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관저는 양조장
“산머루 와인이랑 수제 막걸리.”
“엥? 음식이 아니라 술?”
윤아 역시 김용수 대사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다들 맛있고 최고급의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겠지. 하지만 직접 술을 만드는 요리사는 많지 않겠지?
역시나 온갖 고급술은 다 모이겠지만 이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비싼 게 아니라 독특한 것일 테니.
그래서 난 한국의 술 막걸리와 산머루 와인으로 승부를 걸어 보기로 결정했다. 약간의 마케팅 기법을 가미해서.
“그래서 말인데 내일 당장 이 종이에 적힌 것들 좀 주문해 줘.”
“이거? 산머루야? 이게 파나르어로 뭐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윤아도 산머루라는 단어를 파나르어로 뭐라고 하는지 몰랐다. 그렇지만 시장이며 산이며 널려 있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봤으니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아 있다. 이게 산머루였구나.”
인터넷을 잠시 뒤지더니 금세 정답을 찾아내는 윤아였다. 파나르에서도 잼이나 말려서 간식으로 자주 먹는다 했다.
그게 산머루인지 뭔지도 모르고 맛있으니 그냥 먹었다는 윤아.
“여튼 산머루랑 여기에 적힌 것 좀 다 구해 주라.”
“흐익 이렇게나 많이?”
“돈 더 줄 테니깐 관저까지 배달 좀 해 달라고 해 줘.”
나 역시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많은 양을 만들어야 했다.
이러다가 괜찮은 술이 나오면 이참에 양조장이나 하나 운영해 볼까.
“와인용 효모랑 맥아는 파나르에서도 흔히 쓰는 거니깐 리큐르샵 같은 곳 가면 구할 수 있을 거야. 좀 물어봐 주라.”
“어… 알았어.”
“대신 쌀은 내가 보고 살 테니깐 그것만 알아봐 줘.”
막걸리용 쌀은 말로 설명해 줘 봤자 윤아가 이해하기엔 쉽지 않았다. 수분 함량이나 모양 등을 체크해서 막걸리로 만들기에 적합한 쌀을 찾아야 했으니.
* * *
다음 날.
“대사님 사무실 직원들 손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재료는 확보가 되었으니 이제 부족한 일손을 확보해야 했다.
준비해야 할 연회용 술의 양도 제법 많았지만 그 정돈 하루면 충분했다. 그 후론 주기적으로 몇 번 섞어 주고, 확인만 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연회용 술 말고도 훨씬 많은 술을 준비해야 했다.
“필요하다면 시간은 낼 수 있는데 왜요?”
“대사님의 도움도 좀 필요합니다.”
“저도요?”
이번엔 혼자서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양조장처럼 시설이 잘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전부 수작업으로 해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손이 필요했다.
“네 가능하다면 대사님의 손까지 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꺼내면서 싱긋 웃자 김용수 대사는 주춤했다. 뭔가 만만치 않은 일을 시킬 것 같다는 예감을 한 걸까.
“…제가 도움이 될까요?”
“네 이참에 다 같이 모여서 단합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내 집들이를 제외하곤 전 직원들이 모인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땐 김용수 대사가 빠졌으니 엄밀히 말하면 한 번도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마침 낼 모레가 파나르 공휴일이라 사무실이 쉴지 말지 고민 중이었는데 그날 모이는 걸로 하죠.”
어… 그러면 단합이 안 되는데. 쉬는 날엔 아무리 진귀한 걸 줘도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쉬는 날인데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대신 다음 주에 대체 휴무를 써서 금토일 연달아 쉬게 해 줄게요.”
“오 그러면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큰 불만 없이 대사님을 비롯해 전 직원이 모이게 되었다. 대량의 산머루 와인과 막걸리를 담그기 위해.
* * *
이틀 후.
“음 벌써부터 향긋한 술 냄새가 올라오는 거 같은데요?”
머루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오버하는 준우였다. 준우는 대체 휴무 얘기를 꺼내기도 전부터 나가겠다고 대답을 한 상태였다.
“저도 쉬는 게 좋긴 하지만 사실 혼자 있어서 심심할 때가 많거든요. 다 같이 이런 거 할 일 있으면 항상 불러 주세요.”
이번에도 조금 오버 섞인 말투였지만 진심도 담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혼자서 해외 생활 하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나 역시 조금은 알아 가고 있었으니까.
준우처럼 열정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겉으론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술 만드는 일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양손에 2리터짜리 빈 페트병 두 개를 들고 온 지용을 보자 모두가 웃음이 터져 버렸다.
