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보통 블로거가 아니라고 했지
우와와와아-
치킨이라는 말에 식당 안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파나르인들도 한국어를 몰라도 치킨이라는 단어는 충분히 알아들을 테니.
그리고 다른 음식들과 달리 치킨이 담겨져 있던 그릇은 전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그만큼 가장 맛있었다는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한식당에서 치킨을 팔지 않아 많이 섭섭했었죠?”
“네에!”
상율의 질문에 익숙한 목소리가 많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왔다. 윤아였다.
“두 팀의 치킨이 어떻게 다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새로 오픈할 식당에서 치킨을 맛볼 수 있을 것 같군요.”
결과야 어떻든 그게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맛있는 치킨을 사 먹을 수 있다는 것.
돈이 있어도 사 먹을 곳이 없었으니 답답한 따름이었다.
“그럼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후아.”
나와 상섭, 민경의 긴 한숨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경쟁인 듯 경쟁 아닌 식당의 분위기.
두 사람도 이런 긴장감을 오랜만에 겪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없다면 음식의 맛은 퇴보될 수밖에 없다. 계속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선 오히려 좋은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표가 많이 갈렸습니다.”
“치킨인데?”
“무려 31대 9로 장덕수 요리사의 치킨이 더 많은 표를 획득했습니다.”
“하아.”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특히 그 블로거라는 사람의 카메라가 코앞까지 다가와 셔터를 눌러 댔다.
음식을 찍어야지 왜 나를 찍는 거야.
생각보다 큰 표 차이에 걱정이 되어 서둘러 상섭과 민경의 표정을 살폈다.
“두 분 다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이라니요. 내 가게 잘되자고 한 일인데. 고생은 요리사님이 하셨죠.”
다행히도 상섭과 민경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몇 초간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두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재밌었습니다.”
“네?”
“결과를 떠나서 내 음식에 대해 사람들의 솔직한 의견을 들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상섭의 말에 옆에서 민경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요리를 시작했을 땐 계란후라이 하나를 만들어도 맛이 어떤지 동네방네 사람들한테 다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는데… 어느샌가 내 요리가 맛이 없어? 그럼 네 입맛이 이상한 거지, 라는 생각을 솔직히 조금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아….”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그 웃음은 절대 비웃음이 아니었다.
나도 몇 년 동안은 그렇게 살았었기에 철저한 공감의 웃음이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서 이 호텔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내 음식이 맛이 없어? 그럼 나가. 당신은 내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어, 라는 생각을 한참 가지고 살았었다.
“근데 아시다시피 요리엔 정답이 없잖아요?”
“그렇습니다.”
“근데 왜 나는 정답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는지 모르겠네요.”
파나르에선 상섭과 민경의 한식당이 가장 손님도 많았고, 다른 한식당에서도 두 사람의 음식을 따라 했을 것이다. 마치 그것이 정답인 것처럼.
다른 사람이 상섭과 민경의 가게를 정답이라 생각하고 따라 하는 건 상관없지만 두 사람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몇 년간의 시간이 조금 아깝다는 느낌이 드네요. 요리사님은 여기 온 지 몇 달밖에 안 됐는데 이것저것 많이도 시도해 보신 것 같은데.”
“하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시면 되죠. 저야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
“제가 요리사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진작에 파나르 요식업계의 큰손이 되어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이제라도 그렇게 되시면 되죠. 두 분 다 실력은 충분하십니다.”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고집이 조금 강할 뿐이었지 요리 실력과 주방에서 풍기는 포스는 어느 레스토랑의 셰프들과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어쨌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요리사로서 열정이 다시 샘솟는 거 같네요. 오늘 시식회 결과를 참고해서 메뉴를 다시 짜 봐야 할 것 같네요.”
“저도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저도 이 시식회 결과를 만찬 행사 때 적용해 보록 할게요.”
두 사람은 일분일초가 아까운 듯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칼을 잡았다. 시식회를 준비하는 게 꽤 피곤했을 텐데 해 보고 싶은 요리가 많이 있는 것 같았다.
