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29화 (30/202)
  • 29. 특사로 파견

    “근데 장 셰프. 짧은 기간에 돈을 크게 벌 수 있는 기회니깐 보내 드리는 것도 있지만 저도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부탁입니까?”

    “나중에 국경일 행사가 있다는 걸 좀 알려 줘요.”

    해외의 대사관이나 총영사관 등 공관들은 매년 국경일 행사라는 것을 진행한다.

    보통 각국의 건국일이나 독립 기념일에 국경일 행사를 진행하는데 한국은 휴가철이 겹치는 8월 15일 광복절보다 10월 3일 개천절에 주로 진행한다.

    한국의 문화나 공연, 음식 등을 준비해서 국격을 자랑하고, 성과를 알리는 행사인데 이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참석하는 손님들이다.

    “국경일 행사에 굵직굵직한 손님들이 와 주면 좋은 건 당연하고, 그 숫자도 많아야 합니다. 평가 기준이 조금 올드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걸 보여 주기 위해 하는 행사라 어쩔 수 없네요.”

    “그러니깐 이 파티에 가서 국경일 행사에 초대할 만한 사람들과 안면을 터 놓으라는 말씀이신 거죠?”

    “네 단순히 안면을 트는 것보다 국경일 행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부탁까지 해 주면 더 좋고요.”

    “제… 제가요?

    “장 셰프만 들어갈 수 있으니… 내년부턴 나도 꼭 초대받아 볼게요.”

    얘기를 들어 보면 꽤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거라 생각할 수 있었지만 김용수 대사의 표정에선 장난기가 묻어났다.

    내가 정식 외교관도 아니고, 진지한 태도로 이런 일을 시킬 리 없었다.

    그냥 가서 파나르에 한국 대사관이 돌아왔고, 매년 국경일 행사라는 것이 있으니 알고 있으라. 정도면 된다 했다.

    사실 그 정도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나는 일을 하느라 바쁠 테니.

    “일단 제 본분을 다하고 오겠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좋은 결과도 따라올 겁니다. 오히려 너무 매달리면 오려던 것도 안 오게 되거든요.”

    * * *

    며칠 뒤 관저.

    “장 셰프. 알렉스의 생일엔 무슨 요리를 만들기로 했어요? 우리 관저에서 했던 음식들보다 더 잘하면 안 되는 거 알죠?”

    질투하는 사람처럼 김용수 대사가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말은 그렇게 해도 기왕이면 음식으로라도 좀 더 주목을 받길 바란다 했다.

    “그래서 말씀인데 요리보다 술에 조금 더 힘을 써 보는 건 어떨까요?”

    “술이요?”

    “네 한국의 전통주를 직접 만들어서 맛을 보여 주면 좀 더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해서요.”

    내 입에 의외의 메뉴가 나오자 김용수 대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렉스의 생일과 비슷했던 초호화 연회들을 기억해 보는 거겠지.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대부분 술도 함께 즐기는 것을 좋아한다. 알렉스 역시 전 세계 다양한 음식만큼 독특한 술들도 찾아서 마셨을 것이다.

    “그래서 술은 어떤 술을 준비하려구요?”

    내 전략이 나쁘지 않다는 듯 김용수 대사는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다시 물었다. 김용수 대사도 과음은 아니지만 평소에 술을 즐기는 편이었다.

    “막걸리랑 산머루 와인을 좀 담가 보려 합니다.”

    “오! 막걸리.”

    해외에서 한국의 술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대신 소주라는 품목에 한해서만.

    한국 맥주보다 싸고 맛있는 현지 맥주가 널리고 널렸고, 와인이며, 보드카며 마실 술은 엄청나게 다양했다.

    그나마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는 소주가 한국 술이라며 몇 종이 들어와 있는데 소주는 현지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향이나 풍미가 적은 술이라면 알코올이라도 센 보드카를 먹는 게 나았으니.

    “막걸리는 그렇다 쳐도, 산머루 와인 그건 뭔가요?”

    와인을 자주 즐기는 사람이라도 들어 보지 못했을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그냥 머루주이지만 포도과 과일인 머루를 숙성해 만든 술이니 와인의 일종이었다.

    “예전에 지리산 둘레길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 산머루로 와인을 만드는 양조장이 있더라구요. 와이너리도 웬만한 유럽보다 잘해 놨고, 술맛도 굉장히 좋아서 그 후로도 자주 사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 정말요? 그런 와인이 있어요?”

