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4화 (15/202)
  • 14. 한식당 오픈

    띵디딩딩 띵딩-

    “여보세요?”

    친구나 지인이 없는 파나르에서 울리는 전화는 항상 낯설었다. 대사관 직원이나 윤아 말곤 나를 찾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또 보나 마나 업무 때문에 전화를 한 윤아겠지.

    “안녕하세요, 장덕수 요리사님.”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낯선 전화벨 소리와 달리 들려오는 목소리 자체는 익숙했다. 윤아는 아니었지만 어디서 들어 본 듯한 목소리.

    그렇지만 누군지 번뜩 떠오르지 않았다.

    파나르에서 나에게 전화를 걸 사람이 몇 명 되지도 않은데.

    “제 목소리 벌써 잊으셨습니까?”

    “네? 글쎄… 요. 낯설지는 않은데… 죄송합니다.”

    “얼마 전에 같이 으쌰으쌰 해 보자고 난리를 쳐 놓고, 벌써 잊어버리셨다면 조금 섭섭한데요?”

    “아! 회장님.”

    얼마 전에 만났다는 말에 번뜩 떠올랐다.

    가장 까다로웠지만 가장 뿌듯했던 손님들.

    “한인회 김상율 회장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이제야 기억하시네요. 요리사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얼굴 뵌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러십니까? 잘 지냅니다. 회장님은요?”

    “저야 뭐 이제 특별한 일 생길 나이가 아닌지라….”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여 주던 카리스마 있는 모습과 달리 평소 상율은 사람을 참 편하게 해 주는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회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대신에 작은 걱정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걱정거리요? 무슨 걱정이십니까?”

    가벼운 안부 인사를 끝내자 상율은 스무스하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때 팁을 받고, 부탁 하나를 들어 달라는 말이 떠올랐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그때 말씀드린 요리 좀 가르쳐 주십시오.”

    “요리요? 무슨 요리를 어떻게 가르쳐 드리면 되나요?”

    “저는 아니고, 제 지인이 있습니다. 파나르에 한식당을 곧 오픈할 겁니다.”

    “오 드디어 파나르에도 한식당이 새로 생기는 건가요?”

    “엄밀히 말하자면 새로 오픈은 아니고, 예전부터 하셨는데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하시는 거예요. 새로 인테리어를 싹 하구요.”

    “정말요? 그럼 저보다 잘하시겠네요. 제가 도움드릴 만한 게 있을까요?”

    상율은 한인회 회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었다. 교민들이 사업을 시작하면 발 벗고 나서 도움을 주는 것.

    그게 한인회가 할 일이고, 회장이 나설 일이었다.

    “오래 하긴 했는데 매출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가 봐요. 기왕 고생하는 거 돈도 잘 벌면 좋잖아요.”

    “당연히 그렇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요.”

    “그래서 요리사님이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음식 맛에 무슨 문제라도…?”

    주위엔 아무도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맛에 문제가 있냐고 묻는 것이 조심스러웠지만 그 이유가 아니면 나에게 도움을 청할 리도 없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형님과 형수님 두 분 다 손맛이 아주 끝내줍니다. 아주 제대로예요. 그래서 대부분 교민들이 그 집만 찾았어요.”

    “그렇다면 왜…? 음식 문제가 아니라면 제가 더더욱 도움을 드릴 부분이….”

    음식도 맛깔나게 잘 만들고, 식당 운영도 이미 오래 해 본 사람인데 내가 도움을 줄 만한 게 있을까?

    인테리어도 새로 했다고 했으니, 매출이야 음식이 맛있으면 곧 늘어날 게 뻔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음식에 신경을 쓰는 만큼 매출이 그리 만족스럽지가 않아요. 그래서 좀 도와주셨으면 해요.”

    “음식이 맛있으면 알아서 입소문이 나고, 금방 손님이 늘 텐데요. 저로선 지금 저한테 도와 달라는 말이 이해가 잘되지 않아서요.”

    아주 상식적인 말이었다.

    맛이 확실하고, 적당히 친절하기만 하다면 매출은 늘어날 것이다. 한국처럼 경쟁이 심한 것도 아니고, 뭐든 적당히만 하면 될 텐데.

    “이 상태로는 더 이상 매출이 늘어날 일은 없습니다.”

    “왜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지금 음식만 팔아선 파나르에 있는 교민들만 찾아올 테니까요.”

    상율이 말한 한식당은 아주 훌륭한 식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라도 태생인 부부는 김치에서부터 모든 밑반찬을 전부 만들 정도로 손맛이 좋았다. 물론 손님들에게 상냥한 건 덤이었고.

    단, 손님들이 순수 한국인일 때만을 가정한다면 훌륭한 식당이었다.

    “매출을 늘리려면 한식에 관심이 있는 파나르 사람들도 좀 찾아와 줘야 하는데 파는 음식들이 너무 정통 한식들이라….”

    “아… 그렇군요.”

