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20화 (21/202)
  • 20. 꼭 차를 마셔야 하나요

    “짜잔 저희 집입니다. 갑자기 초대해서 당황스러우시겠지만 들어오세요.”

    “음… 뭔진 몰라도 어쨌든 실례 좀 하겠습니다.”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가는 게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억지로 온 것도 아니고, 본인이 먼저 초대한 거니깐 최대한 덤덤한 척하려고 노력했다.

    “엄마, 아빠 나 왔어요.”

    “아… 어머니, 아버지도 계셨어요?”

    “당연하죠. 괜찮아요 저희 엄마 아빠 전혀 불편한 사람 아니에요.”

    왜 혼자일 거라 생각했지? 분명 그때 부모님 전부 같이 이민을 온 거라고 말을 했었는데….

    쓸데없이 조심스러워했던 내 자신이 창피해졌다.

    “안녕하십니까.”

    “엄마, 아빠 내가 저번에 말한 대사관 요리사님이셔. 장덕수 셰프님.”

    먼저 소개를 하기도 전에 나서서 윤아가 내 이름을 말해 줬다. 평소에도 내 얘기를 자주 했다며 윤아의 부모님은 처음 본 날 반갑게 맞이해 줬다.

    “반가워요 셰프님? 나도 셰프님이라고 부르면 되나?”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덕수 씨도 괜찮구요.”

    “셰프라는 말이 멋있는데 이참에 나도 좀 써 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호호 고마워요. 장 셰프님.”

    윤아의 말처럼 두 사람 다 나를 원래 알고 있던 사람들처럼 편하게 대해 줬다. 평소에 집에서 얼마나 내 얘기를 한 거야.

    “근데 왜 말도 없이 갑자기 집까지 같이 왔어? 미리 말이라도 좀 해 주지. 과일이라도 깎아 뒀을 텐데.”

    “괜찮아 우리 배불러. 아 맞다 엄마 나 요리사님이랑 비쉬파르막 먹고 왔어.”

    “그랬어? 어땠어요 요리사님? 맛이 괜찮았나요?”

    “네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맛있어서 너무 과식을 한 게 문제지만.”

    집까지 오는 동안 조금 걸었지만 여전히 속은 불편했다.

    “그럼 식당에서 차도 마시고 왔어?”

    “아니. 까먹고 차 안 마시고 나와서 집으로 데리고 왔지.”

    “그래서 속이 불편하셨구나. 비쉬파르막을 먹은 후엔 무조건 차를 마셔야지.”

    옆에서 내내 듣고만 있던 윤아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비쉬파르막을 먹으면 차… 를 꼭 마셔야 하나요?”

    두 사람은 내가 비쉬파르막을 먹고 차를 마시지 않았다는 이유로 속이 더부룩해졌다고 단정 지었다.

    “비쉬파르막이 좀 뭐라고 해야 하나? 음식 자체가 무거워요. 밀가루도 많고, 고기도 듬뿍 들어가고, 또 기름기도 많고.”

    “그렇긴 하죠. 그래서 맛있긴 합니다.”

    “맞아요 맛있긴 되게 맛있는 음식인데 먹고 나면 꼭 속을 썩여.”

    말고기의 기름과 밀가루가 섞여 내장에 들러붙기라도 하는 것처럼 누구나 먹고 나면 꼭 속이 불편해진다고 했다.

    그래서 비쉬파르막을 먹으면 반드시 따뜻한 차를 마셔서 마무리를 해야 한다고 알려 줬다.

    “여기 파나르 사람들은 평소에도 차를 무지하게 많이 마시는데, 특히 비쉬파르막을 먹고 난 후엔 적어도 뜨거운 차를 3잔 정도는 마셔 줘야 해요. 그래야 쑥 내려가.”

    “3잔이나요?”

    “마시다 보면 3잔은 부족한단 생각이 들걸요?”

    평소에 커피는 자주 마셨지만 차는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다. 가끔 티백으로 된 녹차정도나 마실 뿐.

    그런데 윤아의 부모님이 주시는 차는 일반적인 티백에 담긴 차가 아니었다.

    “뭐가 이렇게 많이 들어가요?”

    “우리는 랩톤 이런 거 안 마셔요. 그건 그냥 어디 산에 갈 때 가져가는 거고, 이런 차를 마셔 줘야 속이 쏴악 내려간다니까요.”

    속이 비치는 주전자에는 말린 민트 잎부터 레몬, 홍차 잎 그리고 산딸기처럼 생긴 빨간 과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자 파나르의 스페셜 티 한잔 마시고, 기름기를 다 흘려보내세요.”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뭐가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따뜻한 차 한잔으로 속이 좋아질 리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시원한 콜라 한잔이나 들이켰으면 좋겠는데.

    “맛은 어때요?”

    “저 원래 차는 별로 즐기지 않는데 이 차는 향이 아주 좋네요.”

