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3화 (14/202)
  • 13. 함께하겠습니다.

    “이게 뭡니까 회장님. 넣어 두세요.”

    예상보다 내 목소리가 크자 상율 역시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꼭 전해 주고 싶다는 듯 김용수 대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대사님. 제가 고마움을 좀 표시하고 싶은데 안 되겠습니까? 아니 저뿐만 아니라 한인회 모두의 마음입니다.”

    서로 맞잡은 나와 상율의 손 사이엔 지폐 한 장이 들려져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 준 요리사에게 주는 일종의 보너스.

    팁이었다.

    “음… 공무원들 그런 거 받으면 안 되는 거 아시죠?”

    김용수 대사의 말투는 사뭇 진지했지만 표정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리 큰돈도 아니었고,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공무원도 아니었다. 이 정도로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렇지만 굳이 건네는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죠?”

    “맞습니다. 이 정도 음식을 공짜로 먹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그럼 어쩔 수 없겠군요. 그렇죠, 장 셰프?”

    오늘 내가 바랐던 것은 전부 이뤘다.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한인회 사람들을 관저까지 초대할 수 있었고, 그들이 만족할 만한 음식까지 대접한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했다. 돈 몇 푼 아쉬워서 여기 온 것도 아니었으니.

    “우리 요리사님이 영 불편하신가 본데,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요?”

    한번 지갑에서 꺼낸 지폐를 어떻게든 건네고 싶었는지 상율은 대안을 제시했다. 내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

    “다음에 요리사님 한 번만 빌려주십쇼.”

    “빌려 달라니요?”

    “조만간 요리사님 능력이 필요할 일이 생길 것 같은데 도움 한번 요청하겠습니다. 그때 오셔서 조언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그럼 좋겠네요! 그것 또한 외교 업무의 일부가 될 수도 있겠네요.”

    “그렇군요. 그럼 오히려 더 좋은 방법이네요.”

    김용수 대사도 상율이 말한 대안이 만족스러운 듯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 이 돈은 일종의 선불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그렇죠. 안 그래도 요리사님 도움이 꼭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그래요, 장 셰프. 얼른 받아요. 어른이 주는 거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에요.”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뭔가 쑥스러웠다.

    명절날 가족들 앞에서 재롱을 피우고 용돈을 받는 느낌이랄까?

    “파나르에 한국 식당들이 있었을 때도 이렇게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요리사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또 오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맞아요, 맞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먹고 갑니다.”

    주위에서 전부 상율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럼 다음 주 정기 회의 때 대사관에서 뵙겠습니다.”

    “네 장소가 관저가 아니라 조금 아쉽지만, 대사관에서 뵙겠습니다.”

    처음 관저에 들어올 때의 표정과 이곳을 떠날 때 한인회 사람들의 표정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마치 고향 집을 나서는 사람들의 표정처럼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어쩔 수 없이 파나르에서 정착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아마 모두들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아주 조금이라도 그 갈증을 해소했길 바랄 뿐이었다.

    * * *

    대통령실.

    “비서관님.”

    “네 대통령님. 부르셨습니까?”

    김용수 대사가 파나르로 떠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별다른 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아무 탈 없이 순항 중이거나 너무 정신이 없어 보고할 시간도 없거나.

    대통령 김채훈은 속으로 후자이길 바라며 수석 비서관을 방으로 불렀다.

    “요즘 파나르 동향이 어떻습니까?”

    “파나르 말씀이신가요?”

    “보고 들어온 게 따로 없나요? 그렇게 보내 놓고 따로 연락 한번 못 해서 마음에 걸리는군요.”

    “김용수 대사에게 직접 보고가 들어온 것은 없습니다. 다만….”

    수석 비서관은 뭔가 전할 말이 있는 듯 말끝을 흐렸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파나르가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그 증거도 쉽게 찾아볼 수 있구요.”

    “정말입니까?”

    “네 파나르 대사관 측에서도 정확한 회의 내용까진 아니지만 정부군과 반란군이 평화 협정을 위해 수차례 만났다는 것을 확인했고, 온풍이 불고 있다는 건 몸으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랍니다.”

    “그래요? 그거 아주 반가운 소리군요.”

    대통령 김채훈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파나르가 안정되고 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했다.

    영광스러운 자리긴 하지만 자신보다 연배가 많았던 김용수를 파나르로 억지로 내몰았단 생각에 마음에 편치 않았었다.

    “말 나온 김에 김용수 대사와 통화 한번 하시겠습니까?”

    “그게 좋겠군요. 당장 연결해 주세요.”

    비서관은 손목에 감긴 시계를 한번 확인한 뒤, 파나르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청와대 수석 비서관입니다. 대통령님께서 대사님과 통화를 하고 싶으시다는데 자리에 계십니까?”

    비서관은 말없이 잠시 기다리더니 대통령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여보세요. 대통령 김채훈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용수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김용수 대사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통령과의 통화이니 목소리를 가다듬었겠지만 마음이 무거운 사람의 목소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네. 덕분에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파나르 생활은 좀 어떠십니까?”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진작에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워낙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파나르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잘 지내고 계신다니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를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대통령 역시 임기 말에 견고한 파나르와의 관계라는 업적을 만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렇기 위해선 김용수 대사의 역할이 중요했다.

    “소식을 듣자 하니 파나르가 꽤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구요?”

    “네 맞습니다. 제가 처음 왔을 때도 우려했던 것보다는 안정적이었는데, 굉장히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이미 외교부 본부에 보고한 내용이지만 김용수 대사는 다시 한번 대통령에게 구두 보고를 했다.

    외교부 장관과의 만찬 행사를 통해 대사관 파견 기간을 되돌려 둔 것, 한인회 사람들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교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 등.