    “갈치조림, 고등어조림. 김치전골, 해물탕 등등 다 맛은 있는데 한국 사람들이나 좋아할 만한 메뉴잖아요 이런 것들은. 게다가 만드는 방식도 파나르 사람들이 먹기엔 조금 부담스럽지 않은가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렇긴 하죠. 양념이 많이 들어간 한국 음식을 부담스러워할 수 있죠.”

    “파나르 젊은 친구들도 요즘 K팝이니 뭐니 하면서 한국 음식에도 엄청 관심 가지는데 걔네들이 저런 음식을 먹겠냐구요. 요즘 한국 애들도 안 먹는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정통성을 지키는 것도 중요했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의 트랜드를 따라가는 것도 필요했다.

    특히 한국의 음식 문화는 그 어느 나라도 흉내 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으니.

    “소문을 듣자 하니 파나르 외교부 장관도 관저에 오셨다면서요?”

    “네 회장님 오시기 전에 왔다 가셨죠.”

    “그때 만찬 메뉴가 뭐였어요?”

    “김치볶음밥이랑 치즈 감자전이랑 닭고기냉채였어요.”

    “그렇지! 그 치즈 감자전 그런 거요.”

    상율은 치즈 감자전이라는 말을 듣자 소풍에서 보물이라도 찾은 사람처럼 반가워했다.

    “파나르 사람들은 감자도 많이 먹고, 치즈도 많이 먹는데 그 두 개를 합쳐서 퓨전식으로 만드니깐 좋아했을 거예요. 그렇죠?”

    “네 맞아요.”

    “그런 젊은 요리사들의 아이디어가 필요해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겐 지금 음식이 너무 입맛에 맞지만 그 사람들만 보고 장사를 하기엔 교민들 수가 너무 적어요. 지금은 더 줄었으니….”

    돈을 벌어야 식당도 계속 유지할 수 있고, 더 좋은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파인다이닝이나 호텔처럼 적자를 보고도 홍보 효과 때문에 계속 운영을 할 식당이 아니었다.

    줄어든 교민들 때문에 새로 오픈한다 해도 매출은 더욱 줄어들 게 뻔했다.

    애써 준비한 음식을 선보이지도 못하고 버린다면 내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았다.

    “어떤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손을 보태 보겠습니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뇨. 요리사님이라면 당연히 도움이 되죠. 그럼 언제 시간이 되시겠습니까?”

    평일에는 시간을 낼 순 없으니, 주말에 약속을 잡았다.

    어차피 주말엔 할 것도 없었고, 하루 종일 방에 있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김용수 대사님한테 여쭤보니, 이것도 공공 외교 사례로 보고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적극 권장하시던데요?”

    “정말요? 이런 것도 가능해요? 그렇다면 저 역시 땡큐죠.”

    현지에 오픈하는 한식당에 대사관 요리사가 메뉴 교육을 했다는 것도 충분히 공공 외교 사례로 적용하기에 가능했다.

    식당이 좋은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면 국격에 분명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맞습니다. 요리사님의 인사 고과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랍니다. 잘 좀 부탁드릴게요.”

    “에이 꼭 그런 거 아니라도 도와 드려야죠. 받은 게 있는데. 흐흐흐 그럼 주말에 뵙도록 할까요?”

    “하하하 토요일 편한 시간에 식당으로 오세요. 주소 보내 드릴게요.”

    그냥 선심 쓰듯 도와주려고 했는데 공식적으로 실적에 올라갈 수도 있다니 더욱 욕심이 생겼다.

    이러한 사례가 많아지면 내 평판도 좋아질 게 뻔했으니. 뭐든 티가 나는 경력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 이것 역시 오랜 회사 생활을 통해 알아낸 나의 노하우.

    * * *

    “안녕하세요 회장님.”

    “일찍 나오셨네요?”

    “주말에 딱히 할 일도 없고, 나이가 들어서 아침잠도 없는 편이라.”

    “말하는 게 꼭 우리 동년배 같으시네요.”

    “하하하 그런가요? 제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해서 그런가 봅니다.”

    식당은 아직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가 채 사라지지도 않은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전인데 조금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으니.

    “제대로 준비하시나 봐요 이번에.”

    “네 형수님이랑 형님이 완전 이를 갈고 계시더라구요. 어차피 이거 아니면 할 게 없으시다고.”

    “그래 보이네요.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겉으론 되게 이쁘네요.”

    한식당이라는 이름과 달리 겉모습은 굉장히 세련되고, 트렌디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홍대 한복판에 들어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

    아마도 파나르의 젊은 고객들을 잡기 위해 노력한 것 같았다.

    “이야 엄청 크네요!”

    “그렇죠? 무슨 요리든 일단 좁아서 못 할 일은 없을 겁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엄청난 규모에 기가 눌렸다. 이 넓은 곳을 전부 다시 리모델링했으니, 주인들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가게 내부도 이쁘고, 홍보만 잘하면 손님들 많이 찾아오겠어요.”

