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21화 (22/202)
  • 21. 비가 오는 날

    “네 진주요. 꽤 큰 도시고, 볼 것도 많은데 지방에 있어서 그런지 가 본 사람은 잘 없더라구요. 혹시 가 보셨어요?”

    당연히 가 보다마다.

    내 고향이 진주인데 그냥 가 보기만 했을 리가 없지.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진주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구석구석 모든 곳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 같았다.

    “저도 고향이 진주입니다.”

    “에? 정말요? 이런 우연이 있나? 진주 토박이세요?”

    “네 태어나서 고등학교 때까지는 진주를 떠나 본 적이 없네요.”

    “우리도 고등학교까지 진주에서 나온 토박이예요.”

    요리를 하겠다고 결정한 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지만 그 전까지는 진주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꽤 큰 도시였지만 내가 살던 곳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동네 사람들 전부를 알고 지낼 정도로 서로가 가까웠다.

    “그럼 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저요? 저는 당명고등학교….”

    “와 소름 돋네요.”

    “왜요? 설마?”

    윤아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팔뚝을 몇 번 내리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별말은 안 했지만 아버지의 표정 역시 놀란 얼굴, 아니 반가워하는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저희도 당명고등학교 출신이에요.”

    “정말요? 몇 회 졸업생이세요?”

    “저희는 66회요. 셰프님은요?”

    “저는 86회… 요.”

    윤아의 부모님은 나와 고향이 같은 것도 모자라 같은 고등학교의 선배였다.

    “이야 우리 대당명고등학교 후배님이셨구나. 세상 참 좁다. 안 그래요?”

    “그러니깐요. 저도 설마 여기서 선배님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선배님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나? 혹시 학교에 뽀빠이 샘도 아직 계시나? 우리 고3 때 담임이셨는데.”

    “뽀빠이 샘이요? 아직 계시죠. 제 고3 때 담임 선생님이시기도 했습니다.”

    “정말요? 힘은 여전히 장사시고?”

    “네 아직 팔팔하십니다.”

    체육을 담당하던 뽀빠이 선생님은 키가 작았지만 힘이 세고, 항상 긍정 에너지가 넘쳐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내 고등학교 시절 마지막 담임 선생님이셨는데 내가 졸업하고 10년 후쯤 뇌출혈로 쓰러지셨단 소식을 전해 들었다.

    병문안을 가서 팔팔하던 뽀빠이 선생님의 야윈 모습에 충격을 먹고 병실을 빠져나왔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쓰러지는 게 5년 후쯤이니깐 아직은 내 대답처럼 팔팔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실 것이다.

    “여튼 오늘 윤아 씨 덕분에 맛있는 것도 먹고, 두 분 덕분에 좋은 것도 배웠습니다.”

    “왜요? 벌써 가시게요, 후배님? 최근 진주 얘기 좀 더 해 주고 가세요. 몇 년간 못 가서 소식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저도 그러고 싶은데 내일 아침 일찍 출근을 해야 해서요.”

    “아 그렇구나. 그럼 가셔야지. 아쉽지만 어쩌겠어요. 나랏일 하시는데 늦으면 안 되지. 자랑스러운 우리 후배님.”

    한국에서도 고향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데 이 먼 나라에서 고향 사람, 그것도 같은 학교 출신을 만났으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나 역시 밤새 고향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내일을 위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았다.

    “우리 윤아랑 앞으로도 자주 놀러 다녀 주시고, 집에도 종종 놀러 와서 차 한잔 마시고 가요. 우리도 사람 찾아오는 거 무지 좋아하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자주 놀러 오겠습니다, 선배님.”

    “그래요. 다음에는 와서 꼭 뽀빠이 샘 얘기도 좀 해 주고, 진주 얘기도 더 해 줘요.”

    밑반찬이라도 싸 주겠다며 잠시 기다리라는 윤아의 어머니를 겨우 설득하고 현관을 나섰다.

    엄청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윤아는 큰길까지 마중을 가 주겠다며 함께 나를 따라나섰다.

    “오늘 저희 엄마, 아빠 TMI가 좀 많았죠?”

    “티 뭐요?”

    “TMI요 투 머치 인포메이션. 몰라요?”

    “그게 무슨 말이었지? 들어는 봤는데.”

    너무 오랜만에 듣는 줄임말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나도 예전엔 저런 유행어들을 거침없이 내뱉고 다녔는데.

    지금 다시 쓰려니깐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여튼 울 엄마, 아빠가 쓸데없이 옛날얘기를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서 사과드려요. 지루했죠?”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저도 고향 선배님들 만나서 엄청 반갑기도 했구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오히려 윤아 씨가 고생 많았어요.”

    “갑자기 고생이라니요? 뭐가요?”

    “한국에서 학교 다니던 시간, 그리고 낯선 파나르에 와서 적응하던 긴 시간 버티느라 고생 많았어요.”

    고생했다는 말에 윤아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그냥 위로해 주고 싶었던 건데 괜히 상처를 건든 건 아니었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럴 땐 빨리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상책.

