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39화 (40/202)

39. 관저가 낫겠어요

파나르 공항.

“진우야!!”

“아빠!”

아내의 이름도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아들 진우가 달려와 안기는 바람에 눈빛 교환만 하고 말았다. 어차피 우린 20년 지기 베스트 프랜드였으니깐 이 정도쯤은 용서해 줄 걸 다 알고 있었다.

“비행기 타는 거 어땠어? 우리 진우?”

“처음에 좀 무서웠는데 나중에는 엄청 재밌었어. 또 타고 싶어.”

“안 피곤해?”

“응 하나도.”

“그래 그럼 차에 타. 아빠의 파나르 집으로 가자.”

아들은 장시간 비행이 처음이었지만 별로 힘들지 않았나 보다. 오히려 아내의 표정이 좀 더 피곤해 보였다. 짐도 챙기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들도 챙기려니 긴장을 했겠지.

이럴 걸 대비해서 며칠 동안 열심히 요리를 배워 놓았지. 저녁은 나와 진우가 준비할 테니 편하게 샤워라고 하라고 해야겠다.

“여보. 저녁은 내가 준비할 테니깐 짐 대충 풀고 샤워하고 와.”

“네가 밥을 만든다고?”

이 정도 반응은 충분히 예상했다. 나는 집에서 라면 하나도 제대로 끓이지 못하는 바보였으니까. 적어도 주방에서는 거의 무쓸모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응 거짓말 아니니깐 믿고 샤워하고 와.”

“먹을 수 있는 걸 만드는 거지?”

“걱정 말라니까. 진우랑 같이 만들 거야. 그러면 됐지?”

아들을 상대로 장난칠 리는 없으니 그제야 안심하고 샤워실로 들어가는 아내였다.

피곤한 아내 대신 여전히 팔팔한 진우의 손을 잡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진우야 아빠랑 같이 요리하자. 옆에서 아빠 좀 도와줄래?”

“응 좋아. 근데 뭐 만들 거야?”

“오늘은 진우가 좋아하는 찜닭 만들 거야. 찜닭 뭔지 기억나지?”

“당연히 기억나지! 오예 맛있겠다.”

일단 메뉴 선정은 성공.

오자마자 비어캔 치킨을 만들어 달라고 할까 봐 조금 걱정했는데 그건 잠시 잊어버린 모양이다. 빨리 맛있는 찜닭을 먹여서 아무 말 못 하게 해야지.

“간장, 설탕, 마늘, 후추 그리고 참기름. 또 뭐가 들어가더라. 엄청 열심히 외웠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

“아빠 뭐가 기억이 안 나?”

“응? 아무것도 아니야. 자! 이렇게 만든 달콤한 양념을 닭이랑 같이 넣어 줍니다!”

“오예.”

색이나 냄새는 얼추 맞는 거 같은데?

요리사님이 코드만 알면 누구나 먹을 만한 요리를 만들 수 있다 했으니깐 맞겠지 뭐.

분명히 기억나는 재료는 다 넣었으니깐 괜찮을 거야.

조금은 불안했지만 닭고기가 익어 갈수록 익숙한 냄새가 올라왔다. 샤워를 끝낸 아내도 찜닭 냄새가 좋다면서 놀란 표정이었고.

“자 이제 맛있는 찜닭 먹읍시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별말 없이 찜닭에 계속 젓가락을 가져갔으니까.

내 기억에 진우는 밥 한 그릇을 채 먹지 못했는데 오늘은 한 그릇을 전부 비우고 있었다.

그리고 요리가 성공했다는 증거 중 하나는 아내의 잔소리가 없다는 거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날 놀릴 생각에 입을 가만히 놔두지 못할 텐데, 오늘은 아내도 얌전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역시 대사관 셰프는 가르치는 실력도 수준급이구나. 나도 배우면 잘할 수 있는 거였는데 여태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해서 이런 거였구나.

첫날부터 내 계획대로 제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관저.

띵동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 커다란 관저의 대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준우의 아들은 저절로 열리는 대문이 신기한 듯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어서오세요. 파나르 대사 김용수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준우 서기관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나와 김용수 대사는 진짜 외교 만찬을 주최하는 호스트처럼 옷도 말끔하게 차려입고, 마당까지 마중을 나섰다.

“대사님 뭐 하러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진우야 대사님이랑 요리사님한테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저는 김진우입니다.”

“아이고 반가워요, 진우 군.”

