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또 다른 별장
말젖으로 만들었다 해서 입에 갖다 대는 게 조금 꺼려지긴 했다. 뭔가 특유의 비린내가 조금 날 것 같아서.
그렇지만 꾹 참고 알렉스가 만든 쿠므스의 맛을 봤다.
“크음.”
알렉스는 술이 삼켜진 후에도 내 입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떤 말이 나올지 굉장히 기대하고 있는 눈치.
우려와 달리 알렉스가 만든 쿠므스라는 술은 굉장이 훌륭한 맛이었다.
“이야 이거 맛 좋은데요? 윤아야 넌 어때?”
“나도 엄청 좋아. 사실 나 파나르에 5년 넘게 살면서 쿠므스는 처음 마셔 봐.”
이런 술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사 먹어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했다.
가끔은 낙타의 젖으로 만드는 쿠므스도 있다고 하니 쉽게 손이 가는 재료들은 아니었다.
“정말 맛이 괜찮습니까?”
일단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이 좋고, 깔끔했다. 걱정했던 비린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뭐로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
답답해할 정도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네. 이렇게 훌륭한 술이 파나르에도 있는지 몰랐습니다. 아주 깔끔하네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충분히 맛이 좋다고 칭찬해 줬는데도 알렉스는 안심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몇 초 후 입맛을 다셔 보라 했다.
나와 윤아는 쿠므스의 잔향이 아직 남아 있는 입을 쩝쩝대 보았다.
“어때요? 나죠?”
“아!”
무슨 맛인지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지만 미묘하게 불쾌한 맛이 혀끝에 전해졌다. 나처럼 미각이 훈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아주 미세한 향이었다.
“윤아야 너는 어때? 무슨 맛이 나?”
“아니… 그냥 술맛만 나는데.”
역시나 윤아는 그 미세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알렉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처음부터 나에게만 시선을 맞추며 질문을 던졌다.
“어떤 방법을 써도 마지막에 느껴지는 그 잡내. 그게 사라지지 않아요.”
그 말을 하는 알렉스는 제발 도와 달라는 표정이었다. 이런 냄새를 아예 못 느꼈으면 모르겠는데 그 사소한 잡내가 본인에게는 자꾸 느껴지니깐 무시할 수가 없었단다.
“나는 그 잡내의 이유를 물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냥 느낌이에요. 물 말곤 없어요.”
과학적인 근거는 없었지만 알렉스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었다. 저런 대답은 수백 번 시행착오를 겪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정확한 정답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감으로 알 수 있다.
뭐든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해 보면 그 감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물이 문제인 건 확실합니다. 다만 어떤 물이 정답인지는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지.”
지금도 충분히 훌륭한 완성도의 술이지만 마지막에 느껴지는 잡내가 사라지길 바란다고 했다.
알렉스의 미각은 확실히 일반인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음식을 즐기는 윤아도 전혀 못 느낀다고 한 거 보면.
“어때요? 저 산에서 눈 녹은 물을 사용하면 이 잡내가 없어질 거 같나요? 덕수 씨의 생각은 어때요?”
글쎄.
나 역시 만들어 봐야 알 것 같지만 비슷한 과정으로 만든 내 막걸리에는 이 맛이 나질 않았다. 확실히 우유나 유제품에서 날 만한 맛은 아니었고, 효모나 맥아 등에서 나온 맛이라면 내 막걸리에서도 조금은 느껴졌을 거다.
이 미묘한 차이는 물 성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궁합이 딱 맞는 물을 찾으면 없어질 것 같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저는 그 물을 사용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정말요?”
내가 입에서 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오자 눈이 커지는 알렉스였다.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그러면 혹시 주말에 시간 나면 여기로 한번 와 줄래요?”
알렉스는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나에겐 건넸다.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뒷면에는 주소와 간단한 지도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
“내 양조장이에요. 여기서 쿠므스를 만드는데 나는 오늘 파티가 끝나자마자 거기로 갈 겁니다.”
역시나 취미 수준이 아니었다.
유럽의 와이너리처럼 쿠므스 양조장을 꾸미고, 그곳에서도 종종 손님들을 초대하기도 한다는 알렉스였다. 진짜 제대로 인생을 즐기며 사는구나.