    “흐음.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윤아 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 순간 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히 가 친구야.”

    “친… 구?”

    “맛집 친구도 친구니까. 그치? 우리 친구 맞지?”

    그 말을 남기고, 윤아는 뒤돌아 집을 향해 뛰어갔다. 내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갑작스러운 반말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참에 말을 놓는 것도 나쁠 것 없었다. 나도 그만큼 윤아가 편해지기도 했고.

    “참 오랜만이네.”

    새로운 친구가 생긴 느낌이 도대체 몇 년 만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것도 나와 동갑이면서 늙지 않은 친구.

    * * *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네요.”

    “그러게요. 예보를 보니 하루 종일 내릴 거라고 하던데.”

    새벽부터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뭇잎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어찌나 큰지 덕분에 알람 소리를 듣지도 않고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오랜만에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젊은 사람은 이런 느낌 잘 모르죠?”

    모르기는 왜 몰라.

    나도 조용히 빗소리에 잠겨 머리와 마음을 비우고 있는 중이었는데.

    가끔은 잔잔한 음악보다 이렇게 빗소리가 더 듣고 싶을 때가 있었다.

    “비가 와서 그런가 수제비가 생각나네요.”

    “오 대사님도요? 저도 딱 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뜨끈뜨끈하게 수제비 한 그릇 하면 딱 좋겠다라는 생각.”

    “그래요? 우리가 은근히 통하는 게 많은가 봐요.”

    “그런가 봅니다.”

    방금 아침밥을 먹고도 빗소리에 수제비를 떠올리는 걸 보면 두 사람 다 영락없는 한국인이었다.

    아침밥을 먹으며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한국 사람들.

    어쨌든 오늘 점심 메뉴 고민이 단번에 끝이 났다.

    “그럼 오늘 점심 때 수제비 한 그릇 하시겠어요?”

    “좋죠. 기왕 먹는거 장 셰프도 같이 먹어요. 오늘 점심은 같이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해 놓겠습니다.”

    “기대할게요. 장 셰프만의 특별한 수제비를 부탁해요.”

    분명 농담이었지만 요즘 들어 이런 말을 자주 하는 김용수 대사였다.

    나만의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달라는 말.

    몇 번의 만찬 때 선보였던 특이한 내 음식들이 맘에 들었는지 일상식에도 종종 특식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수제비가 거기서 거기지 뭐.”

    라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떠오른 게 있었다.

    얼마 전에 맛본 비쉬파르막.

    큰 접시에 담겨 있는 음식을 한 그릇에 옮기면 수제비와 다를 바 없었다.

    말고기로 육수를 냈다는 것 빼고는.

    “한번 해 보지 뭐.”

    나는 곧바로 관저 앞에 있는 식육점으로 향했다.

    비쉬파르막을 만드는 카즈는 파나르의 어느 식육점을 가도 구할 수 있는 국민 음식이었다. 아직 직접 만드는 법은 배우지 못했으니 사서 써야 했다.

    “여기다가 약간의 한국의 맛을 더해야겠지?”

    집 앞에서 사 온 커다란 카즈 한 덩어리와 대파, 양파, 통마늘을 넣고 육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순대처럼 생긴 카즈를 익히는 것과 동시에 육수를 뽑아내는 과정이었다.

    “면은 내가 직접 만들어야지.”

    마트에 가면 넓적한 밀가루 면도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직접 반죽을 만들어서 준비해 두었다.

    보글보글보글-

    한 두어 시간 끓이고 나니 육수가 진하게 우러나 있었다. 말고기 냄새와 함께 익숙한 마늘, 대파 향이 더해지니 맛깔스러운 육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크으 여기다가 고춧가루만 풀어도 완전 해장국이네. 아니 순댓국이라 해야 하나?”

    원래 비쉬파르막에는 통감자가 들어가지만 한국의 수제비처럼 한입 크기로 썰어 넣고, 호박과 양파, 간마늘, 매운 고추까지 송송 썰어 넣으니 익숙한 국물 맛이 되어 있었다.

    “나 왔어요. 장 셰프.”

    “어서 오세요 대사님. 식사 준비 다 되었습니다.”

    “냄새부터가 벌써부터 맛있네요. 사무실에서도 계속 수제비 생각이 나서 고생 좀 했네요.”

    갑자기 왜 이렇게 음식에 기대를 하시는 거지?

    평소 아주 작은 반찬 투정도 안 하고, 뭔가 먹고 싶다고 말한 적도 거의 없었던 김용수 대사였다.

    그런데 수제비는 꽤 먹고 싶었나 보다.

    “사실 오늘 만든 게 딱 수제비라고 할 수는 없는데….”

    “네? 왜요? 어떤 수제비길래…?”

    한껏 기대에 차 있던 김용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렇지만 겨우 점심 메뉴 하나로 삐진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뭐든 상관없으니 같이 드시죠.”

    “네 알겠습니다.”

    푹 익어 부드러워진 카즈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큰 그릇에 담았다. 잘 익은 수제비 면과 육수를 붓자 모양새는 수제비와 똑같았다.

