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28화 (29/202)
  • 28. 알렉스의 생일

    며칠 전 대사관 회의실.

    “장 셰프도 이제 슬슬 한국이 그리울 때가 되었죠?”

    “네…? 네 그렇긴 한데… 그렇습니다….”

    정신없이 달리느라 향수병 따위는 없었지만 한국이 종종 생각났던 건 사실이었다.

    단순히 한국이 그립다기보다 돌아갈 수 없었던 내 청춘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던 것이지.

    “언제든 괜찮으니까 편하실 때 한국 한 번 왔다 가세요. 그래도 괜찮죠, 김용수 대사님?”

    파나르에서 한국을 한 번 갔다 오려면 적어도 1주일은 넘게 휴가를 신청해야 했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지만 당장 혼자 남는 김용수 대사의 끼니가 신경이 쓰였다.

    “물론입니다. 대통령님의 부탁 아니어도 그 정도 휴가는 충분히 줄 생각이었습니다.”

    “들었죠, 장 셰프? 내가 먼저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김용수 대사가 나중에 딴소리하면 저한테 말하세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최대치의 성과금도 좋았고, 인사 고과 점수 만점이라는 것도 아주 만족할 만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나에게 준 특별 선물을 단순히 값으로만 매길 수가 있을까?

    그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일상식을 하는 대사관 요리사들은 휴가를 길게 신청하기 어려웠다.

    일상식과 외교 행사를 진행하며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비행기 티켓을 살 정도의 돈은 쉽게 모을 수 있지만 시간을 내는 게 가장 어려웠다.

    공관장들과 협상을 통해 해결하면 된다지만 부하 직원의 입장에서 긴 휴가를 가겠다고 말을 꺼내는 게 쉽지는 않다.

    대통령은 그런 고충까지 이해하고 있다는 듯 직접 나서서 긴 시간까지 벌어 줬다. 값비싼 티켓보다 그 시간이 더 큰 선물이었다.

    “대통령님이 말한 것처럼 진짜로 가고 싶을 때 눈치 보지 말고 다녀와요. 장 셰프 오기 전에도 내 끼니 정도는 알아서 챙겨 먹었어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 아직은 그 정도로 그립거나 힘들지 않습니다. 나중에 계획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아직은 딱히 쉬고 싶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회귀를 해서 기본적인 체력이 좋아진 탓도 있었지만, 나 스스로 내 몸을 조절할 줄 알았다.

    나이가 들면 열정만으론 안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과하게 일을 한 다음 날은 죄책감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습관은 회귀를 했다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체력과 스트레스를 조절하며 지냈기 때문에 나는 아직 팔팔했다.

    “그러면 장 셰프.”

    “네 대사님.”

    “힘들지 않으면 이거 한번 해 보면 어때요?”

    힘들지 않다는 말을 너무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낸 게 아닐까? 훈훈해진 분위기에 취해 이곳이 회사라는 걸 잠시 잊어버렸다. 힘들지 않아도 힘들다며 엄살을 좀 피웠어야 하는데.

    괜히 불안해졌다.

    “뭐 말씀인가요?”

    “여기로 와 보세요.”

    김용수 대사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면서 나를 가까이로 불렀다.

    스마트폰에서 뭔가를 찾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한참 동안이나 만지작거리더니 드디어 사진 몇 장을 보여 줬다.

    “와아 여기가 어디래요? 호텔인가? 별장 같은 건가?”

    사진 속에는 5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 하나와 커다란 느티나무, 그리고 연못이라고 하기엔 좀 더 큰 호수가 보였다.

    직접 가 본 적 없었지만 사진만으로도 맑은 공기가 가득하다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

    “어때요? 좋아 보이죠?”

    “네 엄청 좋네요. 파티 같은 걸 하는 건가요?”

    “네 생일 파티예요.”

    “누구의 생일 파티길래 이렇게 크게….”

    사진 속에는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단순히 숫자도 많았지만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풍기는 아우라에서 느껴지는 호화로움은 감추기 힘들었다.

    그런데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메시지 발신인을 보고 말았다.

    “이것도 샤샤 기자가 보낸 사진이군요.”

    “네 맞아요. 저에게 항상 좋은 정보를 주는 사람이죠.”

    “좋은 정보라면….”

    이 사진에 좋은 정보라는 것이 숨어 있는 것인가? 그렇다기엔 흔들려 초점이 흐려진 사진이 대부분인데.

    * * *

    파나르 외곽의 한 별장.

    “오, 샤샤 어서 와요. 오늘은 카메라 두고 온 거 맞죠?”

    “하하 알렉스,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내가 몇 년을 공들였는데 그깟 사진 몇 장은 거뜬히 포기할 수 있죠.”

    카메라를 두고 왔냐는 알렉스의 질문은 기자가 아니라 완벽히 그냥 초대 손님으로 왔냐는 의미였다.