하고 싶은 걸 다, 그것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재력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덕수 씨가 말한 물을 이용해서 쿠므스를 만들어 놓을게요. 일주일이면 술이 만들어질 테니 시간 날 때 한번 와서 맛봐 줘요.”
“제가요?”
“아이디어를 준 사람이니까요. 혹시나 실패하더라도 덕수 씨가 양조장을 살펴보며 뭐가 문제인지 알아봐 주면 좋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양조장에 초대하는 알렉스였다. 그곳은 여기보다 규모가 훨씬 작지만 그래도 훌륭한 별장이 또 하나 있었고, 근처 강에서는 낚시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자기 명함만 내밀면 얼마든지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조치해 둔다 했다.
“나는 이번 술만 만들어 두고, 한 달 정도 출장을 가야 해서요. 다녀와서 맛볼 테니 언제든지 편하게 와서 놀다 가요 알았죠? 아니다 그냥 출장을 미룰까요?”
“그럴 거까지는….”
“아니다. 아무래도 출장을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같이 의견을 나눠 보기도 해야 하니. 괜찮죠?”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의 간절한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알렉스가 내 음식과 술에 관심을 보인 탓에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게 파티장 전체에 소문이 났다.
“덕수야. 우리 성공한 거 같다 그치?”
“생각보단 성과가 좋은 거 같네.”
이슈 몰이를 하겠다는 목표는 제대로 이룬 것 같았다.
술을 적게 준비한 것에 대한 컴플레인도 거의 없거나 마지막 날 전부 묻혀 버렸고, 나중에 국경일 행사에 초대할 테니 그때 실컷 한국 음식을 맛보라며 홍보까지 실컷 하고 왔다.
챙겨 간 김용수 대사의 명함을 100장은 넘게 소비하고 올 수 있었다.
“윤아야 이거 받아.”
“응? 이게 뭔데?”
“수고했다고 주는 선물.”
받은 보수 3,000만 원 중 윤아에게 현금 일부를 건넬까도 생각했었다. 주방 보조에게도 급여가 나오긴 했지만 나와 비교하면 평범한 수준의 돈.
윤아가 노력한 거에 비하면 터무니없었다.
그래서 부담 없이 받으라고 선물 하나를 준비했다. 윤아는 내가 무려 3,000만 원이나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번에 네가 내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했으면 이런 성과도 없었을 거야. 술이 맛있게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이번에 확실히 네 역할이 컸어.”
“와아 대박! 이거 진짜 나 주는 거야?”
“응응 왜? 그걸로 부족해?”
“아니 그럴 리가! 그냥 노트북이었어도 과한데 게다가 프로라니. 사랑해 친구야. 앞으로 평생 나랑 맛집 친구 하자.”
“어? 어…. 그래.”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크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걸까? 뛸 듯이 기뻐하는 윤아를 보며 선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 주머니엔 아직 많이 남아 있니까. 후훗.
“근데 이렇게 비싼 거 선물해 주면 이번에 번 돈 다 쓰는 거 아니야?”
“어… 조금 무리하긴 했는데 그래도 네가 많이 고생했잖아.”
“고마워! 진짜 고마워. 이제 10년 동안 써야지.”
실제로도 윤아는 내가 음식을 만드는 동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대사관과 국경일 행사를 홍보했다.
음식과 술에 대해 설명하고, 술이 모자란다며 화를 내는 손님을 어르고 달래 우리 편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내가 윤아처럼 파나르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해도 그렇게까진 못 했을 거다.
이 사실을 돌아가 김용수 대사에게도 고스란히 전했다.
“오 이번엔 임윤아 행정원의 엄청난 활약이 있었나 보네요.”
“활약까지는 아니고 그냥 할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본인의 할 일만 잘 해낸다면 오늘처럼 계속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김용수 대사가 자주 강조하는 말이었다.
본인의 자리에서 본인의 일만 잘하면 된다. 그러면 그 조직은 어느새 고속 도로에 올라간 것처럼 빠르게 나아갈 거라고.
“이번에도 장 셰프는 요리와 조주를, 윤아 씨는 담당한 통역을 잘 해냈기 때문에 이런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네요.”
알렉스의 파티에 온 사람들이 전부 국경일 행사 초대에 응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초대장을 보내면 적어도 읽지도 않고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맛본 막걸리와 산머루 와인이 입 안에 맴도는 것 같을 테니까.
