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파나르의 맛집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윤아는 한껏 신난 목소리로 메시지를 보냈지만 하나도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뿐이었다.
빼곡하게 쓰인 글자들 사이에 익숙한 사진들을 보고서야 겨우 이게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이거 시식회 때 내용인가요?”
“네 맞아요. 내용 읽어 보셨어요? 진짜 대박이에요.”
“저… 파나르어를 읽을 줄 모르는데.”
“맞다! 그렇네요. 미안해요. 혼자 너무 신나서….”
무슨 내용이길래 내가 파나르어도 못 한다는 걸 까먹었을 정도일까? 저렇게까지 호들갑을 떠니깐 나도 내용이 무척 궁금해졌다.
“설명해 드릴게요. 잘 들어 보세요.”
“이 많은 걸 지금 전부요?”
“음… 빼도 될 만한 내용이 없는데… 그러면 오늘 퇴근 후에 만나실래요?”
“오늘 당장이요?”
“네 오랜만에 맛집 친구도 만나고, 이것도 설명해 드릴게요. 원래 이런 글 쓰는 사람이 아닌데, 대부분이 칭찬이에요.”
시식회 때 초대되었던 블로거의 입맛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대부분의 맛집 전문 블로거들에겐 흔히 붙는 수식어였다.
설령 까다롭지 않은 입맛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억지로 까다로운 척을 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렇게 좋게 써 줬어요?”
“네! 이례적으로 아주 칭찬 일색이에요. 지금 당장 말해 주고 싶은데 답답해 죽겠네요.”
“뭐 그냥 블로거 한 명이 칭찬한 거 가지고 왜 그렇게 난리예요.”
“그냥 블로거라니요. 아니 공식적으론 그냥 블로거는 맞는데, 영향력으로 치면 일반 블로거가 아니죠. 조만간 여기저기서 반응이 올걸요?”
여기저기서 반응이라니. 한 명의 블로거의 힘이 그렇게도 큰 걸까?
어쨌든 한식당에 대해서 좋은 글이 올라갔다니 다행이었다. 새 단장을 하고 오픈하는 만큼 이런 식으로 입소문이 나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었으니.
* * *
“빨리 들어가요, 요리사님!”
“이제 인사도 안 하는 사이가 된 거예요?”
“인사할 시간이 어딨어요.”
윤아는 밀린 일이라도 많은 사람처럼 만나자마자 불도저처럼 나를 식당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손에는 기사를 프린트해 온 종이 뭉치가 들려져 있었다.
“이 식당 오랜만이네요. 메뉴판 좀 주세요.”
“제가 예약하면서 음식 주문도 해 놨어요. 음식 나오면 그냥 드시면 돼요.”
“주문까지요? 언제 또 예약까지 하고 주문까지 했어요?”
“그래도 맛집 친구 정기 모임 날이잖아요. 이 정도는 해 놔야죠. 아무리 번개라고 해도 대충 먹을 순 없죠.”
항상 먹는 것에는 진심을 다하는 윤아였다. 덕분에 나 역시 맛있는 파나르 음식을 편하게 맛볼 수 있었다.
“오늘 음식은 나오는 데 좀 오래 걸리니깐 기사부터 읽어 봐요.”
테이블에 올려진 물컵을 한쪽으로 치우고, 윤아는 프린트해 온 기사를 넓게 펼쳤다.
약 7장 분량의 기사에는 사진보다 글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이 사람이 아마추어치고 사진도 잘 찍긴 하지만 글을 잘 써서 유명해진 사람이거든요.”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식을 다루는 기사치곤 확실히 글이 많기는 하네요.”
윤아는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첫 번째 장부터 한 줄씩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전으로 인해 한동안 문을 닫았던 한국 음식 전문점이 새롭게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는 파나르에 사는 한국 교민들의 입맛뿐 아니라 현지 파나르인들의 입맛을 잡기 위해 시식회를 주최하는 등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와아 진짜 뉴스같이 쓰네요.”
“그렇다니까요. 여튼 계속할게요. 다양한 양념을 사용하고, 매운 음식이 많은 것이 특징인 한식은 파나르인이 섣불리 도전하기에 쉬운 음식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시식회에서 선보인 음식들은 달랐다. 정통성을 조금 내려 두고, 파나르인들의 입맛에도 딱 맞는 레시피로 변형시켜 판매할 예정이기 때문에 현지에서도 큰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된다.”
윤아가 통역을 잘하는 것인지 원래 내용 자체가 좋은 것인지 블로그 글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높은 수준의 글이었다.
평범한 아마추어가 아니란 것은 각 음식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었다.
