자세한 속맘까진 모르겠지만 대답을 듣고 일단 뛸 듯이 기뻤다.

    저번처럼 당황하거나 불쾌해하는 표정이 아닌 것 보면 작전이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나도 덕수 네가 참 좋아. 꼭 청와대 요리사나 더 유명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장덕수라는 이름은 꼭 기억할게. 너도 내 이름 기억해 줄 거지?”

    “당연하지! 이한샘 꼭 기억할게.”

    한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그냥 누가 옆에서 새치기해서 대답할 것 같아서.

    그 정도로 나는 한샘의 마음을 얻는 게 절실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몸까지 가까이 있어 주진 못한다. 그러니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이 조금이라도 통했다는 걸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

    “남들은 오고 싶어도 못 들어오는 이 호텔에서 오래오래 일해 줘. 한국 올 때 연락 없이 여기로 찾아올 테니까.”

    “걱정 마. 잘리는 일 아니면 내가 먼저 그만둘 리는 없어. 남들은 오고 싶어도 난리인 이 호텔을 내가 왜 그만두겠어?”

    별것도 아닌 말에 우리 둘은 원 없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 곧 잠시 동안 이별을 해야 하지만….

    나는 회귀라는 말도 안 되는 큰 행운을 얻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 생에도 한샘이라는 행운이 나에게 올지는 모르겠다.

    분명 욕심이겠지만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과분한 욕심이라면 두 배, 아니 세 배로 더 노력하면 되지. 이제 나에겐 그런 실력도 시간도 체력도 넘치니까.

    두 번째 삶에선 나의 꿈과 한샘을 전부 얻기 위해 모든 걸 바칠 생각이었다.

    * * *

    다음 날 인천공항.

    “공항까지 마중 나와 주실 필요는 없는데… 감사합니다 주방장님.”

    “무슨 소리냐 인마. 공항까지 가는 버스비 정도는 아끼게 해 줘야지. 휴가까지 와 놓고 일이나 잔뜩 시켜서 맘에 걸리는구만.”

    “에이 제가 원해서 한 건데요 뭐. 덕분에 휴가 재밌게 보냈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아무리 신경 쓰지 말라 해도 주방장님의 표정은 시원해 보이진 않았다. 내가 원해서 한 일이었다 해도 휴가 때 일을 시켰다는 사실이 영 맘에 걸리는 모양.

    그것 덕분에 나는 진정한 힐링을 하고 돌아가는데… 아니었다면 그냥 숙소에서 티브이나 보다 돌아갔을 것이다.

    어차피 말해 봤자 이 감정은 나만 알 수 있는 것 같다. 누가 뭐라 하든 나만 좋으면 됐지 뭐.

    나는 이번 한국 휴가를 알차게 보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의미 있는 일도 많았고.

    “그래. 조심히 돌아가고 이거라도 받아라. 그래야 내 맘이 편할 것 같다 덕수야.”

    “예? 이게 뭐예요.”

    주방장님은 내 주머니에 하얀 봉투 하나를 구겨 넣었다. 조금 놀랐지만 이렇게라도 맘에 편해진다면 능글맞게 받아 주는 게 오히려 좋을 거다.

    내가 주방장님의 입장이었어도 뭐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었을 테니까.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인마. 오랜만에 맘에 들게 행동하네. 어른이 주는 건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 거지.”

    그렇게 치면 나도 어른인데.

    여하튼 이번 기회에 주방장님에 대한 내 감정도 더욱 짙어졌다는 걸 느꼈다. 이제 직장 동료 이상의 관계.

    나중에 진짜 청와대 요리사가 된다면 그 공을 이 주방장님께 일부라도 돌리고 싶었다.

    “한국에서 원하는 건 다 하고 가는 거지? 그 여자분하고도?”

    일주일 동안 기숙사에서 합숙하다시피 함께 지냈던 주방장님껜 한샘에 대해 내 감정을 전부 이야기해 주었다.

    덕분에 한샘과 근무 시간이 거의 겹치도록 일을 할 수 있었고.

    한국에서 원하는 걸 다 했냐는 말에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안심한다는 주방장님의 표정.

    주방장님이 주신 하얀 봉투에는 빳빳한 100달러가 들어 있었다. 파나르에서 한국 돈이 환전하기 어렵다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사소한 거까지 신경 쓸 줄 아는 멋있는 어른이었다. 나도 후배들에게 이런 멋진 주방장이었을까.

    괜히 나까지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래 나는 이제 갈 테니 도착하면 연락해라.”

    “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주방장님과 인사를 마치고 뒤돌아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나와 주방장님은 동시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멀지 않은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는 걸 발견했다.

    “뭐지? 연예인인가?”

    “그러게요. 아직 시간 좀 남았는데 구경 가 보실래요?”

    “에이 됐다. 뭐 하러. 애도 아니고.”

    “그러지 말고 가 보시죠. 별일 아니면 거기서 바로 인사하면 되죠.”