    “다행이네요. 요리사들은 입맛이 엄청 까다롭잖아요.”

    향이 좋다는 건 100% 진심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홍차나 녹차보다 항상 커피나 탄산음료를 주로 마셨는데 윤아의 부모님이 만들어 주신 차는 향도 맛도 아주 진하고 좋았다.

    이런 차라면 가끔 마셔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 잔 더 하실 거죠?”

    “네 주세요.”

    순식간에 첫 잔이 비워지고, 두 번째 잔이 채워졌다. 첫 잔을 마시는 동안 주전자 안의 차는 더욱 짙게 우려졌고, 민트의 향과 홍차의 맛이 어우러져 속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이제 좀 속이 편해졌죠?”

    “어? 진짜… 그러네요.”

    꽉 막혔던 가슴을 몇 번 두드리고, 어깨를 폈다 숙였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아까까지도 뭔가가 꽉 막혀 있었는데… 어느새 트름 한번 하지 않고도 속이 시원해진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잔 더! 그러면 이제 완전히 내려갈 겁니다.”

    처음 한 잔은 당연히 받았고, 두 번째 잔은 남길 생각으로 예의상 받았다. 세 번째 잔까지는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어느덧 홀린 듯 찻잔을 내미는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몰랐는데 나 차를 좋아했구나.

    “꼭 비쉬파르막 아니어도 식사 후에 따뜻한 차를 마시는 습관을 만들면 속에 좋아요. 특히 기름기 많은 음식 같은 건 더더욱이요.”

    “맞아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삼겹살 먹고 난 후에 냉면이나 콜라 마시는데 그러지 말고 따뜻한 국수나 차를 마시면 아마 더 속이 편할 거예요.”

    옆에서 윤아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을 거들었다.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말고기나 돼지고기 기름이 차가운 음료수나 냉면을 만나면 굳어져 속이 불편해질 테니까.

    따뜻한 차를 마셔서 위가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덕분에 마무리까지 잘했습니다. 오늘 좋은 거 배웠습니다!”

    “에이 배우기는 뭘요. 그냥 파나르 사람들 다 하는 거 알려 준 것뿐인데.”

    윤아는 엄마와 아빠의 성격을 쏙 빼닮아 있었다. 처음 본 나에게도 아무런 의심 없이 친절하게 대해 주는 두 사람을 보자 윤아가 가족에게 많이 사랑받으며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두 분이랑 윤아 씨는 어쩌다가 여기 파나르까지 오셔서 살게 되셨어요?”

    한동안 꽉 막혀 있던 것이 시원하게 내려가자 자연스럽게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파나르라는 나라엔 교민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복지가 좋은 나라도 아니었다.

    물론 최근에는 많은 것이 변하기는 했지만 살기 좋은 나라를 꼽을 때 파나르를 꼽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파나르에 와서 살 생각은 아니었어요.”

    저번에 윤아가 파나르에 온 지 10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한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한창 사춘기 시기에 먼 타국으로 이민을 결정할 정도면 뭔가 큰 사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 입으로 딸 자랑하는 게 좀 쑥스럽긴 하지만 우리 애가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좀 좋았어요.”

    “아이 엄마. 좋기는 뭐가 좋아.”

    윤아가 민망한 듯 손을 저었다.

    따로 배우지 않고, 전문 통역사를 대신할 정도로 파나르어를 구사하는 걸로 봐서 평범한 두뇌는 아닐 거라 생각했었다.

    “어릴 때부터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 혼자 책도 많이 읽고, 질문도 많이 했었는데, 중학교 올라가고부턴 그게 문제가 되기 시작했어요.”

    “왜요?”

    “전형적인 한국 교육 때문이죠. 성과 위주의 교육. 그때부턴 윤아의 쓸데없는 질문에 대답을 해 주는 선생님은 없어진 거죠.”

    “그렇구나.”

    “그래서 궁금한 게 생겨서 질문을 하면 선생님들은 시간이 없다면서 그냥 무시하기 일쑤였고, 우리 윤아는 무작정 따라 읽거나 외우기만 하는 수업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그런 식으로 악순환이 계속된 거죠.”

    조금이라도 모난 부분을 허용하지 않은 채 무한 경쟁에 돌입하는 한국 교육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궁금한 게 많고, 무언가를 배우는 것 자체를 즐겼던 윤아는 학교에서 모난 부분을 담당했을 테니.

    “그러다 보니 친구들하고도 싸움이 잦았고, 선생님들도 그런 윤아가 자꾸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전학을 권하기도 했었어요.”

    “그런 사연이 있으셨구나.”

    “그런데 뭐 다른 학교라고 특별할 게 있나요? 어딜 가나 치열하게 경쟁하고, 원하는 것을 공부하지 못하는 건 똑같은데.”