    “네 국제 대회에서도 수상할 정도로 맛이 꽤 괜찮습니다. 단점이라면 역사가 짧다는 것뿐이죠.”

    아무래도 양조장을 지은 지가 30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빈티지가 오래된 와인은 없다. 하지만 그 맛은 유럽의 정통 와인들과 비교해서 크게 떨어지지 않는 맛.

    항상 새로운 술이나 와인을 찾는 미식가들이 관심을 가지기엔 충분했다.

    “그런데 파나르에서도 산머루라는 게 있나요?”

    “네. 몰라서 그렇지 산에 널리고 널린 게 산머루고, 시장에서도 싼값에 취급하더라구요.”

    시장에서 처음 봤을 땐 그게 당연히 블루베리라 생각해서 그냥 지나쳤다.

    근데 소스를 만들려고 이 블루베리를 달라 하니 블루베리가 아니란다.

    파나르어로 뭐라뭐라 했는데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혹시나 해서 블루베리와 함께 그 과일도 같이 조금 샀었는데 그게 바로 산머루였다.

    여기저기 물어보니 산머루는 파나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과일이었다.

    “시간이 몇 주밖에 남지 않았으니 조금 촉박하겠네요.”

    “어차피 산머루 와인은 빈티지로 승부 보는 와인이 아니라 숙성 시간은 크게 상관없고, 막걸리는 원주에 섞을 물 양을 조금 줄이면 됩니다.”

    “원주?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장 셰프를 믿을게요. 술로 관심을 끈다는 아이디어는 괜찮은 거 같아요.”

    김용수 대사도 알렉스의 생일 파티만큼은 아니어도 초호화 연회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다고 했다.

    너무 많은 음식이 준비되어 있어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놓치는 음식이 많았다. 욕심 같아선 전부 다 맛보고 싶었지만 배가 불러서 그러지 못하기도 했고.

    근데 술은 취하더라도 배가 불러 못 마시는 경우는 적었고, 특이한 술이라면 꼭 한번 맛이라도 보고 싶었다 했다.

    “몇백 명이나 초대된다는데 만들어야 할 술 양이 엄청나겠네요. 혼자서 괜찮겠어요?”

    그들의 입맛에 맞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맛있게 마신다는 전제하에 준비해야 할 술의 양은 꽤 많아야 했다. 음식은 한계가 있지만 술은 물처럼 마셔 댈 테니.

    “일단 만들기는 넉넉하게 만들 텐데, 파티장엔 많이 가져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네? 말을 들어 보니 음식이나 술이 부족하지 않도록 충분히 준비하라고 했다는데요.”

    설령 남은 음식이 산처럼 많다고 해도 모자라게 만들지 말라는 알렉스의 요구 사항이었다.

    그래서 급여도 많이 주는 거고, 호텔 방이며 요리사들을 위한 온갖 편의 사항을 전부 제공해 주는 거였다.

    “근데 음식이라는 게 아무리 맛있게 먹어도 그걸 배 터지게 실컷 먹고 나면 기억에 잘 남지 않더라구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배가 부를 때쯤이면 그 맛이 질리게 된다. 고소하고 육즙이 줄줄 흐르는 삼겹살이라도 계속 먹으면 느끼하고, 퍽퍽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음식은 물론 술 역시 적당히 마시고 취해야 그 맛을 기억하고, 그리워할 수 있다. 만취해 버리면 내가 무슨 술을 마시고 취한 건지 기억조차 하기 힘들었다.

    “일리가 있네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 음식과 술을 조금 모자라게 제공할 생각입니다.”

    “흠….”

    김용수 대사는 조금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넉넉히 만들어 달라고 대놓고 판을 깔아 줬는데도 모자란다면.

    “오히려 반감을 사게 되지는 않을까요?”

    나도 그 걱정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맛있게 먹던 음식이 끊기는 것만큼 아쉽고 불쾌한 기분은 없을 테니.

    그래서 적당한 핑계를 미리 준비해 둬야 했다.

    “분명 그 찰나에는 굉장히 불쾌해할 수 있습니다.”