    “대사님 혹시 비쉬파르막이라고 드셔 보셨어요?”

    “비쉬파르막? 그거 파나르 음식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그게 수제비랑 좀 비슷한 거 같아서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특별한 수제비를 만들어 달라고 하셔서….”

    “아… 그래서 그랬구나. 흘러가듯 던진 말을 그렇게 신경 쓸 줄 몰랐어요. 미안해요.”

    음식에 관련된 말이라면 아무리 흘러가듯 말해도 귀에 쏙쏙 박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런 얘기를 듣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나에게 불가능했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라? 근데 생긴 건 꼭 수제비인데요?”

    우려와 달리 식탁에 올라온 비쉬파르막은 그냥 수제비라고 생각이 들 만한 비주얼이었다.

    왜냐면 내가 일부러 의식해서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네 제가 한국식으로 조금 바꿔 봤습니다. 호박도 썰어 넣고, 간마늘도 넣고, 매콤한 고추도 썰어 넣구요. 말고기 카즈가 들어갔고, 육수만 조금 다를 뿐입니다.”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의 수제비가 나오자 김용수 대사는 별 거부감 없이 숟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카즈도 먹어 본 적 없다고 했지만 재료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연스럽게 수제비를 입에 넣었다.

    “어떠세요? 입맛에 좀 맞으세요?”

    “그냥 완전 수제비인데요? 게다가 엄청 맛있어요. 국물이 엄청 진해요.”

    “정말요? 다행이다.”

    “뭐에요. 괜히 실망할 뻔했잖아요.”

    김용수 대사는 그렇게 짧은 칭찬 한마디를 건네고, 식사에 열중했다. 파나르에 오고 난 후 몇 달 동안 이렇게 음식에 집중하는 김용수 대사를 본 적은 처음이었다.

    “국물도 진하고, 얼큰하니 오히려 내가 상상했던 수제비보다 훨씬 맛있는데요?”

    “그래요? 비쉬파르막 베이스로 만든 건데도 입맛에 맞나 봐요?”

    “고기는 무슨 고기든 항상 옳은 법이지요. 육수 맛이 진해서 그런가 다 맛이 좋네요.”

    멸치나 디포리를 이용한 해물 육수로 끓이는 일반 수제비와 달리 오늘 만든 수제비는 말고기로 육수를 끓여 낸 것이었다.

    낯선 음식인 말고기 카즈 냄새에 거부감을 느끼면 어쩌나 했는데, 마늘과 매운 고추를 좀 썰어 넣어 익숙한 맛을 냈더니 만족해하는 김용수 대사였다.

    “이거 진짜 파나르 음식 맞아요? 그냥 영락없이 한식인데?”

    “저도 저번에 처음 먹어 봤는데 입맛에 딱 맞더라구요. 그래서 그날 체할 정도로 많이 먹었습니다.”

    “하하하 나도 오늘은 체해도 좋으니 실컷 먹고 싶네요.”

    “많이 있으니 양껏 드십시오.”

    맛있게 먹어 주니 다행이었다.

    오늘 먹는 기세를 봐선 2~3그릇은 가뿐하게 먹을 것 같은데 미리 차를 준비해 놔야겠다.

    나처럼 속이 더부룩해질 수도 있으니.

    배운 거는 바로바로 써먹어야 했다.

    “그나저나 이게 진짜 파나르 음식이면, 우리 다음 만찬 할 때 수제비 같은 것도 내면 좋겠네요.”

    “만찬 때요? 밥이 아니라 조금 허전하지 않을까요?”

    “그런가요? 그럼 오찬 땐 어때요?”

    만찬은 저녁 식사를 오찬은 점심 식사를 의미한다.

    대게 술도 한잔하며 오랫동안 중요한 얘기를 나눠야 할 땐 만찬 행사를 주최한다.

    반면 초대해야 할 손님의 인원이 많고, 조금은 캐주얼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일 때는 오찬 행사를 진행한다.

    오찬은 진행되는 시간이 짧은 만큼 음식의 가짓수도 적고, 면이나 볶음밥 등 간편 음식이 제공되기도 한다. 인원이 많으면 코스보단 뷔페식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찬은 대부분 식사 시간도 길고, 술이나 와인도 곁들이기 때문에 음식의 가짓수도 많고, 좀 더 고급스러운 음식들이 코스로 제공된다.

    “오찬 때 메뉴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음식이 파나르에도 있으니, 수제비 같은 건 처음 보더라도 거부감 없이 편하게 먹을 수 있을 거 같네요.”

    “네 다음에 한번 준비해 보겠습니다.”

    김용수 대사의 말대로 충분히 적용해 볼 만한 아이디어였다.

    비쉬파르막이 한국인들의 입맛에도 잘 맞았으니, 수제비 역시 파나르인들의 입맛에도 잘 맞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말 나온 김에 이번에 해 보는 건 어때요?”

    “이번에요?”

    “네. 이번에 내가 꼭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요.”

    “그게 누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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