“두 사람을 특사로 보내길 잘한 거 같네요. 나이도 같고, 보아하니 둘이 케미도 잘 맞는 거 같은데 맞나요?”
“케미요? 대사님 그런 단어도 아세요?”
“케미스트리에서 온 말 아닙니까. 이래 봬도 나 외무 고시 출신이에요. 영어는 어디 가서 안 꿀린단 말입니다.”
평소와 다른 능글맞은 김용수 대사를 보며 우린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김용수 대사의 말대로 윤아와 일할 때 손발이 잘 맞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몇 번 하다 보니 어떤 단어를 사용하면 윤아가 통역하기 편할까라는 게 감이 오기도 했다. 윤아 역시 내가 뭘 말하려는지 쉽게 이해하는 것 같았고.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국경일 행사도 차근차근히 준비해 봅시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나와 윤아의 대답이 우렁차게 느껴졌다. 대사관을 대표해서 큰 건을 하나 해결했다는 뿌듯함 때문일까. 나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 날이었다.
“피곤하죠, 장 셰프?”
“괜찮습니다.”
“다음 주에는 금, 토, 일 푹 쉴 수 있으니깐 조금만 힘냅시다.”
“네 알겠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이번에 다 같이 술을 만드느라 쉬지 못한 공휴일 대신 금요일에 대체 휴무를 사용하게 해 주었다. 아예 대사관 자체를 쉬어서 전 직원이 눈치 보지 않고 쉴 수 있었다.
“연휴 때 뭐 할 거예요? 파나르에 와서 3일 이상 쉬게 된 것도 처음이죠?”
“그렇네요.”
매주 주말은 쉬었지만 3일을 연달아 쉰 건 처음이었다. 평생을 주방에서 일했지만 주말을 전부 다 쉬게 해 주는 주방은 처음이었다.
레스토랑이나 호텔이 아니라 그런지 주말이 더 바쁠 일은 없었다. 초대되는 손님들도 주말엔 쉬고 싶을 테니.
처음엔 주말을 전부 쉬라고 해서 불안해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던 것 같다.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이겠지.
“연휴라고 해서 딱히 할 게 있는 건 아닙니다. 대사님은요?”
“나도 뭐 별거 없습니다.”
중년의 남자들이 혼자서 집에 남아 할 게 뭐가 있을까? 술이나 마시거나 책 좀 읽는 정도.
나도 3일 동안 맛있는 거나 해 먹어야지.
넉넉히 해서 대사님도 좀 나눠 줘야 하나?
“아! 맞다. 대사님 혹시 낚시 좋아하십니까?”
“낚시요?”
3일 내내 뭘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있었다. 재빨리 주머니를 뒤적거려 받아 둔 명함이 그대로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어떤 낚시요? 바다낚시? 아니면 강낚시?”
“뭐든요. 좋아하세요?”
“좋아하죠. 나와 동년배인 사람들 중에 낚시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정도의 차이였지 중년의 남자들에게 낚시는 흔한 취미 중 하나였다. 딱히 취미가 아니어도 생각 정리도 하고, 주위 풍경을 감상하며 평온함을 즐기기 위해 많이들 가는 게 낚시였다.
“그럼 연휴 때 저랑 낚시 같이 가실래요?”
“장 셰프랑요? 괜찮겠어요?”
“당연히 괜찮죠. 제가 불편하세요?”
“아니 그건 내가 물어볼 질문이죠. 불편하지 않겠어요? 쉬는 날에도 나랑 보내면.”
이 와중에도 내 입장을 먼저 물어보는 김용수 대사. 이러니 내가 불편함을 느낄 리가 없지.
“저는 괜찮습니다. 낚시 가실래요? 갈 만한 곳이 있습니다.”
“정말요? 어딘데요? 나 제법 실력 있는 낚시꾼인데. 알고 있어요?”
“그건 몰랐습니다. 어쨌든 좋은 곳인 건 확실합니다.”
나는 연휴에 알렉스의 양조장에 갈 생각이었다.
하루 정도는 알렉스가 좀 귀찮게 하겠지만 또 하루 정도는 맘 편히 쉴 수 있겠지.
조용한 곳에서 쉬기도 하고, 알렉스를 김용수 대사와 직접 만나게 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거긴 무슨 물고기가 많이 올라온답니까?”
나는 대답했다.
“철갑상어 낚시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