평소 얌전하고 차분한 성격의 지용이었지만 술 앞에선 딱히 체면을 차리지 않는 듯했다.
“쉬는 날인데 도와주러 오셔서 감사드립니다. 대신 맛있는 것도 준비해 뒀으니 식사도 하시고 가세요.”
“예에!”
맛있는 거라는 말에 역시나 윤아의 환호성이 가장 크게 들렸다. 준우와 지용 역시 기대하는 눈치였고.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일단 많은 양의 머루와 쌀을 손질해야 했기에 관저 마당에서 모든 것을 준비했다. 쌀을 찌는 것도 장작불을 피워서 해 볼까도 했지만 불 조절이 힘들 것 같아 가스레인지를 설치했다.
“산머루는 너무 깨끗하게 씻을 필요는 없고, 나뭇가지나 먼지 정도만 씻겨 나가게 3번 정도 헹궈 주세요.”
시장에서 주문한 산머루는 값이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전부 자연산 산머루였다.
종종 찾는 사람이 있지만 수요가 그리 많지는 않아서 양식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이 산머루들은 농약을 하나도 치지 않은 무공해라는 의미.
자연산 산머루의 껍질에는 와인을 더 잘 숙성시킬 천연 효모가 많이 묻어 있다. 그것들까지 깨끗이 씻어 낼 필요는 없었다.
“대신 쌀은 적어도 10번은 헹궈 주셔야 해요. 하얀 물이 안 나올 정도로.”
“근데 쌀을 너무 많이 씻으면 밥맛이 없어진다고 하던데 이렇게 많이 씻어도 돼?”
그건 밥을 할 때 얘기고.
막걸리를 담글 때 쌀은 최대한 깨끗하게 씻어 내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잡내 없이 깔끔한 막걸리를 만들 수 있다.
“김준우 서기관님, 잠시만 저랑 힘쓰러 가실래요?”
“힘이요? 좋습니다. 가시죠.”
남은 인원들에게 재료 손질을 맡겨 두고 나는 준우와 함께 관저를 나섰다.
커다란 플라스틱 통 하나를 들고서.
“저기 산에서 내려오는 물 맛이 좋다더라구요. 그래서 그걸로 막걸리 만들어 볼까 해서요.”
“이야 그래도 이 물을 바로 써도 돼요? 요즘 한국은 완전 깊은 산속 계곡물 아니면 바로 먹기 좀 그렇잖아요.”
파나르는 땅이 큰 만큼 뒷산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히말라야산맥에서부터 이어진 산의 높이는 비록 뒷산이지만 3천미터가 훌쩍 넘는 높이였다.
그 산에 쌓인 눈이 녹아 도시로 흘러 내려오는데 그 물이 알프스의 물 맛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솔직히 이 물이 에미안보다 못할 거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정말 그 정도예요?”
갑자기 계곡물에 얼굴을 묻고 물을 들이켜는 준우.
이런 리액션이 가끔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지만 뭔가 설명을 해 줄 땐 덩달아 나도 신이 났다.
“파나르 정부에서도 이 물을 식수로 이용해도 된다고 많이 홍보하고 있더라구요.”
“아 정말요? 저도 그거까진 몰랐네요.”
준우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 것이었다. 이 물이 얼마나 깨끗하고 맛이 좋은지 교민들에게도 홍보해 달라는 파나르 정부의 공문을 받은 적 있었다 했다.
“자 힘내세요! 하나 둘 셋.”
“으샤.”
물길이 잔잔한 곳에서 최대한 불순물이 섞이지 않도록 한 통 가득 물을 담았다.
도심에서 이런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있다는 게 조금 신기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또 이런 물로 만든 막걸리는 얼마나 맛이 좋을지 기대도 됐다.
“손질이 다 끝나셨어요?”
깨끗한 물을 뜨느라 시간이 좀 오래 걸렸나 보다. 돌아오니 그 많던 산머루며 쌀이며 전부 손질이 끝나 있었다.
“근데 회장님 손이 왜 그러세요?”
“제가 장잡 끼는 걸 영 불편해해서….”
손바닥 전체가 멍든 것처럼 시꺼메진 상율이었다. 산머루를 만질 땐 비닐장갑이라도 하나 끼고 하라고 했건만.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자 그럼 회장님은 계속 산머루 와인 담당해 주시고, 쌀은 어느 정도 불려 뒀으니깐 쪄 볼까요?”
손이 시꺼메진 상율에게 산머루를 으깨는 작업을 맡겼다. 늦었지만 장갑을 끼라고 권했지만 역시나 이미 늦었다는 이유로 다시 맨손으로 산머루를 으깨고 있었다.
