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31화 (32/202)
  • 31. 궁궐이야 별장이야

    “어디 가세요 참사관님?”

    동작이 빠른 준우가 서둘러 자리에서 따라 일어났지만 지용은 이미 사라져 버린 이후였다.

    화장실이라도 급했던 건가? 뛰쳐나가는 뒷모습만 보면 꼭 화장실이 급했던 사람 같긴 했다.

    “우리 이거 한 통만 마십시다!”

    “에엑!”

    지용의 입술은 수육의 기름기를 채 닦아 내지 못해 윤기가 났다. 그렇게 급하게 가서 가져온 것은 오늘 담가 둔 막걸리 한 통.

    사실 지금은 막걸리라고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냥 물과 쌀이 섞여 있는 것일 뿐.

    “도저히 못 참겠네요. 이런 음식을 먹으면서 술 한 잔도 안 한다는 거는 고문입니다 고문.”

    지용 역시 사람이었다. 항상 차분할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오히려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오늘은 막걸리를 마실 수 없을 것 같네요.

    “참사관님께 그거 한 병 드리는 건 일도 아니지만 아직은 아무 맛도 안 날 겁니다.”

    “왜요! 우리 오늘 막걸리 만든 거 아닙니까? 그럼 저 산머루 와인은요? 그것도 안 됩니까?”

    이건 떼쓴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알코올은커녕 발효가 시작도 안 되었을 것이다.

    미리 맥주라도 사 둘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럼 빨리 가서 맥주 몇 병 사 오겠습니다. 괜찮죠 대사님?”

    “물론이죠. 오늘은 그냥 공휴일이라 생각합시다.”

    졸지에 회식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발효도 되지 않고, 아직 맛도 안 난 술을, 아니 물을 먹는 거보다, 조금 늦어도 시원한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사 먹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지.

    고되게 일을 한 다음이라 그런지 시원한 맥주가 달달하게 느껴졌다.

    “대사님. 이렇게 전 직원이 모여서 술 한잔하니깐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게요. 이제 대사관도 안정이 된 것 같으니 종종 이런 시간을 가집시다.”

    준우가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김용수 대사 역시 이 자리가 꽤 재밌어 보였다.

    대사관 정상화라는 생각만으로 몇 달 동안 달려왔는데, 이제는 조금 숨을 고를 정도의 궤도엔 올라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얼마 전 최우수 공관이라는 것을 통해 증명도 했고.

    “우연치 않게 시작된 술자리지만 여러분들 덕분에 우리 대사관이 빠르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다들.”

    “아닙니다. 저희가 감사하죠.”

    “모두가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저희 한인회도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대사관에서 제일 막내였던 윤아도 이제는 김용수 대사를 대하는 게 그리 힘들어 보이진 않았다. 나야 뭐 말할 것도 없이 편했고.

    해외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국경일 행사를 비롯해 명절이나 한국 기업들의 진출을 돕는 일 등등 굵직굵직한 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시작이니 지치지 말고 지금처럼만 잘해 봅시다!”

    “좋습니다! 파나르 대사관을 위하여!”

    비록 그리웠던 한국의 맛 막걸리와 산머루 와인을 맛보진 못했지만 나와 김상율 회장을 비롯해 대사관 직원들 사이에 끈끈한 뭔가가 생긴 날이었다.

    * * *

    알렉스의 별장.

    처음엔 김용수 대사의 말처럼 부담을 안 가지려 했다. 하지만 함께 술을 만들고, 고생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무거운 맘을 지고 파티장까지 오게 되었다. 마치 특사가 된 것처럼.

    “우와 1시간 넘게 계속 허허벌판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게 나오네.”

    “그러게. 이런 곳에 이런 호텔이 있는지도 몰랐어.”

    파나르어로 소통하는 게 쉽지 않은 날 위해 윤아가 함께 파티에 동행하기로 했다.

    대신 직원 등록은 통역사가 아닌 주방 보조로.

    초대받은 요리사는 자신이 원하는 주방 보조 한 명과 동행할 수 있었다. 통역사로는 거절당했지만 윤아를 주방 보조로 등록해 동행할 수 있었다.

    “완전 경계가 살벌하다 살벌해. 무슨 군대 같다.”

    “너무 긴장하지 마. 정식으로 초대받은 거잖아 우리는.”