김용수 대사가 마당까지 직접 마중을 나오자 안절부절못하는 준우였다. 옷까지 말끔하게 차려입었으니 부하 직원으로서는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아빠로서 자존감이 한껏 올라갔을 거다. 옆에서 아내와 아들 진우는 커다란 규모의 관저에 계속 놀라고 있었으니까.

“아빠 여기가 아빠 회사야?”

“응? 여기도 있고, 또 다른 곳에도 있어. 아빠는 파나르에서 일하는 곳이 두 개야.”

“우와 이렇게 큰 회사가 두 개나 있어? 우리 아빠 진짜 대단하다.”

그렇게 소리친 진우는 신이 나서 마당으로 뛰어갔다. 아내가 진우를 잡으려 했지만 김용수 대사가 나서서 놔두라고 했다. 어차피 우리도 마당에서 저녁을 먹을 테니까.

“우와 텐트다 텐트. 아빠 오늘 우리 여기서 캠핑하는 거야?”

“응 진우도 캠핑 좋지?”

“응 완전 좋아. 엄마가 파나르에 가면 아빠랑 캠핑할 수 있다고 했는데 기다리느라 죽는 줄 알았어.”

“아구 그랬어?”

넓은 마당과 커다란 텐트를 보고 신이 난 진우를 보며 준우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일단 시작은 제대로 점수를 딴 것 같았다.

훈훈해진 분위기를 보며 나와 김용수 대사도 대리만족하는 중이었고.

“서기관님. 저기에 비어캔 치킨 준비해 놨으니깐 진우 데리고 와서 보여 주세요. 서기관님이 만든 것처럼.”

“아! 네 감사합니다.”

마당의 구석에는 커다란 바비큐 통에 비어캔 치킨 3마리와 폭립 그리고 통삼겹이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고 있었다.

“진우야 잠시만 이리로 와 볼래?”

“응?”

“아빠가 진우를 위해 뭘 준비했는지 볼래?”

넓은 마당과 텐트로도 충분히 만족한 것 같았지만 커다란 바비큐 통을 보자 관심을 보이는 진우였다.

“짜잔! 이게 뭔지 알아?”

“우와 나 이거 알아! 비어캔 치킨이잖아. 이거 아빠가 만든 거야?”

준우는 잠시 나를 쳐다봤다. 거짓말을 하는 게 찔린 모양이었다. 나는 빠르게 윙크로 괜찮다는 신호를 줬다.

“그럼 아빠가 만들었지. 진우가 이거 먹고 싶다고 그랬다며?”

“응! 나 이거 엄청 먹고 싶었어. 아빠 진짜 대박이야. 사랑해요.”

폴짝 뛰어올라 준우에게 안기는 진우였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어쨌든 진우가 생각했던 비어캔 치킨과 내가 만든 비어캔 치킨이 똑같았나 보다. 맛도 보지 않고 사랑한다며 안기는 진우였다.

“그럼 먹어 볼까?”

“응 좋아 내가 한 마리 다 먹을래.”

“정말? 어제도 닭고기 많이 먹었으면서 또 먹어?”

어제도 성공적으로 찜닭을 완성했나 보다.

다행이었다. 비록 주입식으로 가르친 거였지만 성과는 있었으니.

그때였다.

“어제는 맛없는 닭고기였지만 이 비어캔 치킨은 맛있을 것 같아.”

응? 어제는 맛없는 닭이었다고?

어제저녁에 다 같이 찜닭을 만들어 먹은 거 아닌가?

준우 아내를 제외한 세 명의 표정이 멍해졌다.

“진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 먹은 찜닭이 맛없었어?”

“응. 맛없었지 당연히.”

“당연히? 그거 아빠랑 진우가 같이 만든 거잖아. 그리고 밥 한 그릇 다 먹었잖아.”

“알아. 근데 아빠랑 내가 요리사는 아니잖아. 요리사 삼촌이 만든 비어캔 치킨보다 맛없는 게 당연하지. 밥은 그냥 배고파서 많이 먹은 거지.”

“이 비어캔 치킨도 아빠가 만든 거 아니란 거 알고 있었어?”

진우는 당연한 듯 비어캔 치킨을 내가 만든 요리라고 알고 있었다. 아까 아빠가 만들었다고 할 때 사랑한다고 해 놓고.

속은 척해 준 건가? 어른들을 갖고 노는 진우였다.

“괜찮아 아빠 실망하지 마.”

진우는 별거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준우의 표정은 꽤 심각했다.

아빠랑 노는 게 미친 듯이 즐겁고, 아빠가 해 주는 요리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야지 진우가 같이 살자고 말할 것 같은데….

