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37화 (38/202)

37. 먹방 하세요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이 조금 늦어지나 보다.

외교관들은 공식적으로 주말엔 쉬지만 필요할 땐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래서 다른 공무원들에 비해 월급도 높은 편이었고.

아마 준우도 공무 때문에 식당에 온 거라 예상했다.

똑똑똑.

“안녕하세요, 서기관님?”

“어? 요리사님.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들어오세요.”

사장님의 말처럼 준우는 큰 테이블이 하나가 놓여 있는 방 하나를 빌려 놓고, 많은 양의 음식을 주문해 놓은 상태였다.

제육볶음, 파전, 닭볶음탕, 김치찌개 등등.

얼핏 봐도 7~8명은 족히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식당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는데 사장님이 여기에 서기관님 계신다 해서 얼굴이나 비치러 왔어요.”

“그래요? 잠시 앉으실래요?”

“그래도 되나요? 곧 손님 오시는 거 아니에요?”

처음에는 형식상 권하는 것 같아 정중히 거절하려 했는데 기어코 날 자리에 앉히는 김준우 서기관이었다.

온 지 한 시간이나 지났고, 나라도 억지로 앉히는 걸 보니 아마도 약속이 취소되었나 보다.

“양조장은 잘 갔다 왔어요?”

“네 지금 거기서 오는 길입니다. 너무 좋더라구요. 다음에 서기관님도 꼭 같이 가요. 안 계셔서 좀 아쉬웠어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다음에는 저도 꼭 데리고 가 주세요.”

자리에 앉자 김준우 서기관은 앞접시 하나와 젓가락을 나에게 건넸다.

음식도 많이 남았고, 손님도 안 오는 거 같은데 좀 먹어도 되겠지?

아직 저녁을 먹지 못해 마침 출출하던 참이었다.

“많이 드세요.”

“제가 먹어도 되나요? 손님들 오시는 거 아니에요?”

“전부 드셔도 돼요. 이거 제가 다 시킨 거예요.”

“네?”

원래 이렇게 먹는 양이 많은 사람이었나?

저번에 집들이에서 봤을 땐 식탐이 그리 많은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술도 음식도 그냥 적당히 먹었던 것 같은데.

부업으로 먹방이라도 시작한 건가?

“혹시 먹방 하세요?”

“먹방이요? 하하하 아니에요. 근데 요즘 애들이 좋아하니 그것도 방법일 수 있겠네요.”

그것도 방법일 수 있다니.

준우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끝을 흐렸다.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고민이 있어 보이는 표정.

“근데 혼자서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시키셨어요?”

“그러게요. 이렇게 많이 먹어 봐도 잘 모르겠네요.”

“무슨 일 있으세요?”

주변을 둘러봤지만 빈 술병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상 준우는 술잔을 건네면 덥석 잡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잠시만요.”

나는 서둘러 방을 나서서 쿠므스 한 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잔을 건네고 술을 따라 주었다. 준우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술잔을 받았고.

“요리사님은 요즘 가족 안 보고 싶으세요?”

“네? 저요? 당연히 보고 싶죠.”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도 보고 싶고, 얼마 전에 학교에 입학한 손자와 딸도 보고 싶다. 회귀도 했으니깐 젊었을 적 아내도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가족이라면 언제나 보고 싶은 게 당연했다.

“사실 저는 가족이 너어어어무 보고 싶습니다.”

외교관이라는 근사한 타이틀을 달고 있었지만 준우는 기껏해야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다. 모든 걸 참아 낼 만큼 경험치가 많은 어른은 아니란 의미다.

“저랑 와이프 연애 기간이 몇 년인 줄 아세요, 요리사님?”

“몇 년이신데요?”

“연애만 12년이에요 12년. 결혼 생활까지 합치면 지금 20년째 만나고 있어요.”

“와아 진짜 일찍 만나셨구나.”

