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42화 (43/202)
  • 42. 조금 특별한 김밥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꼭 전해 주고 싶었다. 날 위한 회식에 조금 늦더라도.

    한샘은 분명 이 시간에 일을 마치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것이다.

    밤에 맵고 짜고, 뜨거운 거 먹으면 장에 안 좋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잘 고쳐지지 않았었다. 그러니 나이 들어서 위장병으로 고생을 하게 되지.

    이 음식을 만들어 주기 전까지는 계속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곤 했었다.

    “어차피 선배님들 샤워하고 갈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그럼 그 시간이면 됩니다. 저는 어차피 늦게 와서 샤워 안 할 거거든요. 최대한 빨리하고 갈게요.”

    “뭔진 몰라도 그래라.”

    선배들 몇몇은 피곤한지 별 관심 없이 샤워장으로 향했다. 주방장님은 그래도 마지막으로 주방을 마감해야 하니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김밥 하나만 빨리 만들게요.”

    “김밥? 재료도 없을 건데? 갑자기 김밥은 왜? 네가 먹으려고?”

    “있는 재료면 충분합니다. 제가 먹을 건 아니구요.”

    내가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부탁하자 주방장님은 이유를 눈치챈 것 같았다. 아까도 여자 만나러 가냐고 묻는 질문에 그냥 웃어넘겼으니 이 정도면 눈치챘겠지.

    “그럼 뭐 뭐 쓸 건데? 알고는 있어야지 재료 뭐 썼는지.”

    “남은 밥이랑 잡채에 쓰고 남은 돼지고기, 그리고 김치 좀만 쓸게요. 김밥용 김 몇 장하고요.”

    “재료가 왜 그래? 김밥 만든다며.”

    “네. 김밥 만들 겁니다.”

    조금 특별한 김밥을 만들 거다. 한샘이 좋아하는 김밥은 그냥 단무지나 계란이 들어간 김밥이 아니었다.

    이 김밥 2줄이어야만 집에 가서 라면 대신 이걸 먹을 거다. 다른 김밥은 한 줄도 제대로 먹지 않고 남길 게 뻔했다.

    “여튼 알아서 마무리하고 나와라. 김밥 만들고, 불 끄고 정리하는 데까지 15분 준다. 알겠지? 늦으면 회식 네가 쏘는 거다.”

    “15분이요? 넉넉합니다. 걱정 마십쇼!”

    주방장님은 흐뭇하게 웃으며 샤워장으로 향했다.

    재료도 다 준비되어 있으니 15분 만에 김밥을 싸는 건 일도 아니지.

    게다가 내가 만들 김밥은 재료도 2가지밖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먼저 잡채에 들어간 돼지고기는 이미 불고기 양념에 한번 절였다가 익힌 고기였다.

    그 남은 돼지고기랑 묵은지를 씻어서 준비해 놓고, 밥에는 소금과 참기름으로만 간을 해 준비해 둔다.

    이거면 재료 준비 끝.

    서둘러 김밥을 말기만 하면 된다.

    간장에 절인 돼지고기와 씻은 묵은지만 들어간 김밥.

    이게 한샘이 제일 좋아했던 제주도식 김밥이다.

    제주도 전역에서 먹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주도가 고향인 한샘이 어릴 적부터 자주 먹는 김밥이라고 했다.

    연애하고도 한참이나 지나서 김밥 레시피를 알게 되었는데 이 김밥은 내 입맛에도 딱 맞아 늦은 저녁밥을 먹을 때나 같이 놀러 갈 땐 항상 이 김밥을 만들어 가져갔다.

    서둘러 만든 김밥 두 줄을 포일에 감싸고 주방의 불을 끈 뒤 탈의실 앞으로 향했다.

    한샘도 이제 곧 옷을 갈아입고 퇴근을 할 시간이었다.

    “어? 덕수 씨 또 보네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한샘 씨도 수고 많았어요. 오늘 많이 바빴죠?”

