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완벽한 채식
“뭐부터 찾아봐야 하지?”
일단 한식 중에 채식 요리라고 할 만한 요리들은 대표적으로 비빔밥, 두부 요리, 나물이나 무침 요리, 국수 요리 정도로 추릴 수 있었다.
“근데 샤샤는 생선이나 계란도 안 먹는 채식을 하고 있는 거 같던데.”
비건, 오보, 락토, 락토오보라고 불리는 다양한 채식주의자들의 형태가 있지만 샤샤는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으로 채식을 하는 비건을 선택해 체험하고 있었다.
생선이나 달걀은 물론이고, 치즈나 우유, 버터 같은 유제품도 섭취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먹으니 힘이 없지.”
비건들이 먹지 않는 재료들을 확인하니 뭔가 꽉 막힌 것 같았다.
어찌어찌 완성을 한다 해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당장 육수를 내는 것부터 막혔다. 고기나 뼈를 이용한 육수는 당연히 불가능했고, 멸치나 디포리도 생선이니 불가능했다. 채소만으론 뭔가 좀 허전할 테고.
“뭐 참고할 만한 자료 없으려나. 책이라도 좀 읽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채식 요리를 주제로 한 책은 물론이고, 사찰 요리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현지에서 그런 자료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냥 한글로 적힌 책을 찾는 것도 불가능한 수준.
계속 인터넷을 뒤지고 있었지만 만족스러운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하… 사찰 요리도 생각보다 안 쓰는 조미료들이 너무 많네.”
사찰 요리에 대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쓰지 않는 재료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맛을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사찰 요리를 제대로 하려면 내 기준을 낮출 수밖에 없는 걸까?
“제대로 된 사찰 요리를 맛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하던데, 이런 조미료를 쓰지도 않고 진짜 맛을 낼 수 있긴 한 거야?”
풍성한 양념 맛으로 먹는 음식에 향신료을 넣지 않고도 맛을 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꼭 똑같이 따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제대로 된 사찰 요리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였다.
“일단 해 보자.”
그래도 제대로 된 사찰 음식들을 먹어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만족스럽다고 하는 걸 보면 분명 비법이 있는 게 확실했다.
그전에 여러 번의 연습을 통해 레시피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했다.
“일단 제일 중요한 육수 내는 것부터 해 보자.”
건어물이나 고기를 쓰지 않고도 진한 육수를 낼 수만 있다면 그걸로도 반은 성공이었다.
그 육수를 이용한 요리는 원하는 맛을 내기 쉬울 테니까.
“보자. 어떤 재료들로 육수를 내는지.”
사찰식 육수 내는 법 정도는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들을 참고해서 육수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이론적으론 이해가 될지언정 요리는 결국엔 손맛이니까.
꼭 여러 번 해 보는 게 중요했다.
“말린 표고버섯, 양파 껍질, 무, 다시마… 기본적으로 이렇게 들어가는구나.”
그래도 재료를 보니 곧바로 수긍이 되었다.
잘 말린 표고버섯은 그 맛과 향이 훨씬 풍부해진다. 물론 신선한 생표고도 맛이 좋지만 육수를 내기엔 말린 표고가 훨씬 좋은 재료라고 할 수 있다.
“표고버섯에 다시마, 양파 껍질까지 넣으면 감칠맛 폭발이겠구나.”
말린 표고버섯 자체도 감칠맛 덩어리인데 다시마에 양파 껍질까지 넣어 끓인 육수는 MSG를 들이부은 것처럼 중독성이 있는 육수가 된다.
“대신 비율은 내가 알아내야겠지.”
육수를 끓이는 재료 정도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 비율은 내가 직접 찾아내야 했다.
말린 표고버섯을 너무 많이 넣으면 특유의 버섯 향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너무 적으면 밍밍한 육수가 된다.
또 다시마를 과하게 사용하면 텁텁하고, 비린맛이 나는 육수가 된다.
“물 5리터에 향을 낼 정도의 말린 표고 10개와 무는 큰 거 한 통 전부 넣고, 다시마 2장 그리고 양파 껍질 조금.”
너무 오래 끓이면 다시마나 표고버섯 때문에 국물이 탁해질 수 있으니, 다시마는 물이 끓어오르자마자 건져 주고, 딱 30분 정도만 끓여 준 뒤 불을 껐다.
“일단 색깔은 나쁘지 않네.”
몇 번만 테스트해 봐도 재료들을 어느 정도 넣어야 할지 금방 감이 잡혔다.
이래서 경험을 무시할 수 없는 거지.
“불을 끄고도 국물이 우러나니깐 이대로 몇 시간만 식히면 돼.”
끓여 낸 육수를 식힌 다음 건더기들을 전부 건져 내고 국간장으로 간을 해 주자 육수가 완성이 되었다.