    알렉스의 별장 주위에는 높은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내 어깨 정도 오는 높이의 담장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곳곳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자기들끼리 편하게 놀고 싶어서 그랬다곤 하는데 괜히 긴장이 되었다.

    “이제 들어가자. 요리사 장덕수, 보조 임윤아입니다.”

    역시나 직원들을 위한 입구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 입구조차도 금테가 둘러진 것처럼 초호화 시설.

    문을 지키는 경비들도 초대된 요리사들을 한 명 한 명씩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장덕수?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한국 사람입니다.”

    영화에서나 드라마에서도 이런 분위기의 게이트를 손쉽게 통과한 걸 본 적이 없었다. 일부러 긴장감을 주기 위해 그러는 건지 명단을 한 번 더 쓱 살펴보는 경비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직원 등록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윤아는 그런 분위기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 먼저 나서서 말을 했다.

    샤샤가 올해 요리사들은 전부 등록된 다음 말을 한 거라 혹시 경비가 못 알아보면 차분히 잘 설명을 하면 된다 했다. 그렇지만 분위기가 꽤나 살벌한 걸 어떡해.

    “미스터 장입니까?”

    “네 맞습니다.”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던 경비가 꽤 오랫동안 시간을 끌자 뒤쪽에서 다른 경비 한 명이 뛰어나왔다. 이 경비는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는 듯 곧바로 내 이름을 말했다.

    “샤샤 기자님과 아는 사이라는 걸 증명할 뭔가가 있습니까?”

    “증명이요?”

    이미 협의가 끝났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워낙 콩고물 떨어질 게 많아 사칭하고 들어오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조금만 양해 부탁한다고 점잖게 말을 하니 불쾌한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샤샤 씨의 명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여 주십쇼.”

    저번에 샤샤가 꼭 가지고 있으라며 건넨 명함이었다. 번호와 이메일은 따로 등록을 해 놨으니 종이 명함까지 갖고 있을 필요는 없었지만 까먹고 지갑에 넣어 둔 상태였다.

    “네 들어가세요. 이거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에서는 종이 명함의 힘이 많이 사라졌지만 파나르에선 아직 먹히는 아이템이었다. 샤샤가 준 명함은 출입증처럼 그곳을 통과시켜 주었다. 결국엔 통과했겠지만 이게 없었으면 괜히 골치 좀 아플 뻔했다.

    “이 방을 하나씩 사용하시면 됩니다.”

    “와아 각자 방 하나씩을 주네.”

    “알렉스인데 당연히 그 정도는 해 줘야지.”

    보수도 만만치 않은데 호텔 같은 방을 하나씩 내어 주니 대접받는 느낌이 들었다. 스위트룸 같은 건 전부 손님들이 쓰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3일 동안 잠자리 불편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필요하시면 지금부터 주방이랑 식재료 창고는 둘러보셔도 됩니다. 그리고 혹시 필요한 재료가 더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문을 통과하고 나서부터는 지배인 같은 사람이 담당해서 우리를 안내해 줬다.

    몇 마디 내뱉고 앞서 걸은 것뿐이었지만 엄청난 신뢰가 뿜어져 나오는 사람이었다. 진짜 원하는 건 전부 다 당장이라도 구해 줄 것 같다.

    “이것 좀 와인 셀러에 보관 좀 부탁드립니다. 이 술들은 그냥 창고에 넣어 주시면 되구요.”

    산머루 와인과 막걸리를 잔뜩 실은 트럭이 우리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내가 가져온 술의 양에 한 번 놀라고, 아무런 라벨링도 되지 않은 와인병에 또 한 번 놀랐다.

    직접 만든 거라고 한참 동안이나 설명해야 셀러에 넣어 주는 지배인이었다.

    설마 독약이라도 탔을까 봐….

    “온갖 진귀한 술은 다 준비되어 있는데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만들어 오셨습니까?”

    지배인도 이런 요리사는 처음이라는 듯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꼭 한 번 맛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얼핏 보기엔 많은 양 같았지만 입맛에만 맞다면 아마 하루 만에 동이 날 양이었다.

    내 계산이 맞다면 입도 대 보지 못한 손님들도 제법 있을 거고.

    호리병 모양의 원조 플라스틱 막걸리병은 구하지 못했지만 최대한 비슷한 유리병을 구해 깨끗하게 포장까지 했다.

