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33화 (34/202)
  • 33. 취미

    가까이서 ‘장’이라는 익숙한 발음이 들리니깐 바쁜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호객 행위(?)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스까지 걸려들었다.

    꼭 알렉스를 포섭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파티 주인공의 영향력은 꽤나 강력했다.

    “미스터 장? 당신 풀 네임이 뭔가요?”

    파티의 주인인 알렉스가 내 음식으로 다가오자 주변은 잠시 잠잠해졌다. 방금까지 음식이며, 술이며 먹느라 시끌벅적했는데. 모든 시선이 나와 윤아에게로 몰렸다.

    알렉스 역시 음식에는 관심 없는 듯 내 눈을 쳐다보며 이름을 물었다.

    “장덕수라고 합니다.”

    발음이 다소 어려울 수 있어 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해 줬다. 그렇게 한 번 듣더니 곧잘 따라 하는 알렉스.

    “준비한 음식 좀 드릴까요?”

    아직 애저구이는 맛보지 못한 것 같아 윤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윤아는 서둘러 접시에 애저구이를 담으려 했지만 알렉스의 왼손이 그것들을 저지했다.

    벌써 배가 부른 건가? 아니면 흥미를 끌 만한 음식은 아닌가….

    “고맙지만 이 음식은 나중에 맛볼게요. 대신 이것 좀 더 마셔 봐도 될까요?”

    그렇게 말하는 알렉스의 손가락 끝이 막걸리로 향해 있었다. 잠시 산머루 와인과 막걸리를 오갔긴 했지만 결국 막걸리의 앞에서 멈추었다.

    “막걸리 말씀이신가요? 당연히 드셔도 됩니다.”

    나는 다시 윤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내가 막걸리를 따를 테니 산머루 와인을 준비해 달라 했다. 그래도 둘 다 맛보여 주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이 와인은 이미 맛봤습니다. 막걸리라는 술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서요. 한 번 더 맛보고 싶습니다.”

    알렉스는 궁금한 게 있다면서 막걸리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하며 들이켰다. 산머루 와인은 정중히 거절하면서.

    “크으. 그래 이 맛이야! 아무런 잡내가 나질 않는 이 맛.”

    다시 먹어도 훌륭하다는 듯 크게 감탄하는 알렉스였다. 그의 리액션 덕분에 주변 손님들 역시 막걸리 한 잔씩을 서둘러 챙기기 시작했다.

    덕분에 준비한 막걸리는 금세 동이 났다.

    “비록 만든 지 오래된 술은 아닌 거 같지만 보나 마나 이 술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훌륭한 술이 될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술을 내가 만들었지만 나도 놀랄 정도였으니까. 한국에서도 이 정도로 결과물이 좋았던 적은 없었는데.

    내가 실력으로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술맛이었다.

    “아마 내 입맛이 정확하다면 이 술은 쌀을 발효해서 만드는 것 같은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알렉스는 음식뿐만 아니라 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듯했다. 처음 맛본 술의 재료도 단번에 알아맞히는 건 꽤 섬세한 미각을 갖고 있다는 건데.

    “나도 술을 좋아해서 수많은 종류의 술도 마셔 보고, 연구도 해 보고, 직접 만들기까지 해 봤습니다.”

    역시나 관심이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는 알렉스였다. 술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더 넓고 깊게 알고 있는 듯했다. 한국 전통주들을 제외하곤.

    그건 알렉스보단 내 전문 분야였으니까.

    “요즘에도 취미로 술을 만들고 있는데 영 만족스러운 결과가 안 나오네요. 혹시 덕수 씨, 우리 파나르에도 전통주가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그렇습니까? 보드카 말고도 또 있나요?”

    보드카 아니면 파나르에서 직접 생산한 와인 정도 있겠지. 그것도 아니면 맥주?

    “우리 파나르에도 이 막걸리와 비슷한 전통주가 있습니다.”

    막걸리랑 비슷하다고?

    알렉스는 마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소개하듯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근처에 있던 손님들 역시 알렉스가 말하려고 하는 술이 뭔지 알고 있는 듯했다.

    주위에 몰린 사람들은 전부 파나르 국적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바로 쿠므스라는 술인데 말젖을 발효해서 만드는 술입니다. 색깔은 딱 막걸리인데 맛은 아주 강렬해요. 내가 그 술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오호.”

    나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파나르에도 막걸리와 비슷한 전통주가 있었다니. 만드는 재료는 다르지만 만드는 방법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이 쿠므스는 신선한 말젖을 발효해서 만든 원주에 물을 섞어서 만듭니다.”

