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고기 좋아한다며
“장 셰프. 내일 오찬 준비는 다 되었나요?”
“네 이제 연습은 다 끝났고, 오늘부터 밑 준비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요 며칠 동안 사찰 요리만 먹어서 그런가, 아침마다 속이 편안합니다.”
“대사님도 그렇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일주일 내내 연습을 하느라 김용수 대사의 삼시 세끼 식탁은 전부 사찰 요리로 채워졌다.
처음에는 조금 허전하고, 심심하다던 김용수 대사도 어느새 사찰 요리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근데 내일 음식의 간은 조금 세게 할 생각입니다. 고춧가루나 마늘도 좀 쓸 생각이구요.”
“그래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긴 한데, 그러면 제대로 된 사찰 요리의 맛이 안 나오는 거 아닙니까?”
“사찰 요리의 맛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최소 2~3일은 먹어야 하는데 오찬은 그럴 수가 없으니까요. 사찰 요리를 파는 식당에서도 간을 조금 세게 해서 손님들의 입맛에 맞추는 경우도 있답니다.”
한국 사람들보다 간을 세게 해서 먹는 파나르인들에게 사찰 요리는 심심하고, 허전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대사관이 진짜 사찰도 아니고, 나 역시 스님이 아니니 이 정도 타협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렇게 하더라도 사찰 요리라는 큰 틀은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
“좋습니다. 일단 손님들을 만족시키는 게 중요하니까요. 이번 오찬이 끝나면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우리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올 테니 긴장이 되네요.”
“그렇습니다. 저도 다른 때보다 오히려 더 긴장되네요.”
분명 자신은 있었지만 완벽하게 내 전공 분야도 아니었고, 사찰 요리가 파나르인의 입맛에 어떻게 느껴질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기자들이 모인 오찬이 엉망이 되어도 정책이나 중요한 프로젝트들이 무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 부정적으로 쏟아질 기사들의 힘은 국격을 떨어뜨리기엔 충분했다.
초대된 기자단의 영향력은 그 정도로 굉장했으니까.
* * *
“어서 오세요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대사님. ABC 방송 브랜다 기자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CCC의 샤샤입니다.”
“오 샤샤 기자 오랜만이에요. 어서 오세요.”
한꺼번에 관저로 들어온 12명의 기자단 덕에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초대된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자들은 관저 여기저기를 카메라로 찍어 대기 바빴다. 전부 사전에 협의가 된 내용이지만 이전의 행사들과는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저 사람이 샤샤야.”
“그래? 근데 저 사람 뭘 보고 있는 거야?”
다른 기자들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후 사진과 영상 등 기록을 남기기 바빴는데 샤샤만은 다른 곳으로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주위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고, 사진을 찍어 대도 샤샤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인데?”
“그러게. 실제로 보니깐 안색이 더 초췌하다. 안쓰러울 정도야.”
관저로 들어선 샤샤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차려진 음식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음식에 닫힌 뚜껑을 보며 샤샤는 작게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오늘 사냥에 실패하면 죽음을 맞이하는 굶주린 사자처럼.
“잘 오셨습니다 기자님들. 이렇게 파나르의 정국이 빠르게 안정이 되고, 여러분들을 관저까지 초대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용수 대사가 샤샤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확실했다.
내전 이후 대한민국 대사관의 행보를 자세하게 그리고 호의적으로 기사를 내 달라는 것.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더라도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대사관을 복구시켰다.
“사전에 요청하신 대로 오늘 오찬은 한국의 특별한 채식 요리로 준비해 봤습니다. 편하게 즐기시면서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 주세요.”
오찬 요리가 뭐가 됐든 기자들에겐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아무도 음식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고 김용수 대사와 안지용 참사관에게 질문을 던지기 바빴다.
단 샤샤 한 명만 제외하고.
“자자! 질문들이 많으신 거 같은데 차근차근 식사도 하시면서 이어 가 보시죠.”
김용수 대사는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조금 당황한 듯 음식으로 시선을 유도했다.
나에게 간절하게 도와 달라는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버섯 샐러드입니다.”
나는 윤아를 대동해 서둘러 음식 설명을 시작했다.
“표고, 팽이, 양송이, 느타리 등등 파나르에서도 다양한 버섯을 종류별로 즐기는 걸로 압니다. 다양한 버섯을 데쳐서 배추, 당근, 양파 등을 넣고 흑임자 드레싱으로 버무려 완성했습니다.”
샐러드는 너무 잎채소로만 샐러드를 만들면 허전하거나 단백질이 부족할 수 있어 버섯을 주재료로 이용해 샐러드를 만들었다. 대신 소스는 마요네즈 대신 콩기름과 흑임자를 섞여서 만든 한국풍의 드레싱을 곁들였다.
“솔직히 이 정도면 샐러드만 먹어도 배부르겠는데?”
“그러게. 버섯에 은은하게 간이 되어 있어서 씹을 때마다 느껴지네. 무슨 소스가 들어간 거지?”
버섯을 데칠 때 소금 대신 국간장을 넣어 간을 했다. 간장의 향과 간이 버섯에 배어 더욱 풍성한 맛을 내는 버섯 샐러드를 만들 수 있었다.
“샤샤 기자님? 맛이 어떠세요?”
“네? 얘기는 나중에 할게요. 일단 먹는 데 집중 좀 하고요.”
아직 음식에 대해 별다른 말은 안 했지만 계속 먹는 걸로 봐선 첫 번째 음식은 맘에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샐러드만으론 부족한 모양.
다음 음식의 뚜껑을 서둘러 열었다.
“이것은 전과 튀김입니다.”
“튀김?”
대게 채식 요리라고 하면 튀김을 먼저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건강식, 다이어트식에 가까운 채식 요리에 튀김은 어울리지 않으니깐.