그런데 어제 같이 만든 찜닭은 맛이 없었고, 오늘 이 비어캔 치킨은 아빠가 만든 음식이 아니란 사실이 단번에 들켜 버렸으니.

준우는 순식간에 불안감에 휩싸였다.

“풉.”

준우가 바닥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시무룩해지자 준우의 아내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하하. 표정 진짜 웃기네 김준우.”

“뭐야 왜 웃어.”

“거울 봐 봐. 지금 그 얼굴 보고 안 웃을 수 있는지.”

대사님과 내가 있어서 그런지 내내 준우 씨라고 칭하던 아내였지만 웃음이 터진 후엔 20년 지기 절친을 대하듯 준우를 놀려 댔다.

준우도 이런 상황이 더 익숙해 보였다.

“오늘은 웃지 마. 나 조금 심각하단 말이야.”

“싫어 내가 웃고 싶으면 웃는 거지 뭐. 죄송해요 대사님. 준우 씨 좀만 놀릴게요.”

“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신이 난 준우 아내와 달리 준우는 여전히 심각했다.

준우는 어제 함께 찜닭을 만들며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고, 오늘 캠핑을 하며 보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내일, 모레, 글피.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정은 더욱 커질 것이다. 아들과 그리고 아내와 다시는 헤어지기 싫은 감정이.

“진우야.”

“네 엄마.”

“어제 아빠랑 만든 음식이 이 비어캔 치킨이랑 다른 음식들보다 맛이 없었지?”

진우는 엄마의 물음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 사살이라도 하는 건가.

“근데 맛없는 찜닭이라도 아빠랑 같이 요리하는 건 어땠어? 재밌었어?”

“응! 너무 재밌었어. 맨날 하고 싶어.”

“그래? 매일 하고 싶을 만큼 재밌었어?

“응 매일!”

“들었지? 김준우?”

거의 절망한 상태로 축 처져 있던 준우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뭐… 뭐라고 했어 방금?”

“아빠랑 맨날 요리하고 싶다잖아. 이제 늙어서 귀도 먹었냐?”

말투는 핀잔에 가까웠지만 준우 아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 있었다.

대충 상황을 읽어 보니 두 사람은 이미 어느 정도 결심을 하고 온 것 같았다.

“그니깐 아빠랑 맨날 요리하고 싶다는 말이지 진우야? 아빠랑 같이 살면서?”

“응! 같이 요리도 하고, 같이 축구도 하고 나 요즘엔 수영장도 가는데 그것도 아빠랑 가면 좋겠어.”

“정말이야?”

“응 수영복 갈아입을 때는 엄마가 못 들어오잖아. 그게 싫어.”

준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진우를 번쩍 들어 올렸다.

며칠 동안 연습하고 또 연습한 찜닭의 맛은 결국 형편이 없었지만 아들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니깐 이제 같이 살면 아침은 혼자서 만들어서 먹고, 점심은 밖에서 사 먹고, 저녁은 네가 만들어 알았지? 진우랑 나는 마음만 함께할게.”

“끼어들어서 죄송한데 몇 달 동안 김준우 서기관 야근은 절대 없도록 약속하겠습니다. 저녁 식사 담당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김용수 대사까지 나서서 거들었다.

그럼에도 아내의 말이 들리는지 마는지 준우는 그냥 격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에서 뭔가 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뭐야 김준우. 너 울어? 진우야 아빠 운다.”

“아빠 울어?”

“아니 안 울어. 아빠가 왜 울어.”

아내는 진우의 등을 살며시 떠밀었다. 가서 안아 주라는 의미로.

똘똘한 진우는 그 뜻을 금세 이해하고 아빠에게 달려가 말없이 안아 주었다.

“흐윽 진우야.”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는 준우였다. 지켜보던 준우의 아내 역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여보야도 이리로 와. 한번 안아 보자.”

“대사님이랑 요리사님도 계신데 남사스럽게 왜 이래.”

“그럼 두 분도 이리로 오세요. 저희는 전부 다 가족이죠.”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저두요.”

질색을 하고 거절했지만 끌어안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보니 조금 부러워진 건 사실이었다.

아니 많이 부러웠다 사실.

김용수 대사의 표정을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희가 좀 주책이었죠? 죄송해요.”

우리의 눈치를 본 준우는 아들만 품에 꼭 안은 채 아내를 서둘러 밀어냈다.

“김용수 대사님 좋은 집이랑 텐트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요리사 삼촌 맛있는 비어캔 치킨 만들어 줘서 고맙습니다.”

“오호 이것 봐라?”

눈물을 닦느라 정신없는 준우 대신 똘똘한 진우가 나서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준우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