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26화 (27/202)
  • 26. 숭늉 한 그릇

    식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나의 말에 전부 눈이 동그래졌다. 뷔페 음식은 넉넉하게 만들었다. 그 많은 걸 남김없이 먹어 치웠으니 배가 부를 수밖에.

    “원래 한국 사람들은 무슨 음식을 먹든 간에 마지막엔 밥으로 마무리합니다.”

    “밥이라면 쌀 말인가요?”

    삼겹살을 먹을 때 된장찌개와 밥으로 마무리하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밥으로 마무리를 하는 습관이 있다.

    비록 오늘 준비한 게 밥은 아니지만 식사를 마무리할 근사한 음식을 마련해 두었다.

    “처음 보는 음식이겠지만 다들 입맛에 맞을 겁니다.”

    나는 자신 있는 발걸음으로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양손엔 사찰식 육수로 끓여 낸 수제비를 들고서.

    그리고 가스 불을 최대한 줄여 놓은 채 커다란 냄비 하나를 더 올려 두었다.

    “이게 뭔지 아시겠나요?”

    비쉬파르막처럼 커다란 쟁반이 아니라 그릇에 담겨 있었지만 그들에게 분명 익숙한 음식이었다. 고기가 없어도 널찍하게 만든 밀가루 면만 봐도 떠오르는 음식이 있었을 것이다.

    “이거 혹시 비쉬파르막입니까?”

    “정말? 그러고 보니 비쉬파르막이네?”

    이번엔 먼저 먹어 보란 말도 하지 않았는데 기자들은 숟가락을 들었다. 배가 부른 와중에도 아는 음식이 나와 반가운 듯 그릇에 담긴 수제비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별다른 의심도 없이.

    “비쉬파르막처럼 보이겠지만 이 음식의 이름은 수제비라고 합니다.”

    “수제비?”

    맛이 어떠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기자들은 계속해서 수제비를 입으로 넣으면서 날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이제 보니 카즈도 없고, 감자도 손가락만 하고, 비쉬파르막이랑 조금 다르긴 하네.”

    “그래? 근데 카즈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착각인가?”

    “난 모르겠어. 내 입엔 그냥 비쉬파르막이야.”

    방금까지 음식이 또 남았냐며 놀라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었다. 5분도 안 돼 한 그릇을 다 비운 한 기자는 리필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이 정도라면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만족했다는 의미일 테고, 나는 샤샤의 의견이 궁금해졌다.

    “샤샤 기자님은 어떠세요? 수제비의 맛이 괜찮습니까?”

    “네 너무 맛있습니다. 오히려 비쉬파르막보다 가볍고 속이 덜 부담스러운 것 같아 좋습니다.”

    억지로 시작하긴 했지만 샤샤는 거의 1년 가까이 채식을 하고 있었다. 이제 고기나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받아들이기엔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버섯과 무로 육수를 내 만든 한국식 비쉬파르막은 고기가 듬뿍 들어간 원조만큼 깊은 맛을 내면서도 가벼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입맛에 맞으시다니.”

    “모든 음식이 너무 좋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요리사님.”

    칭찬은 좀만 이따가 해 주겠다는 듯 샤샤는 나와 눈을 잠시 마주쳤다. 그리곤 곧바로 남은 국물을 전부 들이켰다.

    “캬아! 제가 비록 1년 동안 채식주의자로 살았지만 이런 음식은 처음입니다. 요리사님 음식을 먹기 위해 취재 요청을 하길 잘했습니다.”

    “정말요? 진짜 제 음식을 맛보려고 취재 요청을 하신 거예요?”

    혹시나 했는데 샤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그 정도로 내 음식이 대단한 건 아닌데.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근데요 셰프님.”

    어떻게 칭찬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샤샤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파나르 사람들이 비쉬파르막을 먹은 후에 꼭 하는 게 있는데 뭔지 아십니까?”

    샤샤는 뭔가를 또 부탁하는 것이 부끄러운지 빙빙 돌려 가며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샤샤가 뭘 원하는지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도 파나르식이 아닌 한국식으로.

    “비쉬파르막까지 전부 드셨으니 이제 진짜로 차 한잔하실 시간이겠네요.”

    “아 알고 계셨어요?”

    “물론이죠. 그것도 모르고 이 음식을 준비했을까 봐요?”