    “아니요. 오늘은 800명치곤 수월했던 것 같아요. 주방이랑 호흡도 잘 맞았고. 오랜만에 덕수 씨가 있어서 그런가?”

    “아마도요?”

    “호호호.”

    내 농담에는 유난히 잘 웃어 주던 한샘이었다.

    수월했다곤 하지만 800명이라는 단체 손님이 쉬울 리가 없지. 한샘은 웃고 있었지만 피곤한 표정이었다.

    “배 안 고프세요?”

    “저요? 배고프죠. 집에 가서 뭐 라면이나 끓여 먹고 자야죠.”

    나는 자연스럽게 김밥을 건네기 위해 먼저 스몰 토크를 건넸다.

    예상대로 배가 고프지만 피곤해서 뭘 만들어 먹을 힘은 없고, 간단하게 라면이나 끓여 먹고 잔다는 한샘.

    준비는 제대로 된 것 같았다.

    “한샘 씨. 그럼 이거 좀 드셔 보실래요?”

    “뭐에요?”

    “행사하고 남은 재료들로 만든 건데 하다 보니 많이 만들어서요.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거든요.”

    “어? 김밥이네요?”

    길쭉하게 포일로 싸여 있는 것만 봐도 바로 김밥인지 눈치채는 한샘이었다.

    그렇지만 그걸 그 자리에서 열어 볼 줄은 몰랐다.

    “좀 이따가 집에서 드시지.”

    “배고파요. 그리고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때 먹고 싶어서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한샘은 포일을 까자마자 김밥 두 개를 입에다 넣었다. 그냥 김밥은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엄청 배가 고팠나 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김밥의 정체를 빨리 알아채 주길 바랐다.

    “어? 이거 무슨 김밥이에요?”

    “왜요? 입맛에 안 맞아요? 좀 특이하죠?”

    “아니 그게 아니라 입맛에 너무 잘 맞아서요. 이거 우리 가족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김밥인데?”

    “아닌데? 이 김밥 나도 되게 좋아하는데요?”

    나는 의아해하는 한샘의 질문에 웃음을 참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살면서 이 김밥을 알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한샘.

    나도 당신이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는 김밥이었다.

    “이거 제주도 여행 갔을 때 어떤 식당 이모한테서 얻어먹은 적 있어요. 그때 너무 맛있게 먹어서 종종 해 먹어요.”

    “오! 제주도. 맞아요 제 고향이 제주도예요. 어쩐지.”

    나는 모르는 척 제주도에서 먹어 봤다고 능청을 떨었다. 한샘은 내 입에서 고향이 나오자 반가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이 김밥을 알고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 맛을 그대로 재현해 낸 내가 더 신기하다고 했다.

    “근데 한번 맛보고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만들 수 있어요? 울 엄마가 만드는 거랑 완전 똑같은데?”

    “재료가 간단하잖아요. 돼지고기랑 묵은지.”

    “그렇긴 해도 난 아무리 만들어도 이 맛이 안 나던데.”

    나도 처음에는 이 맛을 찾느라 고생 좀 했었다.

    호텔에서 요리한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김밥 맛 하나도 낼 줄 모르냐고 핀잔을 들었었다.

    재료는 간단한데 이상하게 이 김밥은 원조의 맛을 따라 하는게 쉽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번에 그 맛을 낼 수 있었다.

    “그냥 머릿속에서 기억나는 맛을 그대로 만드니깐 되던데요?”

    “우와 무슨 예술 하는 사람처럼 말하시네요? 역시 대사관 요리사는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

    “하하 그런가요? 뭐 그냥 툭툭 하니깐 되던데?”

    한발 더 나가 허세를 떨어 주니 그게 또 재밌다며 크게 웃는 한샘이었다. 남은 재료로 이 김밥을 만들어 오길 잘했다.

    이렇게 마주 선 자리에서 두 줄을 전부 먹어 버리는 걸 보니 뿌듯해졌다.

    적어도 오늘은 집에 가서 라면을 먹지는 않겠다.

    “잘 먹었습니다. 덕수 씨.”

