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35화 (36/202)

35. 연휴

“이야 이렇게 좋은 곳에서 3일이나 시간을 보낸 거예요?”

“그러게요. 좋은 경험 했네요, 요리사님.”

사실 이 별장과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더 좋은 곳이었는데, 놀라는 두 사람을 보고 나는 별말 없이 그냥 웃어넘겼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알렉스라는 사람의 재력이 더 대단한가 봅니다.”

“그런가 보네요 허허허.”

“내년에 저희도 생일 파티에 꼭 초대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보시죠.”

“그래요. 안 참사관도 많이 노력해 줘요.”

우리는 연휴 기간 동안 낚시를 하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근처에 양조장도 있으니 술도 마시고, 잡은 물고기도 잡아먹고 할 생각을 하다 보니 안지용 참사관이 떠올라 함께 오게 되었다.

역시나 양조장이 있다는 말에 덥석 수락하더라.

“안지용 참사관님은 낚시 좀 해 보셨어요?”

“아니요. 저는 낚시하러 온 게 아닌데요?”

평소에는 그렇게 점잖고, 신사적인 사람이 술만 마시면 평정심을 종종 잃는다. 그래도 공적인 자리에서 실수를 할 정도는 아니니 김용수 대사도 안지용 참사관을 자주 데리고 다녔다.

“그 쿠므스라는 술 한번 마셔 보려구요. 요리사님도 드셔 보셨다면서요?”

“네 아주 맛있더라구요.”

“술은 다 맛있죠. 다른 맛이 있을 뿐 좋은 맛, 나쁜 맛은 없답니다.”

“그렇군요 하하하.”

그래서 그런지 안지용 참사관은 낚싯대나 모자 같은 용품은 챙기지도 않았다. 대신 어디서 구했는지 양은으로 만든 사발 몇 개와 총각김치, 밑반찬 조금을 싸 왔다.

“아예 막걸리 세트를 챙겨 오셨네요.”

“그 쿠므스라는 술은 아무래도 이런 컵에 먹어야 제맛일 것 같아서요.”

상상해 보니 꽤 어울릴 것 같았다. 어차피 색깔이 비슷하니 막걸리를 마시는 기분을 제대로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일단 양조장부터 가 볼까요?”

“그러시죠.”

별장에 들르기 전에 우린 양조장으로 향했다. 알렉스가 출장도 미루고 기다린다고 했으니 김용수 대사의 얼굴부터 보여 주고 싶었다.

“어서 와요, 미스터 장.”

“안녕하세요, 알렉스.”

“반갑습니다. 김용수입니다.”

나에겐 파나르어로 인사를 건넨 뒤 김용수 대사에겐 자연스럽게 영어를 건네는 알렉스였다. 안지용 참사관 역시 능숙한 영어로 소통을 시작했고.

이번엔 윤아가 없어도 충분히 대화할 수 있었다.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립니다. 별건 아니지만 이거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미스터 장 덕분에 즐거운 생일 파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용수 대사는 좀 더 숙성이 된 산머루 와인을 선물로 건넸다. 막걸리를 좀 더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숙성이 된 산머루 와인의 진가를 알아주길 바란다며 산머루 와인을 갖고 왔다.

그래도 막걸리를 더 먹고 싶으면 국경일 행사에 오라고 협박(?)을 할 계획이었다.

“미스터 장.”

“네”

세 사람은 형식적인 인사만 나눈 뒤 알렉스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들썩거리는 입술을 보니 아무래도 문제를 해결한 것 같았다.

“파나르 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쿠므스를 만들어 보셨어요?”

알렉스가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물었다.

“이건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으니 맛을 보세요.”

그러더니 내 손목을 잡아끌고 양조장 안으로 들어갔다. 겉으로도 무슨 카페처럼 꾸며 놨는데 양조장 내부는 거의 박물관 수준이었다.

군데군데 쿠므스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설명문도 붙어 있었고, 지나가며 구경할 수 있게 길도 만들어져 있었다.

“이야 취미로 만드신다니 그런 수준이 아니네요.”

“감사합니다. 일단 이것부터 마셔 보세요.”

양조장 칭찬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새로 만든 쿠므스를 들이미는 알렉스였다. 얼마나 맛있게 만들어졌길래.