하지만 사찰 요리는 단순히 금기시하는 식재료가 있을 뿐이지 다이어트식과는 그 결이 달랐다.
식물성 기름을 사용한다면 튀김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아삭한 식감의 연근전, 배추전, 상추전, 두부로 속을 채운 표고버섯전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튀김은 모둠 야채 튀김입니다.”
전이나 튀김 요리는 파나르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채소들로 준비했다. 하지만 이번 음식은 전보다 찍어 먹는 초간장에 좀 더 공을 들였다.
“전과 튀김의 맛은 아주 담백하지만 이 초간장을 찍어 드시면 그 맛이 훨씬 배가됩니다.”
국간장에 버섯 육수 그리고 매실청으로 맛을 더해 만든 초간장을 자신 있게 내밀었다.
비록 직접 만든 간장이나 매실청은 아니었지만 초간장 맛을 내기엔 충분했다.
“이거 진짜 대박인데?”
“연근? 이거 우리나라에서도 먹는 채소였어?”
역시 무슨 재료든 기름에 굽고, 튀기면 맛있는 음식이 된다고 했던가. 아직 조금 남아 있는 버섯 샐러드와 달리 전과 튀김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장덕수 셰프.”
그때였다.
누군가 내 이름 세 글자를 정확하게 발음하며 불렀다. 김용수 대사나 윤아는 아니었다.
놀라서 돌아보니 아까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진 샤샤가 있었다.
“기자님 한국어를 할 줄 아시는 거였어요?”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내 이름을 부른 것 외엔 샤샤는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궁금한 게 있어 급한 마음에 셰프인 내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
“원래 한식에 이런 음식들이 있었나요? 제가 알고 있던 한식들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
샤샤가 알던 한식은 여러 가지 고기와 생선, 해산물 등을 다양하게 사용해서 만든 음식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늘 준비한 음식들은 전부 채소로 만들었지만 그 맛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건 분명히 긴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음식이라는 의미.
이 음식들이 즉석에서 만들었거나 퓨전식 수준이 아니란 걸 샤샤는 눈치채고 있었다.
“오늘 준비한 음식들은 사찰 요리라고 하는 하나의 분야입니다.”
“사찰 요리요?”
다양한 나라의 음식 문화에 빠삭한 샤샤도 사찰 요리는 처음 들어 본 모양이었다.
한국의 불교 문화에서 발전된 음식이고, 그 요리법이 굉장히 과학적이고, 고난도이기 때문에 최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요리가 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일단 다른 음식들도 더 드셔 보세요. 준비한 게 많습니다.”
아직은 놀라기 일렀다.
샐러드나 튀김 말고도 준비한 음식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걱정했었는데 관심을 가져 주고, 맛있게 먹어 주니 덩달아 나도 신이 났다.
“이 도토리묵이라는 것은 도대체 뭐로 만드는 겁니까?”
특이한 식감을 처음 맛본 샤샤와 기자들은 하나둘씩 음식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파나르의 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건데 파나르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윤아도 도토리를 파나르어로 통역할 순 없었다.
다람쥐나 청설모가 먹는 사진을 보여 줘서 겨우 설명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처럼 도토리를 즐겨 먹는 사람은 드물었으니.
“대단합니다. 한식은 이렇게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하는군요. 이 도토리라는 건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맛이네요.”
도토리묵의 식감을 낯설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역시나 샤샤는 거침없이 묵 요리를 즐기고 있었다. 짜지 않은 간장 소스가 입맛에 맞다며 숟가락으로 퍼먹기도 했다.
“샤샤 기자님은 어떻게 젓가락질을 그렇게 잘하세요? 이 묵은 한국 사람들도 집기가 어려운 음식인데.”
“아 저요? 이 음식 저 음식 먹다 보니 익숙해졌습니다. 처음엔 진짜 힘들었는데 익숙해지니깐 포크보다 젓가락이 훨씬 편하더라구요.”
“그건 맞죠 하하하.”
젓가락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샤샤는 진땀을 흘리고 있는 다른 기자들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배가 부르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입으로 밀어 넣는 샤샤였다.
“근데 요리사님. 이 많은 음식들에 진짜 생선이나 고기 한 점 들어가지 않았다는 걸 제가 믿어도 되나요?”
“네 당연하죠. 육수에도 생선이나 고기, 뼈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계란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수긍하기가 어렵네요. 모든 음식에서 깊은 맛이 나는데, 고기나 생선 없이 이런 맛을 내는 게 가능한가요?”
나도 연습해 보면서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르겠다.
사찰 음식은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있는 음식 같았다. 단순한 거 같지만 그 맛의 깊이가 굉장했고,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푸짐한 음식을 먹은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사찰 음식은 불교의 역사와 함께 발전한 음식이라 단순한 채식 요리라고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어느새 준비한 뷔페 음식은 김치부터 양념장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바닥을 드러냈다.
넉넉하게 준비했지만 마치 음식이 모자랐던 것처럼 그릇은 깨끗하게 비워졌다.
샤샤가 일당백의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들 배부르게 드셨습니까?”
“네 덕분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고기가 없이도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내가 준비한 사찰 요리에 만족한 것 같았다. 처음엔 취재 내용이 더 중요하다며 오찬 메뉴는 신경도 쓰지 않은 기자들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기자들은 앞으로 한국 대사관의 행보, 정책 등의 질문보다 음식이나 문화에 대한 질문이 더 많아져 있었다.
“그럼 대사님. 식사가 다 끝났으면 차라도 한잔하면서 질문을 이어 가도 될까요?”
기자단 중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기자 한 명이 식사 자리를 마무리하려 했다. 이제 기자라는 본분으로 돌아와 제대로 취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아직 식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