국간장이 마트에 파는 제품이라 조금 아쉬웠지만 타국에서 모든 것을 내 입맛대로 구할 순 없으니.
이 정돈 양보해야 했다.
“맛을 볼까?”
국간장으로 간을 살짝 간을 한 육수는 맑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그릇의 바닥이 비칠 정도로 맑은 육수는 걸쭉하고, 진한 고기 육수에 비해 밍밍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후릅. 와아 미쳤다.”
맑고 투명해 보이는 버섯 육수를 한 숟갈 입에 가져가자 나도 모르게 두 눈이 터질 듯 커졌다.
이게 진짜 고기나 건어물이 없이 뽑아낸 육수의 감칠맛이란 건가?
내가 만들었지만 믿기 힘든 맛이었다.
“후루루루룹.”
한 숟가락으론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어 한 그릇 듬뿍 담아 물을 마시듯 삼켜 버렸다.
“이 정도 육수면 뭘 만들어도 평균 이상은 하겠는데?”
만족스러웠지만 단순히 육수로만 판단하기엔 조금 아쉬워서 냄비에 물을 올리고 소면을 삶기 시작했다.
간단하지만 육수로 만든 완성된 요리를 맛보고 싶었다.
“육수에 말린 표고버섯이랑 양파 좀 썰어 넣고, 그리고 양념장도 좀 넣으면 좋겠는데.”
사찰 요리에서 사용하는 국수 양념장은 조금 특이했다.
직접 담근 국간장에 고춧가루 약간과 고추장아찌를 다져 넣는 방식으로 양념장을 만들었는데 파나르에선 가장 중요한 고추장아찌를 구할 수가 없었다.
새콤하고, 짭짤하게 푹 삭은 고추장아찌가 있으면 이 국수의 맛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켜 줄 수가 있을 거 같은데.
“뭐가 없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방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져 보았다. 한참을 뒤졌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고추장아찌는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아 맞다! 이걸 한국말로 하면 고추장아찌지 뭐 별거 있나?”
저번에 마트에서 하나 사 둔 것이 눈에 띄었다.
곧바로 쓸 일은 없었지만 손님들 중에 한 명쯤은 찾을 수도 있겠다 싶어 구비해 뒀었다.
유통 기한이 길어서 관리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이 할라피뇨라면 오히려 파나르 사람들 입맛엔 더 맞을 수 있겠다.”
매콤한 고추를 식초에 절여 오랫동안 보관해 먹는 방식이라는 면에서 두 음식은 같은 음식이나 다름없었다.
고추의 종류가 다르고, 절이는 양념의 비율이 조금 다를 뿐이지 맛은 비슷했다.
“할라피뇨를 잘게 다진 다음, 고춧가루, 육수 조금, 참기름 약간 넣어서 양념장을 만들면 되겠다.”
할라피뇨를 다져 넣으니 생김새도 색깔도 감쪽같이 똑같았다. 그 맛도 웬만한 미식가가 아닌 이상 알아내기 힘들 정도였고.
“이야. 이렇게 좋은 대용품이 있었구나. 점점 희망이 보이네.”
할리피뇨 양념장을 넣어서 먹은 국수의 맛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후루룹.”
말린 표고버섯과 다시마로 끓여 낸 육수는 맑지만 숨겨진 감칠맛은 넘쳐 날 정도였고, 고기나 해산물이 없어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맛은 할리피뇨 양념장이 그 빈틈을 가득 채워 주고 있었다.
“국물이 얼큰하면서 시원하고, 게다가 깔끔하기까지 한데 배도 불러. 이런 식으로 수제비를 끓이면 딱 되겠다.”
비쉬파르막을 변형해 오찬 메뉴에 활용해 보라는 김용수 대사의 미션은 이걸로 해결이 되었다.
이 정도 맛의 육수라면 굳이 채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깊은 맛.
육수만 맛봐도 사찰 요리가 인정받는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수제비는 이걸로 해결됐는데, 다른 메뉴들은 어떻게 채우지?”
이번 오찬은 코스 요리가 아니라 뷔페식이었다.
코스 요리라고 해도 디저트까지 3~4가지 음식을 생각해 내야 하지만 뷔페는 그보다 많은 가짓수의 음식이 필요했다.
식사 메뉴인 수제비를 빼고, 적어도 5~6가지.
거기다가 김치나 양념장 등은 가짓수에 포함되지 않으니 실질적으로 준비해야 할 음식의 수는 거의 7~8가지나 되는 셈이었다.
“사찰식 육수는 어찌어찌 흉내 냈지만 다른 메뉴들이 문제네.”
나물이나 전, 볶음 등을 고기 없이 요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맛이 문제.
사찰 요리에 사용하는 비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호텔 주방장 출신이지만 사찰 요리엔 한평생 몸을 담은 건 아니었으니.
“시간이 좀 있으니, 책이라도 있으면 참고해 보겠는데.”