    이걸 준비하느라 대사관 직원들과 김상율 한인회 회장님까지 나서서 고생해 주셨으니 최대한 이쁘게라도 포장하고 싶었다.

    “하루라도 더 숙성시켜야 맛이 좋을 테니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죠.”

    역시나 믿음이 가는 지배인의 말투였다. 그 정도쯤은 말 안 해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늦게 등록된 탓에 파티의 가장 마지막 날 요리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앞선 이틀 동안은 맘 편히 즐길 수 있었다. 100% 맘 편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짐 다 풀었으면 주방 구경하러 갈래?”

    “그럴까?”

    아직 도착도 하지 않은 요리사들이 많았고, 손님들은 전부 내일 올 테니 파티가 열리는 별장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오히려 이렇게 여유로울 때 천천히 주방이나 식재료를 둘러보는 게 훨씬 좋았다.

    “와우.”

    주방을 둘러보자 짧은 감탄이 튀어나왔다. 쓸데없이 오랫동안 놀라기보다 본능적으로 발걸음이 떨어졌다.

    “오븐은 종류별로 다 있고, 찜기, 육절기 일단 장비는 없는 게 없네. 이 기계 엄청 좋아 보이지 윤아야?”

    뒤를 돌아봤지만 윤아는 여전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엄청난 주방 규모에 아직 놀라고 있는 거겠지.

    “야 이리로 와. 적어도 기계에서 스위치가 어딨는지는 알아야지.”

    “어… 어? 알았어 갈게.”

    나한테도 이렇게 큰 주방은 낯설 정도였다.

    모양은 호텔의 주방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과 비슷했지만 업태별로 여러 개 주방으로 나뉘어 있는 호텔과는 다르게 이곳은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그 크기는 윤아를 부를 때 메아리가 울릴 정도였다.

    “내가 이런 데서 주방 보조를 할 수 있을까?”

    “걱정 마. 요리는 내가 다 할 테니 그냥 통역만 해 줘.”

    “어떻게 그래.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는 사람은 나뿐일 텐데.”

    내일이면 이곳에 요리사들과 주방 보조들이 바글바글하게 들어설 것이다.

    주방 보조로 온 사람들도 한 레스토랑의 셰프 정도의 실력은 될 거라 예상해 봤다. 회귀 전의 나였어도 이런 자리에 초대된다면 긴장했을 것이다.

    “일찍 오길 잘했다. 이 크기에 좀 익숙해질 필요가 있겠어.”

    “맞아. 특히 나는 너무 필요해. 어버버리할 거 같은데.”

    그러고는 의도적으로 주방 내부를 돌아다니는 윤아였다. 그냥 저렇게 돌아만 다닌다고 바뀔 건 없는데….

    본인이 저렇게 해서 긴장이 풀린다면 뭐 말릴 이유는 없었다.

    “다 봤어? 이제 워크인에 가 볼까?”

    “워크인? 그게 뭐야?”

    걸어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냉장고라고 해서 워크인.

    요즘엔 조금 큰 식당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런 곳에는 여러 개의 워크인이 있을 게 뻔했다.

    “이 건물이 전부 냉장고라고?”

    “건물? 그렇게 보일 수 있겠네. 이것뿐만 아니라 저기랑 저기도 다 냉장고네.”

    윤아가 보기엔 작은 건물 같아 보였을 것이다. 진짜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니까.

    게다가 그런 워크인이 냉장, 냉동을 합쳐서 7개나 있었다.

    “이렇게 큰 냉장고인데도 전부 가득 차 있네.”

    “엄청 많아 보여도 금방 쓸걸? 3일 동안 매일 몇백 명이나 온다며.”

    “그… 그래?”

    3일 동안 수백 명이 왔다 가는데 이 정도 식재료는 금방 동이 날 것이다. 그리고 다 먹지 못하더라도 일단 쓸 수 있는 식재료는 전부 다 사 놨다고 했으니 엄청난 양이긴 했다.

    내가 따로 주문할 식재료는 없을 것 같네.

    “덕수야 이리로 와 봐.”

    돌아선 채로 나를 부르는 윤아의 목소리엔 호기심 반, 놀라움 반이 섞여 있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까? 불러 놓고선 돌아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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