    나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사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았지만 그냥 외우라는 것만 죽도록 외웠던 것 같다.

    성적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나 역시 그런 교육 방식에 지루함을 느껴 요리사의 길을 택한 거였고.

    마냥 평범하지만은 않은 두뇌를 가진 윤아는 한국의 시스템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이민을 생각했었는데 흔히 말하는 복지 국가들이 무조건 살기 좋을 거 같진 않았어요. 왜냐면 직접 겪어 보진 않았으니까. 남들이 다 좋다고 해서 나한테도 무조건 좋은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죠.”

    윤아뿐만 아니라 윤아의 부모님들 역시 평범한 사람들과는 생각하는 관점이 달랐다.

    “그래서 일단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기로 했어요. 사실 저희 남편 직업이 작가거든요. 굳이 한국에 살지 않아도 먹고살 정도는 벌 수 있으니깐 시간을 가지고 여행을 해 볼 수 있었어요.”

    “이야 대단하시네요.”

    “운이 좋았죠. 그렇지만 평범한 회사 생활을 했어도 우린 똑같이 결정했을 거예요. 우리한텐 윤아가 제일 소중했으니까요.”

    참으로 배울 점이 많은 부모님이었다.

    자식을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렇기에 윤아가 저렇게 밝고 똑똑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몇 년 동안 유럽도 가고, 북미, 남미, 아프리카까지 다 가 봤는데 윤아가 딱 여기에 살고 싶다고 말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었어요.”

    “왜요. 미국이나 스위스, 캐나다 이런 곳들은 다 별로래요?”

    “그냥 이쁘고 좋은 나라라고 하지 살고 싶다곤 말을 안 하더라구요. 근데 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옆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선택에 전혀 후회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동유럽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는 길에 우연히 며칠 묵은 파나르에서 살고 싶다라는 말이 처음 윤아의 입에서 나왔어요.”

    “갑자기요?”

    “네 아무 이유도 없이요. 저희도 놀랐죠. 파나르는 그냥 경유지였지 정식으로 머물 곳도 아니었거든요.”

    나는 옆에서 지켜보던 윤아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왜 파나르에 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윤아 씨?”

    윤아는 처음 파나르에 도착했던 날이 떠오른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느낌이 좋았어요.”

    “그냥요?”

    “처음에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느낌이 좋았어요. 도착했던 날 날씨가 너무 좋았고, 바람 냄새가 좋게 느껴졌는데 그것 때문이었을 수도 있어요. 마침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단풍잎이 떨어지는 길거리.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그날 파나르의 모든 게 좋았어요.”

    “그래서 그날 바로 살고 싶단 맘이 들었어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근데 며칠 지내다 보니깐 음식도 맛있고,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도 좋아 보이고, 그리고 밤늦게까지 노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걸 안전한 나라라고 느꼈나 봐요. 나중에 자기도 밤에 나가서 놀아야 하는데 유럽의 밤은 꽤 위험하거든요.”

    그 와중에 밤에 놀러 다닐 것까지 고려했다니.

    윤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제외하곤 어떤 나라가 자기에게 잘 맞는지 알 수 없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복지가 좋은 나라거나 선진국이라고 해서 꼭 살기 좋은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나라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윤아는 파나르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살고 싶다고 엄마, 아빠한테 말했었어요. 그렇지만 우리 전부 파나르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니, 일단 1년만 살아 보자고 하셔서 1년 동안 살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선택이 정확했던 거군요.”

    “네 맞아요.”

    윤아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지금은 조금 어수선하지만 곧 제가 기억하던 파나르의 모습을 찾을 거예요.”

    “맞아요. 반드시 그럴 거예요. 저도 열심히 대사님을 도울게요.”

    나 역시 파나르에 온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향수병 따위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일이 바빴던 것도 있었지만 윤아처럼 파나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에게도 잘 맞는 나라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우리 장덕수 요리사님은 고향이 어디세요? 한국에 계실 땐 어디서 사셨어요?”

    윤아의 이야기가 끝이 나자 이번엔 타깃이 나에게로 넘어왔다. 마시던 차가 조금 식었지만 오히려 향을 느끼기엔 더 좋은 온도가 되어 있었다.

    찻잔을 입에 갖다 대고 한 모금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저요? 직장 생활을 시작하곤 쭉 서울에서 지냈는데 고향은 좀 지방입니다. 경상도요.”

    “경상도요? 어디요? 저희도 고향이 경상도거든요.”

    “정말요? 두 분 다요?”

    “네 저희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와아 정말 오래전부터 만나셨구나.”

    “네 지긋지긋하죠.”

    “하하하.”

    어릴 때부터 쭉 같이 살아온 윤아의 부모님은 여전히 친구 같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가족들이었다.

    “여튼 저희는 경남 진주가 고향이에요. 요리사님은요?”

    “진주요? 경남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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