“시식회는 한국 대사관의 헤드 셰프와 한식당 셰프팀 둘로 나눈 대결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결과를 떠나 두 팀 다 굉장히 수준 높은 요리 실력을 선보였다. 오 여기는 요리사님 칭찬.”
“감사합니다.”
깨알 같은 칭찬도 놓치지 않고 전해 주는 윤아였다.
“……특히 가장 대표적인 한식 중 하나인 비빔밥에 마요네즈를 첨가해 매운맛을 중화시키고, 파나르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요리법은 감히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아이디어였다.”
제법이구만.
그런 것까지 알아챌 정도면.
상섭과 민경도 단번에 이유를 알아채지 못했는데 이 블로거는 내가 마요네즈를 사용한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마지막으로 파나르에 오픈하는 평범한 한국 식당에 한국 대사관의 헤드 셰프가 직접 현장에 나와 노하우를 전수하고, 시식회까지 여는 모습을 보니, 대한민국이 파나르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한 명의 파나르인으로서 감사함을 느끼고,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하루였다.”
기사의 마지막 내용이 굉장히 가슴에 와닿았다.
마치 우리가 의도한 내용을 옆에서 듣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했다.
“진짜 글 좋네요.”
“그렇죠? 제가 그냥 블로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근데 조금 아쉽네요.”
“뭐가요?”
“이렇게 좋은 내용이 공식적인 언론사의 기사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게 조금 아쉽네요.”
이 글이 파나르의 공식 언론사 중 하나가 낸 기사였다면 번역해서 한국에 낼 수도 있고, 본부에도 떳떳하게 보고할 수 있었다. 글의 내용은 굉장히 수준이 높았지만 아무 공신력이 없는 그냥 블로거의 글일 뿐. 그게 조금 아쉬웠다.
“지금은 그렇지만 며칠 지나면 상황이 달라질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마 다른 기사들이 이 블로거의 글을 첨부해서 기사를 쓸 수도 있어요. 그런 일들이 제법 있었거든요.”
그만큼 신뢰도가 높은 블로거라는 의미였다.
정식 기자들도 음식 관련 기사엔 그의 글을 첨부할 정도.
“근데 윤아 씨는 그런 거까지 어떻게 다 아세요? 한국에선 아무리 유명해도 블로거의 행보까지 이렇게 꿰고 있는 사람은 잘 없는데.”
“한국만큼 음식을 다루는 블로거 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유명하다 할 만한 사람은 사실 이 사람이 유일해요. 그래서 이 사람이 맛있다고 한 집은 거의 다 가 보고 있어요 헤헤.”
“그러지 말고 직접 블로그를 운영해 보시는 게 어때요? 이 블로거 못지않게 음식에 조예가 깊으신 것 같은데.”
“제가 글 쓰는 재주는 없어서요.”
그냥 맘 편히 먹는 게 좋을 뿐 글로 표현하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집착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음식이 가장 맛있을 때, 온전히 음식에만 집중해야지만 행복하다는 윤아.
때마침 미리 예약해 놨던 음식이 서빙되었다.
“와우 이것도 엄청 양이 많네요.”
“그쵸? 이래서 파나르에선 맛집 친구가 꼭 필요해요.”
2인분을 주문했다고 했는데 엄청난 크기의 쟁반에 음식이 담겨져 나왔다.
고기와 감자는 전부 통으로 익혀져 있었고, 밀가루로 만든 넓적한 면이 그릇 아래 가득 담겨져 있었다.
“이건 무슨 음식이에요?”
“이거는 비쉬파르막이라는 음식이에요. 파나르의 모든 집안 행사, 축제, 파티 등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에요.”
“플롭처럼?”
“네 보통은 플롭이랑 이거랑 둘 다 준비를 하죠.”
분명 처음 보는 음식이었지만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릇에 담겨져 있는 모습이 다를 뿐이지 비슷한 음식이 한국에도 존재했다.
“이거 생긴 게 꼭 순대 같네요.”
“오 맞아요. 이건 카즈라고 하는 음식인데 말고기로 만든 순대예요.”
소금에 절인 말고기에 마늘과 각종 향신료를 첨가해 창자에 쑤셔 넣은 카즈라는 음식은 소시지 같기도 했지만 맛이나 생김새가 순대에 좀 더 가까웠다.
“그리고 이 면은 밀대로 얇게 밀어서 삶아 낸 건데 카즈랑 같이 먹으면 간이 딱 맞아요.”
“이건 완전히….”
“수제비죠?”
“맞아요 수제비.”
얇게 펴서 고기 육수에 삶아 낸 밀가루 면은 딱 수제비의 식감이었다. 후루룹 하며 국물과 함께 삼키니 그 맛도 수제비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은근히 파나르 음식이랑 한국 음식이랑 비슷한 게 많네요?”
