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제안
김용수 대사의 말을 듣고 나니 이번 오찬이 반드시 필요한 행사임은 분명했다.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다시는 없을 굉장한 기회였다.
“그러면 메뉴는 오늘 드셨던 수제비를 포함해서 다른 채식 요리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래요, 장 셰프. 근데 말입니다.”
“네 대사님.”
“이번엔 인원도 많고, 기자들과는 그냥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분위기가 될 것 같으니 뷔페식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뷔페식으로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중요한 정책이나 사안에 대해 대화를 할 땐 코스 요리가 적합하지만 이번 오찬은 인원도 많고, 자연스레 대화를 하며 취재를 하면 되니 뷔페식으로 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적당히 5~6가지 채식 요리를 뷔페식으로 준비하고, 마지막으로 다 같이 수제비 한 그릇 하는 걸로 마무리하면 어떨까요?”
“네.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저는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코스보다 대량으로 준비하는 게 좀 더 편합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물론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뷔페식도 쉬운 건 아니었지만 가니쉬나 플레이팅까지 계획해야 하는 코스 요리보단 조금은 더 수월했다.
“그나저나 어떤 채식 요리를 준비하면 좋을까요? 대사님은 맛있게 드셨던 채식 요리가 있으신가요?”
막상 채식 요리로만 메뉴를 정하려고 하니 막막했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채소보단 고기나 생선을 즐겨 먹었는데….
이럴 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들어 보는 게 도움이 됐다.
“채식 요리라… 저는 평소에 고기를 즐겨 먹던 사람이라.”
“그러니까요. 저도 완전히 육식파라 일부러 채식 요리를 찾아 먹은 기억은 없네요.”
김용수 대사 또한 나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유행한다지만 채식만 하며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내가 맛있게 먹은 음식 중에 채식이라고 할 만한 건 부처님 오신 날에 가서 먹은 절밥 정도뿐인데.”
“네? 절밥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부처님 오신 날에 절에 가면 꽁보리밥에 고추장도 없이 나물 몇 가지만 넣어서 주는 절밥.”
“절밥이라….”
“그건 특별히 들어간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맛이 좋더라구요. 산에 올라가서 먹어서 그런가?”
그렇지! 바로 그거야.
절밥이라 하면 그냥 나물 몇 가지를 넣어 비벼 먹는 비빔밥을 떠올리겠지만 범위를 사찰 요리로 늘리면 말이 달라졌다.
“절밥! 그거 좋은 아이디어 같습니다, 대사님.”
“그래요? 그 절밥을 오찬 메뉴로 한다는 말이에요?”
“단순히 절밥이 아니라 사찰 요리를 주제로 해서 메뉴를 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오! 그렇군요. 사찰 요리라면 의심할 것도 없이 100% 채식일 테니까요.”
“네 맞습니다. 대사님 덕분에 한숨 덜었습니다.”
“그래요? 이거 내가 요리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허허허.”
“분명 재능이 있으실 겁니다. 하하하.”
자신의 의견이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한껏 고조된 김용수 대사였다.
비록 얻어걸린 거지만 사찰 요리라는 아이디어는 내 무거운 어깨의 짐을 반 이상 내려놓게 해 줄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이제 어떻게든 사찰 요리에 대한 자료를 뒤지면 메뉴를 정할 수 있겠지.”
한국의 사찰 요리는 최근 하나의 요리 분야로 완전 자리 잡을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다.
세계 채식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내로라하는 미슐랭 셰프들도 앞다투어 그 비법을 배우고 싶어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때 그분이 양관 스님이었던가?”
내가 막 주방장이 되었을 때, 양관 스님이라는 사찰 요리 전문 스님이 호텔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사찰 요리를 주제로 우리 호텔에서 강연을 했고, 그때 짧게나마 협업을 하게 되었다.
“양관 스님이 알려 준 사찰 음식이 뭐 뭐였더라.”
그땐 스님의 나이도 어렸고, 사찰 요리에 대한 내공이 쌓이기 전이라 내가 알려 준 노하우가 더 많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후 사찰 요리의 대가가 되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좀 더 꼼꼼하게 배워 둘걸.”