사찰 요리의 비법이나 조리법이 적힌 자료나 책을 본다면 분명 따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스님들처럼 손끝의 감각으로 익힌 솜씨는 아닐지언정 거의 비슷하게 따라 할 자신은 있었다.
“파나르의 국립 도서관 같은 데를 가 볼까? 에이. 거기에 설령 한글로 된 책이 있다 해도 사찰 요리에 대한 책이 있을 리가 없지.”
아쉽지만 전자책이라도 사서 보는 수밖에.
파나르에서 책을 빌리지도, 구할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여보세요?”
“윤아야. 나야 덕수.”
“알지. 왜 또 전화했어?”
“미안.”
일단 공금을 사용해 책을 구매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앞으로도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는 자료였으니까.
“혹시 우리 공금으로 책 같은 것도 구매할 수 있어?”
“책? 당연히 되지. 책이 필요해?”
“그냥 책이 아니라 전자책 같은 것도 될까?”
윤아에게 자초지종을 전부 설명했다.
부족한 정보를 찾기 위해선 책을 뒤져야 한다고.
직접 책을 구매할 수 없으니 전자책이라도 구매해야 한다고.
“어떤 내용들의 책이 필요한데?”
“사찰 요리랑 한국의 채식 요리 같은 내용이 담긴 책들. 좀 살 수 있을까? 안 되면 내 사비로라도 사야지 뭐.”
윤아는 뭔가를 찾는 듯 한참 동안 말이 없어졌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원하는 책 제목 좀 알려 줘 볼래?”
“공금으로 살 수 있대?”
“일단 알려 줘 봐 봐.”
인터넷에서 사찰 요리에 대한 책 5권 정도를 찾아서 윤아에게 알려 줬다.
“이 책 살 필요 없겠다.”
“응? 왜? 좀 필요한데 전자책은 공금으로 사는 게 안 되나 보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들이야.”
내가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윤아가 서둘러 내 말을 잘랐다.
“응? 이 책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원래 외교부 직원들은 공짜로 전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데 거기에 검색해 보니깐 5권 다 있는 책들이네. 그냥 빌려서 보면 돼.”
“정말? 그런 게 있었어?”
외교부에서는 해외 파견 근무를 하는 직원들을 위해 방대한 양의 전자책을 무료로 제공해 주고 있었다. 외교관뿐만 아니라 나 같은 요리사들도 당연히 사용할 수 있었다.
“내가 대신 가입해 줄게. 원하는 아이디랑 비밀번호 알려 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 주자 윤아는 5분 만에 가입이 완료되었다며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이야 이거 진짜 좋다. 웬만한 서점보다 책이 많네.”
“근데 덕수야. 너 혹시 태블릿 있어?”
“아니 태블릿은 없어. 눈이 좀 아파도 폰으로 봐야지 뭐. 책을 구했으니 그건 문제도 아니야.”
“그래도 폰으로만 보면 눈 아플 텐데.”
“이번엔 급하니깐 일단 보기만 하면 돼. 다음에 하나 살게. 고마워 윤아야 이번 건 완전 꿀팁이었다.”
이렇게 고급 자료를 공짜로 볼 수 있다니.
눈 좀 아픈 거 따윈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오늘 퇴근하고 만나자. 태블릿 빌려줄게.”
“정말? 안 그래도 되는데.”
“괜찮아. 나는 요즘 태블릿 잘 쓰지도 않아.”
“그래? 그러면 감사히 쓰고 돌려줄게.”
이제 메뉴를 정하고, 연습 또 연습하는 일만 남았다.
퇴근 후 윤아가 빌려준 태블릿을 들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사찰 요리의 비법을 1초라도 빨리 알아내고 싶었다.
“아이디어도 대단하고, 간단해 보여도 이게 진짜 실력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요리구나.”
요리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신선한 재료에 소금만 살짝 뿌려서 먹는 음식이다.
양념이 많을수록 복합적인 맛은 있지만 재료 본연의 맛을 죽이기 때문에 신선한 재료만 있다면 양념이나 소스 사용을 최소화하고 먹는 것이 최고의 요리 방법이다.
사찰 요리의 큰 맥락은 그것과 비슷했다.
신선한 채소와 최소한의 양념을 사용해 재료의 맛을 극대화하는 것.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을 내는 방법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좋아 맛을 제대로 재현해 낼 수만 있으면 샤샤라는 사람도 분명 만족할 수 있을 거야. 아니 이 정도면 평생 고기만 먹던 사람도 숟가락은 들 수 있게 할 수 있을 거다.”
퇴근 후 몇 날 며칠을 책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출근해서는 읽은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음식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오히려 양념이 적게 들어가니 최상의 맛을 내는 게 쉽지 않아 조금 골치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사찰 요리도 한식의 일부일 뿐.
그 맛은 내 손에서 빠르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