무거운 몸을 끌고 가서라도 꼭 만들어 보고 싶은 요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요리사님!”
“아이 놀라라.”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등짝을 내리쳤다.
“윤아 씨. 좀 살살 때리지.”
“미안해요. 많이 아팠어요? 맛있는 걸 많이 먹어서 힘이 넘치나 봐요.”
“그래 보이네요. 음식들은 맛있게 드셨어요?”
“완전 대박.”
윤아는 신이 나서 양손의 엄치를 치켜세웠다.
“근데 이분은 왜?”
“아 맞다. 요리사님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인터뷰요?”
윤아 옆에서 멀뚱히 서 있던 사람은 파나르 유명 블로거였다. 주로 맛집이나 음식 관련 내용을 소개하는 블로거.
방금까진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이젠 수첩과 볼펜을 들고 있었다.
“인터뷰라고 할 것도 없고, 그냥 오늘 음식에 대해서 좀 궁금한 게 있대요. 블로그 쓸 때 자세하게 쓰면 더 좋으니까.”
“뭐 그런 거쯤이야. 물어보세요.”
윤아가 옆에서 통역해 주고, 블로거는 궁금한 것을 쉴 틈 없이 질문했다.
한식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이냐, 오늘 먹었던 음식들은 정통 한식과는 어떻게 다른지, 파나르인들이 좋아할 만한 다른 한식들은 뭐가 있는지.
질문의 개수는 끝이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질문의 수준은 높아졌다.
물론 내가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범위였지만 한식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높은 사람 같았다.
“와아 이 사람 진짜 블로거예요? 질문 수준이 웬만한 기사들보다 높은데요?”
“그냥 블로거라고 하기는 좀 어렵죠. 뉴스나 기사들고 이분 포스트를 참고해서 글을 쓰는 경우도 제법 있거든요.”
“정말요? 어쩐지 질문하는 수준이 남다르다더니.”
“음식 관련해서 꽤 영향력이 있어요. 아마 한인회 회장님께서 이분 부르려고 힘 좀 쓰셨을걸요?”
“왜요?”
“왜긴요. 홍보 효과가 확실하니까요.”
세계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것은 비슷한 것 같았다. 일반 블로거라고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홍보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대신 좋은 내용의 글을 써 줬을 때만.
반대로 식당이 형편없었다는 글을 썼을 때는 가게 문을 닫게 되는 경우도 생길 정도로 그들의 힘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이분이 오늘 장 셰프님에 대해서 많이 물어보더라구요.”
“저요? 저를 왜?”
“이렇게 젊은 사람이 대사관 셰프를 하고 있으니깐 신기한가 봐요. 다른 나라 대사관 셰프들은 대부분 백발에 연륜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아아….”
“워낙 음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한식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는데 오늘처럼 맛있게 먹은 적은 잘 없었대요.”
“그럼 여기 한식당 글 좀 잘 써 달라고 해요. 기왕이면.”
“안 그래도 말했어요. 아마 잘 써 줄 것 같아요.”
좋은 내용의 글을 써 달라고 구걸하고 싶진 않았지만 여긴 내 식당이 아니었다. 파나르인들에게 빨리 소문이 나려면 이런 블로거들의 힘도 반드시 필요했다.
모든 질문이 끝이 나고, 블로거는 명함을 하나 건넸다. 파나르어로 적힌 이름은 읽기 힘들었지만 자신의 블로그 주소가 밑에 적혀 있었다.
“다음에 한국 대사관에도 한번 갈 수 있으면 좋겠대요. 오늘 보여 준 한국 음식 너무 신선했고, 좋았대요.”
“이래 놓고 이상하게 글 쓰면 찾아가서 귀찮게 할 거라고 전해 줘요.”
윤아는 내 농담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인사를 건넸다.
오늘 시식회에서 선보인 요리를 모두 메뉴에 적용할지 말지는 상섭과 민경의 몫이었다.
투표 결과가 정확한 정답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식으로 파나르인들의 입맛을 잡아야 할지 감은 잡았을 거라 생각한다.