양관 스님은 지금으로부터 최소 10년 후부터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현재에는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강연했던 때의 기억을 더듬어 레시피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 망했다.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안 나. 대충 재료가 뭐가 들어갔는지는 알겠는데, 양념은 뭘 쓰는지, 얼마나 넣는지 기억이 안 나네. 이거 골치 좀 아프겠다.”
몇 시간 동안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너무 오래 지난 일이라 언뜻언뜻 재료 정도만 기억이 날 뿐이었다.
“근데 어떤 기자길래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거야. 얼굴이나 봐야겠다.”
어떤 사연이 있길래 파나르에 온 지 1년도 되지 않은 김용수 대사가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걸까.
또 왜 하필 많고 많은 음식 중에 왜 채식 요리를 요구했는지 궁금해졌다.
머리도 식힐 겸 윤아가 보내 준 블로그 글을 다시 열었다. 비슷한 내용의 뉴스를 몇 번 검색하니 금세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어! 여기 있다.”
비록 하나뿐이었지만 조회 수가 꽤 많은 기사가 눈에 띄었다.
“이거 샤샤라고 적힌 거 맞겠지…?”
기사 내용까진 읽을 수 없었지만 기자의 이름은 더듬더듬 읽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었다. 좀 더 뒤를 캐 보고 싶은데.
“윤아한테 좀 부탁해야지.”
샤샤라는 기자의 히스토리를 좀 더 알아내 보고 싶어 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짧은 파나르어 실력으론 아직 부족했다.
-여보세요?”
-안녕?”
-네?”
-우리 반말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 그럼 그럴까?”
자기가 먼저 반말해 놓고 이제 와서 모른 척하기는.
-근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오찬 행사 잡힌 거 얘기 들었지?”
-응 당연히 들었지.”
-그러면 이번엔 어떤 메뉴를 준비해야 하는지도 들었어?
마침 윤아도 그 얘기를 듣고 조금은 의아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지만 김용수 대사는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직원들은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샤샤라는 기자 얼굴 한번 봤으면 하는데 파나르어가 어려워서….”
“그 사람 안스타는 찾아봤어?”
“안스타?”
“휴우… 그것도 안 해? 도대체 뭐 하고 살았던 거야?”
안스타라… 예전엔 나도 했었지. 이제 그런 걸 할 나이는 지났으니.
근데 수십 년 전 내 아이디가 남아 있긴 할까? 아니면 이참에 다시 가입해 볼까?
“그럼 윤아 네가 그 샤샤라는 사람 안스타 좀 찾아 줄래? 난 아이디가 없어서….”
“알았어. 잠시만.”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윤아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찾았어! 그 샤샤라는 기자.”
“벌써?”
샤샤는 1년 가까이 직접 채식주의자로 살며 관련된 기사를 꾸준히 올리고 있었다.
“매달 전 세계 다양한 채식 요리를 소개하는 피드랑 기사를 꾸준히 올리고 있었네.”
“아하 그래서 우리한테도 채식 요리를 요구한 거구나.”
“그런가 봐. 근데 대충 피드 둘러보고 있는데 아직 엄청 칭찬하는 채식 요리는 없었네.”
“그래?”
채식 요리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원래 고기를 먹던 사람이라면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 근데 이 사람에 안스타에 네 얘기도 있는데?”
“내 얘기가 있다고? 난 그 사람 만난 적도 없는데? 말도 안 되지 그건.”
놀라는 나와 달리 윤아는 나라는 것이 확실한 듯 숨소리마저 태연했다.
“내 이름이 쓰여 있어? 그 사람의 안스타에?”
“아니 이름은 아니지만 이건 분명 네 얘기가 맞아. 샤샤라는 사람도 이 블로거 팬이었구나.”
윤아는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는 날 위해 샤샤의 피드에 적힌 글을 통역해 차근차근히 읽어 줬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00 블로거. 나보다 더 기자다운 블로거라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몇 년간 올라온 글은 모조리 읽고 있지만 이 사람이 이렇게 칭찬을 한 요리를 본 적이 없다. 사진 속 이 미스터리한 셰프의 음식이 미치도록 궁금하다. 이 사람이라면 내 욕구를 만족시켜 줄지도 몰라. 반드시 찾아내 이 사람의 음식을 먹고 말겠어.