    “정말 꼼꼼하게 준비하셨군요.”

    “그렇지만 차는 제 방식대로 준비했습니다.”

    윤아의 집에서 먹었던 차도 맛이 좋았지만 나는 마무리까지 한국식으로 대접해 주고 싶었다.

    게다가 오늘 음식에 쌀이 제대로 들어간 음식이 없었단 것도 맘에 걸렸고.

    한식은 자고로 갓 지은 쌀밥에 김치나 젓갈 한 점 올려 먹는 것이 진정한 맛인데.

    그런 걸 즐길 경지는 바라지 않았으니 밥은 아예 짓지도 않았다. 대신 남은 찬밥으로 만들어 둔 게 있었다.

    “사실 고기가 없는 비쉬파르막이라 그리 속이 불편한 건 없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네요. 습관이 되어 버려서.”

    나는 괜찮다는 듯 살짝 미소 지으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약한 불로 줄여 둔 냄비에서 고소한 누룽지 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구수하고 따뜻한 물.

    이게 저들이 마시는 차와 다를 게 뭐 있어. 이거면 비쉬파르막 후에 마시는 차를 대신하기에도 충분했다.

    “이제 진짜 마지막 음식입니다. 다들 한 잔씩 마시고, 부족하면 말씀해 주세요.”

    머그잔에 민트 향 가득한 홍차가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테이블엔 뜬금없이 국그릇이 올라왔다.

    다들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이제 무조건적으로 나를 믿겠다는 저들의 눈빛.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숭늉이라고 합니다. 숭늉은 가마솥에 밥을 지은 뒤 눌어붙은 부분을 떼어 낸 것인데 고소하고, 깊은 맛을 내기 때문에 이렇게 식사 후 숭늉을 마시곤 합니다.”

    양손으로 국그릇을 들어 마시는 것이 조금 격에 어긋나 보이긴 했지만 눈치 빠른 김용수 대사는 어느새 그릇을 들어 숭늉을 들이켜고 있었다.

    “게다가 절에서는 한 톨의 음식물도 남기지 않기 위해 이 숭늉이나 냉수로 자기가 먹은 그릇을 씻어 들이켜는 것으로 식사를 마무리합니다.”

    발우 공양의 마지막 단계에 대해 설명을 끝내자 기자들은 국그릇을 들고 쩝쩝대기 시작했다. 바닥에 밥 한 톨이라도 남기지 않기 위해.

    “이것으로 오늘 준비한 오찬 음식은 끝입니다.”

    끝이라는 말이 통역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자들 사이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너무 격한 반응 탓에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

    하지만 뷔페 접시며, 숭늉 그릇이며 모든 게 비워져 있는 걸 보자 뿌듯함이 밀려왔다.

    * * *

    “그럼 더 질문할 게 없으신가요?”

    보통 오찬 행사는 늦어도 오후 3시쯤에는 끝이 나는데 시계는 이미 4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계획과는 다르게 음식에 대한 질문이나 설명이 많아졌고, 식사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이들의 본분이었던 취재는 자연스럽게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오늘 오찬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자님들.”

    김용수 대사가 오찬을 마무리한다는 말을 하자마자 몇몇 기자들은 관저를 뛰쳐나갔다.

    아마 본인들도 3시쯤이면 끝이 날 줄 알았겠지.

    그래서 다음 스케줄을 계획했을 텐데 생각보다 늦어져 서둘러 빠져나갔다.

    휴우.

    그 후로도 하나둘씩 관저를 빠져나가는 기자들의 모습을 보자 깊은 한숨이 나왔다.

    오늘 행사도 무사히 끝이 났구나. 겉으론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행사가 끝이 나자 두 발에 힘이 풀렸다. 많이 긴장했었나 보다.

    “셰프님?”

    “아. 샤샤 기자님.”

    모두가 빠져나간 후에도 아직 관저에 남아 있는 샤샤였다.

    관심을 보여 주고, 잘 먹었다는 말을 수십 번 해 준 건 고마웠지만 이제 잠시라도 쉬었다가 청소해야 하는데… 또 할 말이 남았나?

    “대한민국 대사관은 정말 특이하네요.”

    “특이하다니요? 뭐가요?”

    다른 기자들을 마중하던 김용수 대사도 어느새 돌아와 샤샤의 옆에 와 있었다.