동네 친구로 시작해서 14살부터 사귀기 시작한 두 사람이었다. 이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자마자 사귄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군대까지 기다려 주고, 제가 고시 공부를 할 때도 끝까지 믿고 응원해 주던 게 우리 와이프였어요. 언제 붙을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도.”

“서기관님 결혼 잘하셨네요.”

“당연하죠. 저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많이 보고 싶으신 게 당연하겠네요.”

“연애가 길어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했는데 결혼 후에도 몇 년간은 공부만 하느라 신혼 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어요. 그게 미안해서 합격하고도 본부에서만 최대한 오래 근무를 했습니다. 신혼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서요.”

준우는 연차가 제법 지난 외교관이었지만 해외 파견 근무가 처음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저는 3년 동안 고시원이라는 그 답답한 곳도 버텨 냈고, 아내도 군대를 포함해서 5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 줬는데 이깟 외국쯤은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랬군요.”

두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뭐든지 이겨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고대하던 시험까지 붙었으니 뭔들 겁이 났을까.

나였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근데 막상 겪어 보니 혼자 외국 생활을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네요. 이 향수병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거 같아요.”

“저도 공감합니다.”

나는 아직은 향수병이란 걸 특별히 느끼지 못했지만 오늘은 무조건적으로 준우의 말에 공감해 주었다. 안 그랬다간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아서.

“그럼 사모님하고 아들분하고 파나르로 오라고 하면 안 될까요? 이제 2년 정도만 남으셨잖아요.”

파나르라는 나라가 그땐 그리 안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직 5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까지 해외로 데리고 오기는 무리였다고 했다.

아내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 같았고.

함께하면 모든 걸 다 이겨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차피 파나르에서 임기가 끝나도 바로는 한국에 못 들어가요. 여기 나오기 전에 본부에서 너무 오래 근무해서요.”

외교관들은 보통 한 부임지에서 3년 정도 근무를 한다. 그 후엔 무작위 또는 신청을 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된다.

적응 문제로 한국과 해외 근무를 번갈아 가며 하기도 하는데 준우는 합격 후 초반에 그 한국 근무를 몰아서 해 버렸다.

“아… 그렇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참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외교관이라고 하면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직업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런 고충이 있을지는 나 역시 몰랐다.

“근데 어쩌겠어요? 저는 이미 외교관이 되었고, 그걸 알고도 결혼을 했으니 정년 퇴임 때까진 외국 생활에 적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죠.”

“언제까지 따로 살 수는 없잖아요. 가족인데….”

우울해하던 준우의 태도는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 진심이 담긴 분노는 아니었을 거다.

가족이 너무나도 그리워서 이렇게 저렇게 표현해 보는 것일 뿐.

내 나이쯤 되어서 보니 그게 쉽게 보였다. 김준우 서기관이 가족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굉장히 애쓰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저는 이번에 와이프와 아들을 꼭 데리고 와야겠어요.”

“네 들어 보니 파나르 대통령도 곧 바뀐다 하고, 그 후론 빠르게 안정이 될 것 같습니다. 걱정할 만큼 불안한 상황은 지나간 것 같아요.”

이건 안지용 참사관이 건넨 고급 정보였다. 국정원에서 파견 나온 안지용 참사관은 술에 취해 고급 정보 하나를 흘려 주었다.

어차피 김용수 대사에겐 공식적으로 보고될 내용이었지만 쿠므스 덕에 비공식적으로 조금 일찍 알게 되었다.

내용은 이랬다.

반란군과 정부군의 협상이 완전히 끝이 났다. 그것도 꽤나 평화적으로.

대통령을 바꾸는 조건으로 군대를 완전히 해산하고, 정부에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대통령 역시 스스로 은퇴할 시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했다. 국민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내부적으로 은밀히 정리하고 몇 달 뒤 공식적인 발표가 날 거라 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래서 말인데요, 요리사님.”

“네 말씀하세요.”

방금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인 걸 본 것 같은데, 준우는 어느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입을 열었다.