“라고 적혀 있는데 ‘사진 속 미스터리한 셰프’라는 사람이 바로 너를 말하는 거야. 그날 너랑 사장님들이 찍힌 사진이 같이 있거든.”
“그럼 내가 아니라 식당 사장님들을 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
내가 선보인 음식들이 조금 더 인기가 있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날 상섭과 민경이 내놓은 음식도 굉장히 수준 높은 음식이었다.
“아니. 이 블로거 글에 ‘정통 한식에 젊은 요리사의 신박한 아이디어가 가미되어 파나르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라는 문장이 있거든. 미안한 얘기지만 그 두 분을 보고 젊은 요리사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그… 그렇긴 하지.”
아무리 아시아인들의 나이를 젊게 본다 하지만 상섭과 민경은 환갑을 넘긴 나이였으니.
그날 요리를 한 사람 중 젊은 요리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 사람이 내가 한국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는 요리사라는 걸 찾아냈고, 우리 대사님이랑 안면이 있어서 그런 협상을 하게 된 거구만?”
“응 그런 것 같아. 그 블로거의 글을 기사로 자주 인용할 정도면 네가 누구인지 물어보는 것 정도는 쉬웠겠지.”
꼭 그렇지 않더라도 한 언론의 기자가 파나르에 있는 한국인 한 명의 신상을 알아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 샤샤라는 사람 대단한 사람이네.”
“그러게. 1년 가까이 채식 요리라고 하면 국적이나 재료를 가리지 않고 다 먹어 본 것 같아. 피드를 다시 살펴보니깐 엄청 많네.”
“그거 나도 좀 보여 줘. 메뉴들 참고 좀 하게.”
윤아의 아이디를 빌려 샤샤의 안스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샐러드, 콩 요리, 두부, 쌀국수, 과일 피자. 아이고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 봤구나. 무슨 음식 사진이 이렇게 많아?”
윤아의 말대로 채식 요리뿐 아니라 피드에 올린 음식 사진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이 정도 요리를 전부 다 직접 먹어 본 거라면 음식에 대한 상식도 일반인 수준은 훨씬 웃돌 것이다.
1년 가까이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처음에는 뜬금없는 요구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샤샤가 취재한 과정을 보고 나니 존경심이 생길 정도였다.
이렇게 자기 직업에 프로페셔널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일 줄이야. 이런 거라면 나도 질 수 없지.
비록 채식 요리라는 한 분야겠지만 샤샤를 만나 보지 않아도 나보다 채식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을 게 뻔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어때 덕수야?”
“뭐가?”
“그 사람 피드에 만족할 만한 채식 요리를 먹었다는 글이 올라오게 할 수 있겠어?”
“꼭… 그래야 해?”
윤아의 물음에는 꼭 그래야 하냐며 덤덤한 척 대답했지만, 이미 맘속 깊숙이부터 뭔가가 끓어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샤샤라는 사람만큼 나도 내 직업에 프로페셔널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 사람 맘에 드는 음식을 보여 주면 좋은 기사가 많이 올라올 거고, 우리 대사관이랑 덩달아 네 명성도 좋아질 거고, 그러면 본부에서도 우리 대사관을 더 좋게 생각하겠지?”
“그렇게까지 멀리?”
“그러면 우리는 성과금을 두둑하게 받는 거지.”
“오!”
윤아의 마지막 말이 나의 심금을 울렸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로 돈을 버는 사람을 프로라고 하던가?
성과금도 성과금이지만 요리사로서 이 샤샤라는 사람의 갈증을 해소해 주고 싶다는 도전 정신이 발동했다.
“좋아 내가 한번 보여 줄게. 그 사람의 안스타에 극찬이 등록되도록 해 보겠어.”
“오! 가능하겠어? 그럼 나도 그날 통역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당연히 가능하지! 이미 주제는 정해졌거든. 다만 그걸 제대로 해낼 수 있다면 말이지.”
서로의 강한 의지를 확인한 뒤 나는 곧바로 자료 수집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