“그렇죠?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한가 봐요.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인데 비슷한 게 있는 거 보면.”
“하하하 그러게요.”
주로 먹는 재료가 다를 뿐이었지 조리법은 비슷한 음식들이 많았다.
비쉬파르막을 잘 활용하면 만찬 때 수제비나 순대 같은 음식을 내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진짜 국물 맛이 진하네요.”
비쉬파르막을 먹는 방법은 삶아 낸 면과 고기를 먼저 먹은 뒤 따로 국물을 먹는 방식이었다.
말고기의 뼈와 살코기를 넣고 한참을 끓여서 그런지 국물도 뽀얗게 우려져 나와 있었다.
“제가 왜 예약을 했는지 아세요?”
“왜요?”
“비쉬파르막은 적어도 3시간 이상은 끓여야 하거든요.”
“역시… 그러니깐 이렇게 국물이 진하지.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겠네요.”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들어가기 때문에 제대로 맛을 내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마 전문점이니깐 3시간이 걸리지, 가정집에서 한다면 4~5시간은 족히 걸릴 음식이었다.
“미리 육수를 끓여 놓으면 바로 제공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국밥처럼.”
“정말요? 그렇게 파는 게 가능해요?”
혼잣말처럼 흘린 말이었는데 윤아가 놀라서 되물었다.
“만드는 방법을 정확히 몰라서 확실하진 않지만 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국밥처럼 한 솥 끓여서 주문 들어올 때마다 데워서 나가면 될 것 같은데.”
“오 만약에 그게 가능하면 저랑 장사하실래요? 제가 투자할게요.”
“고민 좀 해 볼게요. 윤아 씨랑 장사하면 윤아 씨가 다 먹을 거 같아서.”
“아니… 저는 미식가지 대식가는 아니거든요!”
“본인을 반대로 알고 있는 거 같은데요. 흐흐흐.”
낯설었던 파나르 생활이 어느새 점점 편해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크게 신경 쓴 건 아니었지만 계약 기간도 이제 확보되었다.
또 한 번도 해외에서 살아 본 적이 없어 혹시나 향수병이 생기지는 않을까도 걱정했지만 파나르 음식도 입맛에 잘 맞으니 큰 문제 될 게 없었다.
“여튼 미식가님. 앞으로도 맛집 친구로서 좋은 식당 소개 좀 많이 부탁드릴게요.”
“그럴 생각이지만 지금 분명히 해 둬야겠어요. 저는 미식가지 대식가가 아니에요. 알겠죠?”
“알았어요 알았어.”
식사를 끝낸 나는 이해도 되지 않는 기사를 한 번 더 꼼꼼히 살펴보았다. 먹음직스럽게 찍힌 음식 사진들을 보자 드는 생각이 있었다.
몇 년 아니 빠르면 몇 달 후에는 파나르 뉴스에 내 얼굴이 박힌 기사 하나쯤은 낼 수 있지 않을까?
꼭 내가 아니어도 비쉬파르막처럼 정성을 들인 음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요리사들의 얼굴이 좀 더 알려지길 바라는 맘이었다.
“감사합니다 맛집 친구님. 오늘도 덕분에 잘 먹었어요.”
“별말씀을요. 그래도 플롭이랑 비쉬파르막 드셨으면 큼직한 파나르 음식들은 다 맛보신 거예요.”
배가 터질 정도로 음식을 먹고 식당을 나오니 금세 속이 더부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비쉬파르막은 밀가루로 만든 면이 가득했고, 고기도 많이 들어 있어서 아무래도 위장이 조금 무리를 한 듯싶었다.
“왜요 속이 안 좋으세요?”
“크게 문제 될 건 없는데 그냥 좀 과식했나 봐요.”
불편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윤아가 물었다.
“아마 비쉬파르막 때문일 거예요.”
“왜요? 그걸 먹으면 꼭 탈이 나나요?”
“아뇨. 엄밀히 말하면 비쉬파르막 때문은 아니고, 그걸 먹고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내가 그걸 까먹다니.”
“해야 할 일이라니요?”
윤아는 뭔가 중요한 것을 까먹은 사람처럼 자신을 자책하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요리사님. 지금 시간 좀 괜찮으세요?”
“시간이요? 뭐 하시려구요? 딱히 할 건 없는데.”
“그래요? 잘됐다. 여기가 뒤가 바로 저희 집인데 저희 집으로 가요.”
“네? 갑자기 윤아 씨 집은 왜요?”
“비쉬파르막을 먹은 후엔 꼭 먹어야 하는 게 또 있거든요.”
갑자기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게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고민할 틈도 없이 등을 밀치는 윤아였다.
더 이상 배에 들어갈 곳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