    “너무 급하게 드신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조절이 잘 안됐네요. 너무 맛있어서요.”

    싱긋하고 웃는 모습에 나는 또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는지.

    몇 줄 더 만들어 올걸, 하고 아쉬움이 남았다.

    “덕수 씨.”

    “네?”

    “저 이거 종종 만들어 주면 안 돼요? 돈 낼게요.”

    “네?”

    내가 이제 호텔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걸 까먹은 모양이다. 나더러 이 김밥을 종종 만들어 달라는 한샘.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건넸다.

    “덕수 씨 번호 좀 알려 주세요. 김밥 먹고 싶을 때마다 연락하게요.”

    “어… 저… 이제 호텔에 일 안 하는데….”

    “아! 맞다. 그렇다고 했죠? 아쉽다….”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는 한샘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한샘의 손목을 잡아 다시 나에게로 끌어당겼다.

    “호텔에서 일 안 해도 번호는 줄 수 있어요. 외국에 있어도 다 연락할 수 있거든요.”

    “아하! 좋네요. 그래도 이제 이 김밥은 못 먹는 거겠죠?”

    “김밥이요?”

    “네 이 김밥 이렇게 제대로 맛 낼 수 있는 사람 울 엄마 말곤 첨 봤는데… 아쉽네요.”

    그건 휴대폰으로 전송할 수는 없으니까.

    적어도 한국에 있는 동안은 최대한 많이 만들어 줄 순 있다.

    “그럼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만 매일 만들어 줄게요.”

    “네? 정말요?”

    “네 사실 저 이번 주 내내 호텔에서 알바하기로 했거든요. 이 김밥 매일 만들어 드릴게요.”

    “오! 그래도 돼요? 너무 민폐 아닌가?”

    나도 모르게 질러 버렸다.

    한식당에 나 하나 정도 들어갈 알바 자리는 있겠지.

    에이 뭐 안 되면 공짜로라도 일해 준다 하지.

    설마 공짜로 일해 준다는데 마다하지는 않겠지.

    “민폐 맞는데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뭐에요?”

    어쨌든 나는 일주일 후 다시 파나르로 돌아가야 하니깐 이번 기회가 정말 중요했다.

    이번 삶에도 한샘을 다시 내 가족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슨 방법이라도 써야 했다.

    “저 외국에 있으면 심심하니깐 저랑 자주 톡해요.”

    “톡이요? 그게 다예요?”

    “네 저랑 톡 친구 해 줘요.”

    “풉. 그게 무슨 부탁이에요. 그 정돈 당연히 해 주지.”

    이런 건 일도 아니란 듯이 웃는 한샘이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파나르에 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꾸준히 연락하는 것뿐이었다.

    같은 호텔에서 일할 때처럼 매일 챙겨 줄 수 없으니 잊혀지지 않으려면 연락이라도 꾸준히 해야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잖아요 그니깐 연락이라도 자주 해요. 솔직히 말해서 저 한샘 씨랑 더 가까워지고 싶어요.”

    “어머나? 이렇게 갑자기?”

    조금씩 천천히 다가가려 했던 계획은 맘처럼 쉽지 않았다. 뭐 당장 사귀자고, 기다려 달라고 그런 말은 하지 않을 테니만 날 조금 특별하게 생각해 달라는 말 정도는 하고 싶었다.

    “예전부터 한샘 씨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요. 그래서 더 친해지고 싶었어요.”

    “정말요? 되게 기분 좋은 말이네요. 저도 새로운 친구 사귀는 건 완전 좋아요.”

    새로운 친구 말고.

    남자 친구가 되고 나아가서 남편이 될 사람이다라고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는 게 답답했다. 하지만 나 혼자 미래를 알고 있다고 단번에 들이댈 수는 없는 셈이었다.

    단 일주일뿐인 시간이었지만 한샘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봐야겠다.

    그게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판단했다.

    “어쨌든 오늘 고생 많았어요. 내일부터 꾸준히 안부를 물어볼 테니깐 귀찮아하지 말고 답장해 줘요.”