    “막걸리를 만드는 방법도 거의 같습니다.”

    나 역시 반가운 마음에 나서서 대답했다. 말젖으로 만든 술이라니. 낯설긴 했지만 그 맛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안 그래도 어제 이 막걸리라는 술의 맛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알렉스는 첫날부터 막걸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괜찮은 술을 맛보고 여기저기 공유하려는 손님들이 많았겠지. 파티의 주인인 알렉스의 귀에는 금세 들어갔을 것이다.

    게다가 진짜 먹어 보니 맛도 꽤 괜찮았다고 했다.

    “쿠므스와 비슷한 술이 다른 나라에도 있구나 해서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산머루 와인도 맛있는데. 그것도 좀 더 관심 가져 주지.

    뿌듯한 맘에 속으로 욕심을 조금 부려 보는 찰나 알렉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

    “만드는 방법도 비슷하고, 재료도 최상급을 사용했는데 왜 내가 만드는 쿠므스엔 잡내가 날까요? 몇 년을 연구하고 만들어 보고 있지만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어요.”

    알렉스는 술을 만드는 게 취미라고 했다.

    일단 부자라서 최고급 재료를 사용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몇 년이나 연구했다는 걸 보면 실제론 취미 수준을 넘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술의 향을 딱 이 막걸리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도대체 이 술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비법을 좀 알려 주시오.”

    이건 진심으로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이 막걸리가 그 정도로 괜찮았나? 나도 만족스럽긴 했지만 비법이라고 할 만한 재료는 없었는데.

    굳이 숨길 이유도 없고, 숨길 만한 것도 없으니 별 고민 없이 막걸리를 만든 과정을 전부 설명했다.

    “쌀을 10번 이상 깨끗한 물에 씻어 주고, 1시간 정도 불려 줍니다. 이 과정에서 쌀에서 나는 잡내가 많이 사라집니다.”

    어느새 뒷주머니에서 메모장과 펜을 꺼내 받아 적고 있는 알렉스였다. 뭐 때문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에 절실해 보이는 사람의 태도인 건 확실했다.

    “쌀은 완전히 익을 정도로 쪄 낸 다음 김이 빠져나갈 때까지 식혀 줍니다.”

    “생각보다 번거롭군요. 막걸리를 만드는 방법은.”

    만만하게 볼 건 아니지. 음식을 만드는 것보단 쉽지만 술은 세세하게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다.

    “잘 쪄 낸 쌀에 맥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맥아와 효모를 섞어서 유리병에 담아 줍니다. 이 유리병은 사용하기 전에 뜨거운 물이나 뜨거운 스팀에 반드시 소독을 해 줘야 발효가 잘되고, 냄새가 좋습니다.”

    냄새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알렉스의 귀가 쫑긋쫑긋 움직이는 것 같았다.

    “최소 2주 정도 발효를 시킨 다음 원주에 깨끗한 물을 섞어서 도수를 조절해 마시면 됩니다.”

    “잠시만요.”

    설명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알렉스가 뭔가를 찾은 사람처럼 물었다.

    “그 원주에 섞는 깨끗한 물. 그 물은 어떤 물을 사용했습니까?”

    물? 그냥 정수기 물을 사용해도 되고, 구할 수 있다면 깨끗한 계곡물 같은 걸 사용해도 된다. 아니면 나처럼 파나르의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사용하든지.

    “물은 그냥 정수기나 생수를 사용하시면 됩니다. 요즘은 워낙 기계가 잘 나와서….”

    “아….”

    알렉스는 내 대답에 크게 실망한 사람처럼 보였다. 원했던 대답이 아닌 듯 곧바로 들고 있던 수첩과 볼펜을 정리하려고 했다.

    “정수기나 생수를 사용해도 충분히 되지만 이번에 만든 막걸리는 좀 다른 물을 사용하긴 했습니다만….”

    “그게 뭡니까? 한국 술이니깐 한국에서 직접 물을 공수해서 가지고 온 겁니까? 아니면 스위스? 그것도 아니면 바이칼?”

    전 세계 좋다는 물은 전부 다 공수해서 사용해 봤다는 알렉스였다.

    비싼 정수기나 생수는 물론이고, 바닷물을 거를 수 있는 초강력 필터까지 사용해 봤지만 만족스러운 술맛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그냥 관저 앞의 물이 깨끗하길래 그걸 사용한 것뿐인데,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또 실망할까 봐 괜히 미안해졌다.