    “흠… 조금 걱정이 되네요. 좋은 기억은 금방 잊어도 불쾌한 기억은 오래 남는 법인데… 이럴 거면 국경일 행사 초대장을 보냈을 때 아예 기억을 못 하는 게 오히려 더 가능성이 있을지도….”

    좋은 기억을 주지 못할 바엔 그냥 아무 기억조차 못 하게 만드는 게 낫다는 김용수 대사였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단 주문해야 할 재료 양이 많으니 그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윤아야 오늘 퇴근하고 잠시 만날 수 있어?

    -응 시간은 되지. 왜?

    -이번 알렉스의 파티에 대해서 상의 좀 하려구. 부탁할 것도 있구.

    윤아는 통역사 겸 주방 보조로 동행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내 계획을 미리 공유하는 게 좋았다.

    “우리 거기 가서 무슨 음식을 만들 거야? 한식을 하더라도 엄청 고급 재료를 써서 만들어야겠지?”

    “아무래도 부자들이 많을 테니깐….”

    최고급 식재료를 마음껏 쓸 수 있으니 그래 볼까 생각도 했다. 아니 사실 한참 동안이나 고민했다.

    캐비어를 듬뿍 올린 보쌈을 만들어 볼까? 아니면 푸아그라로 맑은 탕을 끓여 볼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비싸기만 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마구 걸친 느낌이라는 결론이었다.

    “근데 음식은 딱 한 가지만 할 거야.”

    “딱 하나만?”

    모르긴 몰라도 3일 동안 만들어지는 음식 개수만 해도 100가지는 훌쩍 넘을 것이다. 거기다가 전부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수준 높은 음식들이.

    그중에서 내 음식이 눈에 띌 수 있는 확률은 얼마일까?

    높게 쳐줘 봐야 10% 안팎일 것이다.

    “우리는 새끼 돼지로 요리를 할 거야.”

    “새끼 돼지?”

    내가 선택한 한 가지 식재료는 애저라는 새끼 돼지였다.

    새끼 돼지와 각종 약초를 넣어 쪄 낸 음식인데 조선 시대에 특히 연회에서 자주 먹던 음식이었다.

    “불쌍해.”

    “뭐가 불쌍해?”

    “돼지 새끼, 아니 새끼 돼지가.”

    불쌍해도 어쩔 수 없다. 돼지고기를 안 먹고 살 수는 없으니. 대신 최대한 위생적이고, 스트레스 없이 도축한 고기로 구해 달라고 할게.

    “근데 왜 하필 새끼 돼지를 고른 거야? 소고기나 양고기같이 더 비싼 고기도 많은데.”

    새끼 돼지의 육질이 부드럽고, 잡내도 적긴 하지만 돼지고기가 고급 식재료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이런 자리에 돼지고기를 선택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일단 거기 모인 사람들한테 신기한 식재료 같은 건 없을 거란 판단이야.”

    “하긴 선호하는 식재료는 있어도 요즘 세상에 귀해서 못 먹는 식재료는 없을 거야. 게다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그리고 나는 새끼 돼지를 통으로 사용할 거야.”

    “통으로?”

    하얗고 평평한 접시에 핀셋을 이용해 가니쉬를 하나하나씩 올려서 플레이팅을 할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아기자기하게 요리하는 것을 싫어하진 않지만 이번 파티는 말 그대로 파티였다.

    점잖게 칼질이나 하고 앉아 있을 사람은 없다는 의미.

    “돼지 한 마리를 통으로 내어놓으면 일단 눈에는 확실히 띄겠지. 맛이 있든지 없든지.”

    “그건 그렇겠다. 적어도 묻힐 일은 없겠네.”

    “요리를 하기에 크기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건 돼지가 딱인 것 같아서.”

    그렇지만 나는 맛에도 엄청나게 공을 들일 예정이다. 음식을 하나만 만드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도 음식 한 개만 하는 건 조금 아쉽긴 하다. 대사님이 이슈 몰이 좀 하고 오라고 했잖아.”

    이슈 몰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내 관심은 그쪽으로 좀 더 쏠렸다.

    반드시 1등을 해야 하는 경연 대회도 아니었고, 대회라 하더라도 후발 주자로 투입된 나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준비한 비장의 무기가 있지.”

    “오 뭔데 뭔데?”

    일단 음식으론 돼지 한 마리를 통으로 올려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 거고, 나는 직접 만든 술이라는 아이템으로 틈새를 노려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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