    “알겠어요. 얼마나 안부를 잘 물어보는지 두고 보겠어요.”

    걱정 마라.

    식성이나 취향은 물론이고, 매일 잠드는 시간, 좋아하는 배우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속속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 * *

    “안 늦었죠 주방장님?”

    “조금 늦었긴 했지만 이제 우리 식구도 아니고 뭐, 굳이 일찍 와서 세팅하고 그럴 필요는 없지.”

    “와아 이렇게 선을 긋네요.”

    “먼저 호텔 나간 건 너야 인마.”

    주방장님은 멀리서 온 날 위해 통 크게 지갑을 열었다. 그냥 평소처럼 대패 삼겹살을 먹어도 충분히 좋았을 텐데 두툼한 소고기를 구워 먹으니 오랜만에 배 속이 호강을 했다.

    비싼 소고기의 맛이 좋아서인 이유도 있지만 직장 후배일 뿐인 날 위해 이렇게 거침없이 지갑을 열어 준 주방장님께 너무 고마웠다.

    “주방장님. 저 한국에 주방장님 하나 보고 온 거 알고 계시죠?”

    “웃기시네. 그런 뻔한 거짓말에 속을 거 같냐?”

    “진짠데요.”

    취기가 조금 오르자 주방장님께 안 부리던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예전의 습관이 그냥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할까.

    “솔직히 너 그 카페에 여자 보러 온 거 아니야?”

    “어? 어떻게 아셨어요?”

    “맞네. 이놈 여자 때문에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네. 그분이 그렇게도 보고 싶더냐? 6시간을 비행기 타고 올 만큼?”

    당연하지. 보고 싶고말고.

    하지만 오늘 한번 본 걸로 만족할 수 없었다.

    남은 시간 동안 더 많이 더 실컷 보고 가야지.

    “에라이 들켜 버렸네요. 그래서 말인데요 주방장님. 저 그 여자분이랑 시간 좀 보낼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응? 내가? 어떻게?”

    “파나르에 돌아가기 전까지 저 알바 좀 시켜 주세요. 직원 기숙사에서도 살게 좀 해 주시고.”

    정 안되면 공짜로라도 일을 할 생각도 있었다. 대신 한샘이 출근하는 날에만 스케줄을 맞춰서.

    “정말? 일주일 동안 진짜 알바할래?”

    “네 자리만 있으면 할게요. 대신 기숙사도 좀 쓰게 해 주셔야 해요.”

    “좋지! 그 정도쯤이야 어렵지 않지. 기숙사? 그것도 뭐 대충 끼어서 자면 되지 근데 휴가까지 내고 일을 해도 되겠어?”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그럼 기숙사에 한 명 더 들어가도 되지?”

    주방장님은 기숙사에 사는 선배 하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늘 같은 주방장님 물어보는데 선배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그 선배도 내가 오는 걸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대신에 나도 일주일 동안 기숙사 간다.”

    “에? 왜요?”

    “이번 주 새벽에 유럽 축구 챔피언스 리그 하는데 집에서는 맘 편히 못 봐서. 집에는 덕수 네 핑계랑 일 핑계 좀 대고 안 가려구.”

    스포츠란 스포츠는 전부 챙겨 보는 주방장님이었다. 그중 축구를 가장 좋아했는데 특히 유럽 축구라면 밤을 새워 가며 챙겨 보는 사람이었다.

    “아 시나리오가 이렇게 되면 좀 별론데….”

    “참아 어쩌겠어. 대신 맥주랑 안주는 무한정 제공할게. 어때?”

    “오 그 정도면 콜이죠.”

    선배도 나도 그 제안에 흔쾌히 콜을 외쳤다.

    100% 편하진 않겠지만 주방장님은 퇴근 후에도 지위나 나이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직원들은 그냥 형, 동생처럼 편하게 주방장님을 따랐고, 특히 나는 진짜 친형처럼 주방장님을 믿고 의지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