    업무용 카메라는 두고 온 게 맞지만 이런 웅장한 광경과 음식 사진을 찍을 스마트폰까지 놔두고 올 순 없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내가 원래 기자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샤샤는 이제 믿어요. 맘 편히 먹고 즐겨요.”

    처음 알렉스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고 싶었던 이유는 기자 정신 때문이었다. 그 파티에 초대받는 사람들이 워낙 거물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파면 팔수록 궁금해지는 건 그들의 입에서 나온 음식 얘기들이었다.

    마약이라든가 카르텔 뭐 이런 얘기를 기대했지만 알렉스의 생일 파티는 생각보다 훨씬 순수했다. 그저 순수하게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한 파티.

    미식가 알렉스의 취미 생활을 총망라해 보여 주는 일종의 정모 같은 거라 할 수 있었다.

    “아는 사람들 많죠?”

    “네 그러네요.”

    초대된 손님들은 유명 인사가 많았기에 기자인 샤샤가 알고 있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알렉스의 질문은 손님들이 아니라 요리사들을 향해 한 말이었다.

    “좋은 요리사들 특히 독특한 음식을 하는 요리사가 있으면 꼭 추천해 줘요. 그게 내가 기자 샤샤가 아닌 미식가 샤샤를 초대한 이유니까요.”

    “네 그러죠. 알렉스가 모르는 요리사가 더 남아 있다면 말이죠.”

    “하하하 그건 그렇죠?”

    샤샤는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온갖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었다. 이런 천국에 매년 올 수 있게 되다니.

    기자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 * *

    “대사님도 여기 가 보셨어요?”

    “아니요. 가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무슨 모임이길래 한 나라의 대사 정도 되는 사람도 초대를 받지 못한 걸까?

    김용수 대사가 초대받지 못했다는 말을 듣자 이 파티의 주최자가 굉장히 높이 있는 사람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권력으로든, 재력으로든.

    “이거 한번 보세요.”

    김용수 대사는 신문 뭉치와 함께 쌓여 있던 잡지 하나를 가져와 나에게 보여 주었다.

    영어로 된 잡지의 제목은 굳이 읽어 보지 않아도 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잡지였다.

    “포브스네요?”

    “이 표지의 사람이 이 파티의 주인공입니다.”

    “아… 와.”

    잡지 표지에 쓰인 내용은 간단했다.

    ‘테크노 마트 CEO 알렉스. 파나르를 넘어 중앙아시아 최고 갑부로 등극.’

    “테크노 마트라면 파나르에 널리고 널린 그 테크노 마트인가요?”

    테크노 마트라면 나도 자주 이용하던 곳이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폰이나 충전기 같은 자잘한 물건은 물론이고, 스마트폰, 컴퓨터, 노트북, 냉장고 등등 온갖 가전 용품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한국의 편의점만큼 흔히 볼 수 있는 매장이었으니까.

    “테크노 마트 회장이라면 파나르에서 제일 부자라는 게 수긍이 되네요.”

    “정유 회사는 빼고 순위를 매긴 거겠지만 그래도 알렉스가 어마어마한 부자인 건 틀림없죠.”

    “그러니깐 이런 곳에서 생일 파티를 하겠죠. 저도 한번 가 보고 싶네요.”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회귀 전에도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요리사로 일하면서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벌었고, 먹고 싶은 음식은 돈 걱정 없이 전부 먹어 볼 정도는 되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이런 곳은 나와 태생부터 다른 부자들이 모이는 곳이니 뭔가 달라도 다르겠지. 그래서 궁금하긴 했다.

    솔직히 어떤 식재료를 취급하고, 어떤 술을 마시는지가 제일 궁금했지만.

    “그러면 장 셰프, 여기 가 볼래요?”

    “네? 제가요? 어떻게요?”

    대사도 초대받지 못한 자리를 내가 무슨 수로 간단 말인가.

    파티 주최자의 부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되니 조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반대로 파티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아무도 나 같은 평민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테니 살짝 구경만 하고 와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대신 손님이 아니라 직원으로서요.”

    “지… 직원이라니요?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생일 파티에 참석하는데 손님이 아니라 직원이라니. 생일 파티를 전담하는 직원이 있을 정도야?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상황이라 의아한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파나르 최고 부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단 확신이 들었다.

    “샤샤도 몇 년 전부터 이 생일 파티에 참석하려고 공을 들이고 있었는데 결국 작년에 처음 초대를 받았다고 하더라구요.”

    “역시 대단하네요.”

    파나르의 굵직한 인사들은 전부 이 파티에 초대받는다. 그런데 기자랍시고 돌아다니며 취재를 한다면 파티 분위기가 불편해질 게 뻔했다.

    그래서 애초에 기자들은 초대를 받지 못하거나 샤샤처럼 일반인의 신분으로 몇 년간 공을 들여야만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파나르에 힘 있고,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전부 모이니깐 준비하는 음식들도 엄청나게 다양한가 봐요.”