    “저기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사용했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뻗어 시내에 우뚝 솟은 산을 가리켰다. 도심에서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나와서 평소보단 작게 보였지만 여전히 그 산은 웅장했다.

    “저 산에서 녹은 눈이 도시로 흘러 내려온다고 들었습니다. 그 물이 깨끗하다 해서 맛을 보니 아주 좋길래 이 막걸리를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파나르에 정부에서도 식수로 마셔도 된다 했고, 직접 마셔 보니 웬만한 생수보다 청량한 것 같았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관저 가까운 곳에서 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물을 쓴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어쨌든 물 자체는 훌륭하긴 했으니까.

    “파나르의 물을 사용했다고요? 다른 나라에서 가지고 온 게 아니라?”

    “네….”

    그럴 시간이 어딨어. 그리고 우린 너처럼 취미 생활에 쓸 물을 수입해서 쓸 정도로 부자가 아니란 말이다.

    파나르 물을 사용했다고 말하자 주변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쌀을 씻고, 찌고 할 때 전부 파나르의 산에서 내려온 물을 이용한 겁니까?”

    “처음 한두 번은 그냥 수돗물을 사용했고, 마지막 헹구는 물과 찌는 물, 그리고 원주와 섞는 물은 파나르 물을 사용했습니다.”

    내가 무덤덤하게 말을 했고, 윤아 역시 별로 대수롭지 않게 그 말을 통역했다.

    하지만 주위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여기저기서 막걸리를 다시 맛보기 위해 좀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아 있는 막걸리는 거의 없었다.

    “하… 하하. 하하하. 으하하하하.”

    뭐지? 갑자기 실성했나?

    갑자기 허탈한 듯 소리 내어 웃는 알렉스였다. 아니면 드디어 정답을 찾아냈다는 만족감에 터진 웃음인가?

    웃음을 멈춘 알렉스는 나와 윤아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나와 잠시 얘기 좀 합시다.”

    “예? 예예.”

    남아 있던 음식과 술을 이미 바닥이 나고 있었다. 처음부터 더 채워 넣을 생각이 없었으니 맘 편히 알렉스를 따라나섰다.

    “여기 앉으세요. 미스터 장, 그리고 이분은?”

    “임윤아라고 합니다.”

    알렉스가 손짓하자 근처에 서 있던 직원이 재빨리 귀를 갖다 댔다. 그러더니 술 창고로 향하는 직원.

    “내가 만든 쿠므스를 한번 맛봐 주세요.”

    “쿠므스요?”

    술 창고로 향한 직원은 금세 돌아왔다. 그리곤 가져온 쿠므스를 컵에 따라 주었다.

    색이며 농도며 영락없이 막걸리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건 말젖을 발효해서 만들 술이다. 막걸리와는 재료부터 전혀 다른 술이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제가 그냥 취미로 쿠므스라는 술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좋은 맛이 나오면 제 이름을 달고 팔아 볼 수도 있구요. 하하하.”

    자기 이름을 달고 판다는 말이 쑥스러운 듯 크게 소리 내어 웃는 알렉스였다.

    그렇지만 요즘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술 사업을 크게 벌리는 일이 많았다. 알렉스 정도의 인물이 못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나는 우리 파나르에도 파나르를 대표하는 음식과 술이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국에는 소주와 비빔밥이 유명하죠? 그런 것처럼 파나르 하면 딱 떠오르는 음식과 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국을 대표하는 술을 소주라 생각하는 건 조금 아쉽긴 했다. 그래도 파나르보다 나은 상황인 건 확실했다.

    “다른 건 어느 정도 알겠는데 술을 만드는 물을 어떤 걸 써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스위스나 바이칼 등의 물을 가져올 수 없었으니 파나르의 물을 선택한 것이었다.

    직접 비교해 보진 못했지만 그 어떤 물보다 훌륭한 결과물을 가져다준 건 확실했다.

    “근데 덕수 씨가 우리 파나르의 물을 사용해서 술을 만들었단 소리를 듣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거 같더군요.”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아니면 가까이 있어서 그 물이 얼마나 귀한지 알지 못했던 건가.

    비싼 돈을 써서 좋은 물로 쿠므스를 만들었는데 한 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다 했다.

    파나르 물 맛이 얼마나 좋은데 뭐 하러 멀리까지 가서 찾나? 바로 퍼 마시면 신선하기까지 한데.

    “자 어서 한번 드셔 보세요. 제가 만든 쿠므스입니다.”

    나와 윤아는 뽀얀 쿠므스가 담긴 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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