“와! 이거 이번에 만드신 거예요?”

“네 완전히 다른 술이죠?”

뭔가 확실하게 달라졌다.

아주 미세한 잡내여서 그게 사라진다 해도 맛 전체는 크게 달라질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도 충분히 훌륭한 술이었다. 그 맛이 조금 거슬리긴 해도.

“맞죠? 나도 깜짝 놀랐어요. 이건 그냥 잡내가 없어진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술이 만들어졌어요. 미스터 장 덕분입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나를 껴안는 알렉스였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야 이 술이 우리 요리사님의 조언 덕분에 만들어졌다는 거죠?”

“아… 아니 조언까지는 아니구요.”

“고마워요. 이런 맛있는 술이 탄생할 수 있게 해 줘서.”

쿠므스를 맛보더니 알렉스를 따라 나를 끌어안는 안지용 참사관이었다. 이상하게 술 앞에선 취하지도 않았는데 능글맞아지네.

덕분에 우린 크게 웃을 수 있었다.

“내가 진짜 몇 년을 답답한 채로 살았는지 알아요? 드디어 정답을 찾았네요. 후우!”

10년 묵은 체증이 넘어간 듯이 환호성을 지르는 알렉스였다. 궁합이 맞는 물을 찾은 알렉스의 쿠므스는 정말 훌륭한 술로 재탄생했다.

“정답을 찾은 것도 기분 좋은 일인데 더 좋은 건 뭔지 알아요?”

“뭔데요?”

“그 정답이 우리 파나르 안에 있었다는 겁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알렉스는 파나르를 상징하는 음식과 술이 있었으면 했다고 했다. 음식은 어느 정도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술은 보드카나 와인, 맥주 등에 밀려서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이 양조장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 만든 건 맞지만 정부의 요청도 있었어요.”

“정부의 요청이요?”

사실 이런 사업은 알렉스처럼 부자가 나서 주면 좋지만 결국 나라에서 나서서 홍보를 해야만 효과가 배가된다.

알렉스와 파나르 정부의 목표가 일치한다는 걸 확인한 후 알렉스는 적극적으로 사업을 주도했었다. 생일 파티도 그 사업에 일부라고 할 수 있었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으니.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좀 더 홍보도 하고, 마케팅을 하면 외국인들도 충분히 즐길 만한 술인데.”

이렇게 박물관처럼 양조장을 만들고 술을 만든 지가 수년이 지났지만 파나르 정부는 물론이고, 알렉스 역시 아무런 홍보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몇 년 전에만 시작했어도 본전을 뽑고도 남았을 텐데,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서도 쿠므스를 맛볼 수 있었을 거고.

“그냥 취미로 술을 만들고 있다고 말한 거는 스스로 떳떳하지 못해서였어요. 정부에서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하자고 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거든요.”

알렉스가 그렇게 생각한 건 단순히 그 미세한 잡내 때문은 아니었다.

“그 미세한 잡내도 문제였지만 원래 전통 쿠므스는 낙타젖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렇지만 알다시피 파나르에서도 낙타는 이제 보기가 힘들어요. 쿠므스를 위해서 따로 사육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군요.”

“그래서 말젖으로 재료를 바꿔서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이젠 물이 문제였어요. 어떻게든 딱 맞는 물을 찾는다 해도 외국에서 가져온 물로 만들면 그걸 파나르 전통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낙타젖 대신 말젖을 사용하고, 그것도 모자라 물도 외국에서 가져온다면 당당하게 쿠므스라고 말하기가 힘들 거 같다고 했다.

거기다가 맛까지 타협한다면 자기는 발을 뺄 거라 으름장을 놨다고 했다.

“사실 사업적인 측면으로 봐선 크게 문제 될 게 없지만 그냥 내 맘이 불편했어요.”

“그랬군요.”

알렉스는 생각보다 더 애국자였다.

특히 내전이 터지고 난 후에는 나라 이미지가 너무 망가져서 굉장히 속상했다고 했다.

망가진 이미지를 문화적으로 우회해 풀고 싶어서 자신의 브랜드가 새겨진 쿠므스 출시를 서두르고 싶었다 했다.

홍보를 할 돈은 충분했으니까, 뒷배도 확실했다.