    대내외적으로 있었던 일에 대해 꼼꼼히 보고했다.

    “몇 달 사이에 굉장히 바쁘셨겠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베테랑은 뭔가 달라도 다릅니다.”

    “나이만 베테랑이지 경험은 아직 부족합니다.”

    “아닙니다. 대사님만 그렇게 생각하지 누가 봐도 출중한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경험이 많다고 꼭 능력도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직접 증명하고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현역 때 무슨 일 때문에 공관장 한번 못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대사님의 능력은 전혀 의심치 않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겨우 몇 달 만에 대통령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현역 때도 할 기회가 없었던 거지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대사님.”

    “네 말씀하십쇼.”

    “파나르 상황이 그 정도로 안정이 되었으면 이제 중견 요리사들도 가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땐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으니 지원도 안 했을 건데.”

    당시엔 언론에서 다루는 파나르의 상황이 과장되어 있었다. 내전 중인 파나르에 가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묘사되는 뉴스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하하. 파나르 상황이 안정되고 있다는 뉴스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저번처럼 한 명만 지원하는 그런 불상사는 없겠지요.”

    김용수 대사 역시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전국 최상급 호텔에 최고의 조건을 내걸고 채용 공고를 냈지만 지원자는 단 한 명.

    그것도 요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요리사 한 명뿐이었다.

    “그 젊은 요리사는 어떻습니까? 경험이 많이 부족하죠? 죄송합니다. 더 좋은 사람으로 보내 드렸어야 하는데. 원하신다면 당장 새로운 사람 뽑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채용이 되고 3개월 동안 보여 준 요리사의 능력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정식 채용을 하지 않으면 된다. 애초에 덕수는 경력이나 조건 등이 한참 부족한 지원자였지만 급박한 상황 때문에 채용되었던 것이다.

    정식 채용을 하지 않는다고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그건 다른 방식으로 보상해 주면 될 문제.

    “새로운 요리사 공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처럼 완전 공석도 아니고, 조금 시간을 가지고 뽑는다면 더 좋은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김채훈의 말에 김용수 대사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유일한 지원자였던 덕수는 김용수 대사 본인도 처음에 만족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덕수의 이력서를 처음 봤을 때 너무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고, 대사관 요리사를 하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대통령님.”

    “네 대사님. 원하시는 요리사라도 있으신가요?”

    김용수 대사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는 장덕수 셰프와 계속 함께하겠습니다.”

    “네?”

    김채훈 역시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 듯 다시 한번 되물었다.

    “지금 같이 일하고 계시는 요리사와 계속하시겠다고요? 더 좋은 사람으로 뽑아 드릴 수 있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네 맞습니다. 장 셰프만 원한다면 저는 3년 동안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대통령은 얼마든지 빵빵한 지원을 해 줄 의향이 있었다. 요리사는 물론이고, 원하는 게 있다면 전부 다 지원해 줄 생각이 있었다. 김채훈은 파나르에 그 정도쯤의 지원은 전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굳이 왜?

    김채훈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잘합니다. 장덕수 셰프가.”

    “뭘요?”

    “전부 다 잘합니다. 나이만 어릴 뿐이지 웬만한 베테랑 못지않게, 아니 모든 면에서 훨씬 뛰어납니다. 이런 요리사를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김채훈은 잠시 동안 멍해져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좋은 요리사였다면 천만 다행이지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사관 요리사라는 게 단순히 음식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손님들의 성격이나 식성, 모임의 목적뿐만 아니라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유연성까지 전부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부 가능하다고?

    규모가 다르긴 하지만 청와대 요리사들만 봐도 산전수전 전부 겪은 베테랑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몇 달 동안 있었던 굵직한 성과들은 전부 장덕수 셰프 덕에 결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덕수의 활약상을 하나하나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덕수의 공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저는 장덕수 셰프와 정식 계약을 맺었으면 합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근데 대사님.”

    “네 대통령님.”

    “대사님이 왜 현역 때 공관장을 못 하신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 이신지.”

    김채훈은 김용수 대사와의 대화를 통해 알아챈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김용수 이 사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적어도 자기가 잘한 일에 대해선 조금 어필해도 될 텐데.

    “장덕수 요리사 실력이 우리의 예상보다 뛰어나다는 건 저로서도 반갑고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말씀해 주신 내용을 들어 보면 요리사는 요리사의 업무 안에서 최선을 다한 겁니다.”

    “그건 그렇지요. 근데 그거랑 제가 공관장을 못 한 거랑 무슨 상관이….”

    “결국 성과를 냈다는 건 전부 대사님의 역량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요리사의 음식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도 맞지만 결국 대사님이 해내신 일입니다. 요리사 칭찬은 요리에 대해서만 하시고, 본인이 한 일에 대해서도 충분히 표현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김용수 대사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벙어리가 되었다.

    자신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이유였다.

    그저 겸손하고, 할 일만 제대로 하면 언젠가 알아줄 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왜 대통령이 되었는지 아세요? 저는 다른 후보들보다 똑똑하지도 않았고, 엄청난 업적을 이루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가장 잘하고, 잘 해냈던 걸 국민들에게 확실하게 표현했습니다.”

    항상 자신이 부족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동기들에 비해 능력이 부족해서 공관장을 하지 못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늦었지만 난도가 높은 파나르 대사관을 맡아 보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었단 걸 더 느끼고 있었다. 대통령 김채훈이 그 마음에 확신을 심어 줬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는 더욱더 장덕수 셰프와 함께해야겠습니다. 당연히 저도 더 열심히 하겠지만 장덕수 셰프의 실력이 저를 더 빛나게 해 줄 거라 확신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둘이 함께 마지막 불꽃 한번 제대로 태워 보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