“저 요리 좀 가르쳐 주세요.”

“요리요? 갑자기 왜요?”

“와이프랑 아들한테서 저랑 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요.”

“그게… 무슨.”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준우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진 못했다.

준우가 이렇게 많은 음식을 시켜 놓은 이유는 요리를 배우고 싶어서라 했다. 많이 먹어 봐야 좋은 맛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맛 좋은 한식도 맘껏 먹을 수 있고, 신선한 재료도 구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면 와이프도 파나르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도 있을 거라 했다.

혼자서 집안일은 틈틈이 연습해서 마스터에 가까운 실력을 가졌고,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3년 단위로 계획을 세워 뒀다고 했다.

그렇게 해외 생활에 적응이 되면 나중에 다른 나라로 가도 수월하게 적응할 테니까.

“근데 요리는 아무리 연습해도 잘 늘지가 않더라구요. 이런 걸 매일 하는 요리사님 진짜 대단합니다.”

격했던 감정을 추스르자 원래의 준우로 잠시 돌아왔다. 평소처럼 오버하며 두 엄지를 치켜세우며 나를 칭찬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음식을 드셨어요?”

“네 뭐 동영상을 봐도 모르겠고, 인터넷 강의를 듣고 따라 해도 결과물은 항상 실패더라구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죠. 며칠 동안 너무 많이 먹고 체해서 죽을 뻔했네요.”

그럼 진작에 말하지. 시간 날 때마다 와서 도와줬으면 되는데. 요리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고 집밥 정도는 하루에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알려 줄 수 있었다.

“진작에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요리사님 요 근래 계속 바쁘셨잖아요. 그래서 말씀드리기가 좀….”

평소엔 쓸데없는 말까지 잘만 하더니.

꼭 필요할 때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드는 준우였다. 그래도 그만큼 심성이 착하다는 의미겠지. 아마 첫 공관에서 최대한 잘 보이기 위해 본래 성격보다 오버해서 행동했을 테고.

덕분에 몇 달 동안 속이 얼마나 썩어 있었을지 알 것 같았다.

“요리는 얼마든지 가르쳐 드릴게요.”

“정말요? 정말이세요?”

“네 당장 다음 주부터 퇴근 후에 어떠세요?”

“좋습니다. 저는 당장 오늘부터도 좋습니다.”

“오늘은 제가 좀 피곤해서….”

준우에게 요리를 알려 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도 준우도 혼자 살아서 퇴근 후 집에서 할 게 없는 건 똑같았으니까.

“그러면 어떤 요리를 알려 드리면 될까요?”

“음… 와이프는 일단 한식이라고 하면 딱히 가리질 않는 편이구요.”

“아드님은요?”

“아들놈은 닭고기 요리를 좋아합니다. 근데 피자나 파스타 이런 것도 좋아해서 한식 말고도 가능하시다면 그런 것도 기본만 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피자나 파스타는 그냥 사 먹는 게 싸고 맛있을 텐데. 내가 한식 전문이지만 그 정돈 알려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단기간에 맛을 내는 게 쉽지 않은 메뉴였다.

“피자나 파스타는 사 먹는 게 더 나을 텐데요.”

“맛이 좀 없어도 이런 거까지 할 수 있으니깐 아빠랑 같이 살자라고 말해 보려구요.”

그래 그런 맘이면 뭐든 못 하겠나.

자식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드는 게 부모 맘인데, 그 정도쯤이야 연습해서 안 될 게 없지.

“좋습니다. 배우고 싶은 요리가 있으면 전부 말씀하세요. 다 알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혹시 제 재능이 뛰어나서 요리사님 자리를 뺐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그래그래. 그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도전은 받아 줄 수 있었다. 당연히 농담이겠지만 배우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로선 매우 만족스러웠다.

일단 집에서 자주 요리를 해 먹었다 하니 기본기는 되어 있을 테고, 노하우 몇 가지만 가르쳐 주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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