“사실 미스터 장의 술은 우연히 눈에 든 거지만 한국은 예전부터 내가 롤 모델로 삼고 있는 나라 중 하나였어요.”

“한국이요?”

“네 한국은 매우 작은 나라지만 문화적인 영향력은 어마어마하잖아요. 우리 파나르 젊은 사람들은 한국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것도 재밌는 문화라며 서로 공유하고 있어요. 그게 왜 재밌는지 이해는 안 되지만.”

그건 나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진짜 별것도 아닌 게 세계적으로 흥행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한국은 그런 분야에서 선두 그룹에 있는 건 확실했다.

“그러셨군요. 알렉스 씨는 파나르를 굉장히 사랑하는 분이셨군요.”

“네 맞습니다. 저는 우리 파나르가 좀 더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절실하게!”

주제가 이런 식으로 넘어가자 자연스럽게 김용수 대사가 대화를 주도했다. 내 역할은 이제 거기서 끝이었다.

“그런 부분에선 우리 대한민국 대사관이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종 얼굴을 뵙도록 하죠.”

“좋습니다. 저 역시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미스터 장이 대한민국 대사관 요리사라는 말을 듣고 역시 한국은 다르구나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네 저희도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그 국경일 행사에 꼭 초대해 주십시오. 반드시 참석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내년엔 대사님도 제 생일 파티에 참석하셔서 많은 조언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미스터 장도 오시구요.”

“저… 저는요?”

“하하하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이라면 누구든 환영입니다.”

안지용 참사관까지 구두 초대를 한 뒤 알렉스는 출장을 떠났다. 별장과 양조장의 술을 실컷 먹어도 된다는 말과 함께. 실컷 마시는 건 물론이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이제 조만간 알렉스의 이름을 단 쿠므스가 나오겠군요.”

“쿠므스는 정말 맛있는 술이에요. 한국 사람들도 충분히 좋아할 것 같아요.”

“그렇죠?”

“이제 그럼 실컷 즐겨 볼까요?”

안지용 참사관의 얼굴을 이미 뻘게져 있었다. 그래도 이제 시작이라는 말에 조금 자제시킬까도 했지만 휴가인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실컷 마시고, 즐기고 쉬다 가려고 온 거니까.

“저희는 이제 낚시 좀 하러 가 볼까요?”

“좋죠. 파나르에선 무슨 고기가 올라올지 궁금하네요.”

나와 김용수 대사는 낚싯대를 하나씩 들고, 안지용 참사관은 양손에 컵과 쿠므스를 들고 강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철갑상어도 종종 잡힌다 했지요?”

“종종이 아니라 자주 올라온답니다.”

철갑상어는 이름만 상어였지 상어과의 물고기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힘은 엄청날 거라 예상되었다. 오랜만에 그런 손맛을 느낄 수 있기를.

“내가 필요할 땐 나를 불러 줘 언제든지 달려갈게.”

“참사관님. 잠시 노래 좀요.”

“안 참사관. 잠시만 조용해 주면 안 되겠나?”

취기가 올라 신이 난 안지용 참사관은 쉴 새 없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덕분에 물고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입질이 오지 않자 김용수 대사도 조금 짜증이 났는지 평정심을 잃고 반말로 안지용에게 한 소리 했다.

“왔다!”

한 소리를 들은 안지용 참사관이 잠시 조용해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김용수 대사의 낚싯대가 요동쳤다.

딱 봐도 심상치 않은 크기의 물고기. 어마어마한 손맛이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으이고 장 셰프 나 좀 도와줘요. 힘이 장난 아니네.”

김용수 대사의 얼굴을 뻘게졌지만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 엄청난 손맛을 잠시지만 나도 느껴 볼 수 있었다.

“와아 진짜 대박이네요. 대사님 좀만 힘주고 계세요. 제가 건져 낼게요.”

몇 분간 함께 놈의 힘을 빼놓은 다음 낚싯대를 김용수 대사에게 맡겼다. 그리곤 뜰채를 들고 강가로 다가갔다.

“와아… 씨알이 미쳤네요.”

“빵도 만만치 않네요.”

뜰채에 들어가서도 엄청난 힘을 뽐내는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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