집에 가서 손 씻다 잠들어 봐야 후회하겠지.
커다란 찜기에 면보를 깔고 깨끗한 씻은 쌀을 쪄 주었다. 양이 많아 한 번으로는 힘들어 여러 번 찌고 식혀 주는 과정을 반복했다.
“산머루는 다 으깼는데 이거면 됩니까?”
이제는 손등까지 시꺼메진 상율의 손이었다.
으깬 산머루에 꿀과 설탕 적당량을 넣어서 잘 섞어 주면 그걸로 끝이었다. 이제는 잘 숙성시키기만 하면 그만.
“회장님 이제 손 씻으셔도 돼요. 어차피 안 지워지겠지만.”
“허허허 집에 가서 와이프한테 잔소리 좀 들어야겠네요.”
막걸리 역시 쪄 낸 쌀에다가 산에서 내려온 물, 맥아, 효모를 넣어 잘 섞어 주었다. 커다란 유리병 수십 개에 담을 수 있을 양이었다.
“이제 정리 좀 해 볼까요?”
준비된 재료들을 전부 손질해 병에 담는 것까지는 끝이 났다. 이제는 적당한 온도에 발효시키고, 숙성하기만 하면 된다. 그게 제일 까다롭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많은 손이 필요한 단계는 끝이라고 보면 된다.
“요리사님.”
“네?”
마당에 널브러진 기구들과 재료들을 전부 정리하고 나니 준우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는 준우.
출출하다는 의미였다.
“빡시게 일해서 그런지 저도 출출하네요.”
“그래요. 장 셰프 다 같이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까요?”
이렇게 고생했는데 겨우 라면이라니.
이 사람들이 순순히 부름에 응한 건 대사의 지시이기도 했지만 아마 관저에 가면 맛있는 걸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겨우 라면 가지고 되겠습니까? 사실 아까부터 준비하고 있던 음식이 있는데 같이 나눠 드시죠.”
“오! 역시 요리사님.”
마당에서 술을 준비할 때, 관저 안 주방에서는 돼지고기 수육을 삶아 내고 있었다.
양파, 대파, 마늘, 생강, 인삼, 대추, 밤, 맛술 등 재료를 넣고 끓여 낸 돼지고기 수육이었다.
“이야 뭔가 한방 수육 냄새가 나는데요?”
“언제 이런 걸 준비했대요?”
많은 양을 쉽게 만들 수 있어서 수육을 고른 이유도 있었다. 그냥 불에 올려놓고 틈틈이 확인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내가 오늘 수육을 만든 이유는 약간의 연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잠시만요. 이대로 먹을 건 아니고 한 번 더 구워 낼 거예요.”
“수육을 구워요?”
왜냐면 나도 구우면 어떻게 맛이 변할지 모르겠으니까.
이대로 삶아 낸 고기가 맛있을지 한 번 구워 내도 부드러운 식감이 살아 있을지 테스트해 보는 것이었다.
“알렉스의 파티에서 비슷한 음식을 하려고 하는데 그냥 쪄 내는 것보다 한 번 구워 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전통 애저찜은 국물과 함께 먹는 음식인데 그 맛이 백숙처럼 담백하고, 비주얼 역시 국밥처럼 한 그릇에 담겨 나온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전통 방식으로 새끼 돼지 한 마리를 통으로 쪄 낸 뒤 그대로 불에 구워 제공하려 했다.
그래야 색깔도 훨씬 맛깔스러워 보일 거고, 통으로 제공해야지만 눈에 띄는 음식이 될 테니까.
“이렇게 쪄 낸 수육을 숯불에다가 한 번 구워서 드셔 보세요.”
다들 숯불을 준비하는 시간을 참기 힘들어했지만 칼은 내가 쥐고 있었다.
조금만 도와주세요. 다 대사관이 잘되기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
“자 이제 드셔 보세요.”
“와아….”
찌는 단계에서 이미 잡내는 전부 사라졌고, 육질은 부드럽게 씹힐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런 고기를 직접 불에 구워 내니 풍성한 불 향이 더해지고, 훨씬 맛깔스러운 갈색으로 변해 버렸다.
“일단 색깔에서부터 합격입니다. 합격.”
“이건 뭐 보나 마나 맛있는 거 아닙니까?”
아직도 기름기가 빠지고 있는 담백한 돼지고기를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커다란 도마 위에 몇 덩어리를 올려 수육을 썰기 시작했다.
애저찜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 결은 같은 요리였으니 이만하면 테스트용으로는 충분했다.
“…안 되겠다.”
안지용 참사관은 고기를 한 점 씹더니 못 참겠다며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