    샤샤가 왜 이 파티에 그렇게나 공을 들였는지 알 것 같았다. 기자 신분을 내려놓고까지 가고 싶은 이유는 아마도 그 음식들 때문이었겠지.

    “올해도 초대를 받았는데 아시다시피 샤샤가 다음 달까지는….”

    “아! 채식.”

    “맞아요. 가서 채소들만 먹어도 되는데 그러기엔 유혹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포기했다고 하네요.”

    “정말 대단한 사람이긴 해요. 근데 그건 그거고 저보고 여기 직원으로 가라는 건 무슨 말씀이세요?”

    샤샤가 이 파티에 참석을 못 하는 이유는 그렇다 쳐도 나보고 여기를 가라는 건 무슨 말일까. 일일 알바라도 하면서 음식 구경이라도 해 보고 오라는 건가? 산해진미가 다 나올 테니까.

    “샤샤가 장 셰프를 여기 요리사팀에 추천을 했어요.”

    “네? 저를요?”

    그러면 나보고 저 사람들의 음식을 준비하란 말이야? 온갖 산해진미가 모이기도 하겠지만 엄청난 요리사들도 모일 텐데.

    “알렉스란 저 사람 워낙 음식에 대한 조예가 깊고, 관심이 많아서 일부러 생일 파티를 크게 연다고 해요. 매년 다양한 요리를 맛보기 위해서요.”

    돈도 많겠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단순히 비싼 재료를 이용하는 요리들은 이미 질렸을 수도 있다. 저 정도의 재력이면 캐비어를 아이스크림 퍼먹듯 먹을 수 있을 것이고, 푸아그라는 순대처럼 간식으로 취급할 정도일 테니.

    “근데 샤샤가 저를 그 요리사팀에 왜 추천을 했대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줘서 고맙다는 맘을 전하고 싶다던데요.”

    이게 무슨 소리야.

    진짜 고마움을 전할 거면 요리사팀이 아니라 불참하는 자신을 대신해 손님으로 넣어 줬어야지.

    수백 명이 초대되는 그런 대규모 파티에 직원으로 추천해 준 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호텔에서도 이 정도 인원이 오는 날엔 며칠 전부터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할 정도인데.

    “날고, 기는 요리사들이 전부 모일 테니 보고 배울 기회를 주겠다. 뭐 이런 건가요?”

    내가 진짜 25살의 초짜 요리사였다면 샤샤의 그런 마음을 감사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땐 요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으니까.

    선배들의 손짓 하나, 습관 하나하나 따라 해 보기도 하고, 배우려고 애썼는데.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누군가의 요리를 보고 배우는 건 재밌지만 힘들게 일을 해 주면서까지 배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아마 보수를 말하는 걸 거예요.”

    “보수라면… 돈?”

    김용수 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의 생일 파티는 무려 3일간 열린다고 했다. 초대하는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기간도 남달랐다.

    하는 거라곤 3일 내내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거지만 음식과 술은 하루도 허투루 준비하지 않는다.

    파티를 3일로 나눈 이유도 소수 정예에게 최고 품질의 음식과 술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인원이 너무 많으면 그냥 시장 바닥처럼 난장판이 될 테니까.

    “보수는 3일 동안 일하고 3,000만 원. 하루에 1,000만 원이랍니다.”

    놀란 숨을 들이켜다가 목구멍에서 막혀 버렸다.

    겨우 3일만 일하는데 3,000만 원이나 준다고?

    게다가 3일 중 자신의 음식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는 단 하루라고 했다. 나머지 기간은 그저 다른 요리사들을 조금 돕고 그들의 음식을 맛보는 것뿐.

    “내가 요리를 할 줄 알았다면 직접 갔을 텐데 아쉽네요. 그 정도 보수면 굳이 거절할 필요 없지 않나요? 이상한 곳도 아니고.”

    ‘나는 파나르에 돈을 벌러 온 게 아니라 전생에서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왔다’라고 고집부리기엔 너무 큰 돈이었다.

    속으론 벌써 어떤 요리를 해야 할지 고민을 시작했지만 3일간 혼자 남겨질 김용수 대사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 끼니는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 정도는 됩니다. 3일 정도는 그냥 밖에서 먹고 들어와도 되구요.”

    “그렇긴 한데… 괜히 맘에 걸리네요. 주제넘지만 다녀와서 받은 돈으로 한턱 내도 되겠습니까?”

    한턱 내겠다는 말에 김용수 대사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싶으면 그러라는 말과 함께.

    “근데 장 셰프. 짧은 기간에 돈을 크게 벌 수 있는 기회니깐 보내 드리는 것도 있지만 저도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이요? 뭡니까 말씀만 하세요. 음식 좀 싸다 드릴까요?”

    그들은 파나르에 온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대사를 초대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김용수 대사는 그 생일 파티에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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