    나는 주방장님과 5분이라도 더 잡담을 나누고 싶었다. 저기에 톱스타가 있다 해도 나에겐 크게 중요하진 않았지만 억지로 주방장님을 끌고 그곳으로 갔다.

    “뭐 인터뷰 같은 거 하나 봐요. 연예인들은 아닌 거 같고 누구지? 운동선수인가?”

    무슨 인터뷰를 하는 것 같았는데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도 않았다. 단체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걸 봐서 스포츠 팀인 것 같았다.

    “어? 저 사람 양현경 선수다!”

    “누구요? 양현경?”

    “그래 피겨 스케이팅 양현경 선수.”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말에 내 고개는 본능적으로 선수들을 향했다.

    우리 주방장님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최고의 스포츠광이었다. 관심이 없는 스포츠가 없을 정도로 모든 종목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반면 나는 스포츠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아는 선수도 그나마 관심 있는 축구 중에 박지성이나 손흥민 정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피겨 스케이팅 선수 한 명을 몇 년간 미친 듯이 덕질한 적이 있다.

    덕질이라는 표현까지 쓰는 이유는 살면서 요리 말곤 그렇게 뭔가에 집착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 어찌나 푹 빠져 살았는지 스케줄도 미뤄 가며 경기장도 찾아가고, 매번 바뀌는 훈련장도 찾아다녔다.

    나도 처음엔 적당히 이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은 맘이 생기더라. 단순히 피겨만 잘해서 좋아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요새 양현경 선수가 제일 인기 있지 아마?”

    “무슨 소리예요… 피겨 스케이팅 하면 임현아 선수죠.”

    “누구? 임현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아직은 임현아 선수가 두각을 드러내기 전이니 나의 내 덕질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다.

    본격적으로 팬심이 발휘되고 나서부터는 호텔에 스케줄을 바꿔 달라고 몇 번이나 졸랐었다. 주방장님은 가끔 진심으로 짜증을 내기도 했다. 적당히 좀 하라며.

    “양현경 선수가 최고긴 하죠 지금은.”

    “저 양현경 선수가 이번에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메달을 딸 가능성이 제일 높다더라. 그래서 요즘 완전히 주목받고 있어.”

    “그렇군요.”

    양현경 선수도 대한민국 피겨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 맞긴 하다.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사상 첫 동메달을 따내니까.

    하지만 임현아 선수는 양현경 선수에 이어 다음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따 버리고, 세계 피겨사에 한 획을 그은 선수가 되어 버린다. 마치 주유와 공명과 같은 사이라고 해야 할까?

    둘 다 훌륭한 선수였지만 양현경 선수는 임현아 선수보다 절실한 스토리가 부족했다. 혼자서 커다란 아이스 링크장을 빌려서 훈련할 수 있을 정도로 재력이 있었으니까.

    인성 자체는 훌륭했지만 모진 상황을 전부 이겨 내고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임현아 선수의 스토리를 누군들 싫어할 수 있을까.

    나도 그때 처음으로 임현아 선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알면 알수록 정말 대단한 사람이란 걸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근데 주방장님 기왕이면 우리 임현아 선수도 기억해 주세요.”

    “누구? 우리 임현아?”

    “네… 뭐 유망주 중의 한 명입니다.”

    “사실 피겨 스케이팅까지는 그렇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냥 요새 스포츠 뉴스에 종종 나오길래 몇 번 본 거뿐이야.”

    나도 모르게 ‘우리 임현아’ 선수라고 말해 버렸다. 덕질은 이미 20여 년 전에 접었지만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나 보다.

    “우리 좀만 더 가까이 가 보죠.”

    나는 침대 밑에서 우연히 옛날 사진첩을 찾은 것처럼 추억 속에 푹 빠져 버렸다.

    비록 임현아 선수는 없지만 내 청춘의 반을 요리에 바쳤고, 또 반은 피겨 스케이팅을 응원하는 데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 근데 저 사람.”

    “뭐야 왜? 아는 사람이라도 봤어?”

    “음… 저기 제일 왼쪽 선수 낯이 익은 거 같아서요.”

    “제일 왼쪽? 선수들 말하는 거야?”

    기껏해야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저 사람도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피겨 스케이팅 선수 중 한 명 같았다.

    분명 저 이목구비 분명 낯이 익는데….

    얼굴을 보기 위해 다가갔던 양현경 선수보다 더 낯익은 저 선수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저 정도로 어린 거 보면 아직 유망주 그런 건가 보다. 경험 삼아 이번 선수권 대회도 데려가는 건가 봐.”

    “그런가? 설마…? 아니겠지.”

    “유망주면 아까 네가 말한 임현아 선수? 그 사람 아니냐?”

    현재 가장 인기가 많다는 양현경 선수의 긴 인터뷰가 끝이 나자 나머지 선수들도 한 명씩 짧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거의 자기소개를 포함해 30초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인터뷰였지만 나는 거기서 내 선수의 이름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말도 안 돼.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중학교 2학년 임현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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