    “여기 김 대사님은 다른 나라의 대사님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시고.”

    “흐음.”

    나이가 많다는 말에 김용수 대사가 찔린 듯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기분이 상해 보이진 않았다. 이전에도 그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워 보였다.

    “근데 셰프님은 다른 대사관 셰프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리시고.”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한 명은 늦게 발령이 난 거고, 한 명은 일찍 발령이 난 거니 그럴 수도 있지.

    “다른 대사관 직원들과 나이가 차이 난다는 게 무슨 상관인가요?”

    “상관이 있다는 말은 아니고, 나이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도 어떻게 환상의 팀워크를 보여 줄 수 있는거죠?”

    환상의 팀워크라.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김용수 대사는 기자단을 초대하기 위해 미끼를 던졌다. 나와 상의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충분히 나를 믿는다는 의미.

    그리고 사찰 요리라는 아이디어를 이끌어 내 준 것도 결국 김용수 대사의 입에서 나온 말 덕분이었다.

    그걸 구현해 낸 것도 결국 나지만.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환상의 팀워크를 보여 준 것은 맞았다. 정신 연령은 비슷했으니 그럴 수밖에.

    “제 개인적인 욕심이었지만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을 다시 한번 전하고 싶었습니다.”

    “맛있게 드셔 주셔서 오히려 요리사로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안스타에 극찬이 담긴 글이 등록될 수 있겠지? 아까 보니깐 사진도 정성 들여서 찍는 거 같던데.

    조금 유치하지만 처음에 목표했던 것을 이루고 싶기도 했다.

    “그럼 안스타에 좋은 글 하나 부탁드립니다.”

    “제 안스타도 보셨어요?”

    “물론이죠.”

    치부를 살짝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진 샤샤였다. 최근의 피드들은 전부 초췌하고, 투덜거리는 내용들뿐이어서 그런지 무척 민망해했다.

    “안스타는 당연하고, 공식적인 기자도 최선을 다해서 써 보도록 할게요. 오늘 셰프님의 요리처럼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고기나 생선 요리도 해 드릴 테니 한 번 더 놀러 오세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딱 1달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면 이 짓도 끝이 납니다. 근데 요리사님 음식이라면 굳이 고기가 아니어도 또 먹고 싶을 겁니다.”

    안색이 한결 밝아진 샤샤는 배가 부른지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화가 다 된 후에 고기랑 샐러드 중에 고르라고 한다면 고민 없이 고기를 고를 거면서.

    “이거 하나 받으세요.”

    “명함인가요?”

    “네. 제 번호 기억해 주세요. 꼭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저도 그럼 명함 하나 드릴게요.”

    우리가 사적으로 따로 연락할 일은 없겠지만 꼭 명함을 간직해 달라는 샤샤였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샤샤의 번호는 등록을 하고 명함은 지갑에 고이 넣어 두었다.

    * * *

    “대사님, 오전에 요청하신 자료입니다.”

    윤아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김용수 대사의 방으로 향했다.

    며칠 전부터 다른 업무는 손에 대지도 못하고 이것들을 준비하는 데만 온 힘을 쏟았다.

    “윤아 씨 미안해요. 너무 고생 많았어요. 꼭 내 눈으로 전부 읽고 싶어서요. 그리고 전할 곳도 있구요.”

    “괜찮습니다. 저도 조금 빡시긴 했지만 기분 좋은 내용들이 많아서 재밌게 했습니다.”

    대사의 앞에서도 빡시다는 표현을 자연스레 하는 윤아였다. 그런 것 정도는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김용수 대사도 살짝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이거 전부 읽다 보면 퇴근 시간이겠네요. 허허허.”

    윤아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김용수 대사의 방을 빠져나왔다.

    김용수 대사는 며칠 동안 올라온 대한민국 대사관에 대한 기사들의 변역본을 꼼꼼히 읽어 보고 있었다.

    중복되는 내용들은 하나로 합치고, 강조할 만한 성과가 쓰인 기사들을 위로 올려 두었다.

    그중에서 제일 위에 올려진 기사는 대사관에 대한 내용이 아니었다.

    -특히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준비한 특별한 오찬 음식을 통해 대한민국과 파나르가 문화적으로 더욱 가까운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이건 장 셰프에게 꼭 보여 줘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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