나 역시 파나르인들이 참석한 만찬 때 어떤 음식을 선보여야 할지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점점 파나르의 생활이 더욱 흥미로워지고 있었다. 도전 과제가 있는 건 항상 흥분되는 일이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대사님.”
“장 셰프. 좋은 아침이에요. 주말에 바빴다면서요?”
“주말에요? 아 시식회 말씀하시는구나.”
“그 재밌는 구경에 왜 난 안 초대했어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주최자가 아니었어서.”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이라고 말했지만 김용수 대사의 표정에 아쉬움이 약간 묻어나는 것 같았다.
“회장님 말로는 굉장했다고 하던데요?”
“아이고 굉장은 무슨요. 그냥 사람들 몇 명 모아서 시식회 한 것뿐입니다.”
“에이, 무슨 기자들도 오고 난리 났다고 하던데?”
“정식 기자는 아니고 그냥 블로거랍니다. 그만 놀리세요 대사님.”
“하하하 알겠어요. 여튼 잘 끝났다니 다행이네요. 사실 이번 일은 제가 본부에다가 보고드릴 예정이에요.”
“정말요?”
저번에도 농담처럼 말한 줄 알았는데 진짜 본부까지 보고를 한다는 말에 눈이 번쩍 떠졌다.
“다양한 공공 외교 사례를 기록으로 남겨 두는 건 아주 중요해요. 관저에서 오, 만찬 행사 외에 쿠킹 클래스나 김장 행사 등을 하는 외교도 있었지만 이렇게 현지 한식당에 요리 컨설팅을 해 준 사례는 처음이에요.”
“그렇군요.”
“게다가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다면서요. 반응이 안 좋았다면 본부 보고까지는 안 할 생각이었어요.”
“하하하 당연히 그래야죠.”
이것 또한 물론 농담이겠지만 기왕이면 새로운 시도에 좋은 결과까지 보고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이번 시식회는 장 셰프가 계획하고 주최한 걸로 보고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사실이잖아요. 얘기 들어 보니깐 먼저 시식회를 하자고 한 것도 장 셰프고, 대결은 아니었지만 장 셰프가 만든 음식들이 더 많은 표를 얻었다면서요.”
“그렇긴 하지만….”
“점수 딸 수 있을 때 따 놓으세요. 나처럼 이제 와서 급하게 점수 따려고 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렇게 얻은 점수가 지금은 보이지 않겠지만 나중엔 분명 도움을 줄 것이다. 청와대에 들어가 요리를 하게 되는 날을 기약하며 챙길 건 챙겨 둬야겠다.
“그래서 말인데요, 장 셰프.”
“네 말씀하세요, 대사님.”
“이제 대사관 요리사 정식 계약을 맺읍시다.”
“정말요?”
정신없이 지나간 3개월이었다.
수습 기간 3개월이라는 말이 영 찜찜했었다. 맘에 들지 않으면 그 기간 안에는 자를 수 있다는 의미.
실력으론 안 잘릴 자신이 있었지만 어려진 나이가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젠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 정식 계약을 합시다. 장 셰프가 있어야 제가 든든할 것 같습니다.”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요리사 이제 필요 없으세요?”
“하하하 은근히 뒤끝 있네요, 장 셰프도.”
“농담입니다.”
“이제 필요 없습니다. 장 셰프 실력과 능력을 알았으니까. 누구보다 저를 빛나게 해 줄 거라 믿습니다. 함께 가시죠.”
“좋습니다. 갈 수 있는 끝까지 함께 가시죠.”
이제 고용 안전이 확보되었으니, 맘껏 달릴 일만 남았다. 김용수 대사의 눈빛도 며칠 전과는 뭔가 달라져 있었다. 더욱 뜨겁고 반짝인다고 해야 할까?
축축 처져서 월급만 받는 사람들보단 열정이 넘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나 역시 그런 상태였으니.
띠리리링-
김용수 대사가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요리사님!”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아였다. 전화를 받을 때부터 한껏 업되어 있는 목소리.
“무슨 일이세요?”
“제가 메시지 하나 보내 드릴 테니 한번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