    “그렇죠? 이번에 어려운 상황에도 돈 많이 투자했어요. 무조건 성공해야 합니다.”

    마치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나서는 상율을 보자 마음 한쪽이 조금 묵직해졌다.

    미약하게나마 나 역시 도움을 주고 싶어졌다.

    “형님, 형수님 저희 왔습니다.”

    “아이고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주방에 들어서자 이런저런 준비로 분주해 보이는 부부가 나와 상율을 반겼다.

    김치를 담갔는지 팔 여기저기에 고춧가루가 묻어 있었다.

    “이쪽은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 장덕수 씨입니다.”

    “반갑니다. 장덕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난 또 대사관 요리사라고 해서 우리 또래나 되는 줄 알았는데 엄청 젊네! 나는 김상섭이라고 하고 여기는 우리 와이프 양민경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두 사람은 반가운 듯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마치 아들이나 손자를 반기듯.

    음식은 아직 맛보지 못했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손님들에게 얼마나 살갑게 대해 줬을지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전부 나를 보자마자 계속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손님을 대하듯이.

    원래 성격이기도 했겠지만 오랜 습관 덕분에 생긴 직업병 같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손바닥에 전부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고생 많았겠네.’

    식당을 운영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밝은 미소 뒤에 숨겨진 지금까지의 고난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것도 타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식당을 한 것이니.

    “식사는 하셨어요 둘 다?”

    “아니요. 아직 안 했습니다.”

    “그럼 우리도 마침 밥 먹을 참이었는데 같이 들어요.”

    두 사람은 나와 상율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곧바로 밥솥을 열어 그릇이 넘치도록 고봉밥을 퍼 왔다.

    이렇게 퍼 주니 남는 게 없지.

    파나르 물가가 아무리 싸다고 하지만 공짜는 아니었으니.

    “손님들한테도 이렇게 많이 주시는 건 아니죠?”

    “에이 밥은 많이 주라고 하면 줘야지. 식당 하는 사람이 밥 가지고 치사하게 그러면 안 되지.”

    “그렇긴 해도 이때까지 고생하셨으니 이제라도 돈 많이 버셔야지요.”

    “그래서 이제 젊은 사람들 많이 올 수 있게 인테리어도 이쁘게 하고, 그 안스타인지 뭔지 그것도 시켜서 좀 해 볼라고요.”

    그래도 다행인 건 돈을 벌 생각이 있다는 것이었다. 속으로 제발 막 퍼 주겠다, 배고픈 사람들한텐 언제나 공짜로 밥을 주겠다 이런 소릴 안 하길 바랐다.

    이제 누구보다 본인들을 챙겨야 할 나이인데.

    “가게가 이뻐서 좀만 입소문 나면 금방 떼돈 버시겠어요.”

    “정말요? 젊은 사람이 보기에도 가게가 괜찮아요? 우린 뭘 몰라서 인테리어 하는 분한테 다 맡겼는데.”

    인테리어 업자 역시 상율의 소개로 진행된 것이라 했다.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쁘고, 세련되어 보였다. 젊은 사람들 눈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음식 맛은 우리 와이프가 나보다 훨씬 좋으니깐 걱정 안 해도 돼요. 인테리어가 걱정이었는데 우리 젊은 요리사님이 괜찮다고 하니 안심이 되는구만.”

    “그래도 제 말을 전부 믿지는… 마시고.”

    “여튼 밥부터 먹읍시다. 오늘은 김치만 미리 만들러 온 거라서 밥이랑 김치뿐이니께 그냥 먹읍시다.”

    진짜 반찬은 김치 하나뿐이었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왜냐면 김치 양념이고, 빛깔이고 먹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진짜 제대로 된 김치구나.

    “김치 색깔부터 장난 아니네요. 재료는 어디서 구하셨어요? 파나르에서 산 건 절대 아닐 테고.”

    “배추는 내가 따로 사는 곳이 있고, 거기 가야지만 제대로 된 배추를 구할 수 있어요. 나중에 요리사님만 따로 알려 줄게요. 비밀이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고춧가루랑 양념들은 한국에서 갖고 왔어요. 여기 거로는 영 성에 차지 않아서.”

    “역시….”

    파나르에 파는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퀄리티의 김치가 아니었다.

    번거롭고 비싸겠지만 김치 재료만큼은 한국에서 날아오는 비행기로 직접 받는다고 했다.

    “자 일 시작하기 전에 든든하게 먹고 시작합니다.”

    민경이 갓 담은 김치 한 포기를 쭉쭉 찢어 각자의 밥그릇에 올려 주었다. 논두렁은 아니었지만 모내기나 추수 후에 새참을 먹는 기분이랄까?

    어쨌든, 일을 하기 전에 먹는 음식이니 새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얀 쌀밥에 양념 듬뿍 묻은 김치 한 조각을 올려 입에 넣었다.

    “우아… 이 김치 뭐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