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1화 (12/202)

11. 한인회 방문

내가 정한 만찬 메뉴를 보더니 김용수 대사 역시 걱정스러운 듯 되물었다. 파나르에선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재료였으니까.

“아니요 구할 수 없습니다. 파나르에선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장 셰프. 의도는 좋지만 초대장에 적힌 메뉴 그대로 만들 수 없다면 오히려 한 번 더 저들을 속이는 게 돼요. 그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어요….”

김용수 대사가 뭐 때문에 이렇게 주저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들이 우리와 대화하지 않으려는 건 떨어진 신뢰도 때문일 테니.

코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큰 거짓말로 갈등을 깊게 만들 순 없었다.

“할 수 있습니다. 분명 그 맛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저들도 파나르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이해할 겁니다.”

확신에 찬 내 눈을 바라본 김용수 대사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일단 식탁에 앉히기만 하면 만족시킬 자신이 있었다. 설령 그 재료가 없더라도.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어요. 더 해 볼 방법이 있는데 시도도 안 해 보고 포기할 순 없죠. 위험하겠지만 이번엔 장 셰프 말을 믿어 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일단 음식을 입에만 넣으면 분명 만족할 겁니다. 제가 생각해 놓은 게 있습니다.”

그렇게 우려하는 김용수 대사를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 역시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걸로 만족… 시킬 수… 있겠지?

* * *

“여보세요 윤아 씨, 관저에서 쓸 수 있게 고무통 하나만 구할 수 있을까요?”

“고무요? 플라스틱 말구요?”

“네 빛이 통과되지 않는 두꺼운 고무통으로요.”

“사는 거야 어렵지 않죠.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내 아이디어에 가능성을 봤는지 자필로 쓴 김용수 대사의 초대장이 한인회 모두에게 발송되었다.

답장이 올지 안 올지, 또 온다 해도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일단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건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정도는 걸리는 일이었으니까.

“근데 고무통은 뭐 하시게요?”

“콩나물 기르려구요.”

“콩나물을 직접 키워요? 다른 건 몰라도 콩나물은 중국 마트에 가면 종종 팔긴 파는데. 그걸 직접 키우는 게 가능해요?”

파나르에는 이제 한식당도 한국 재료를 파는 마트도 없었다.

그나마 콩나물이나 두부 같은 재료는 중국 마트에서 종종 취급했지만 길이가 짧고, 두께가 얇아 씹는 맛이 부족했다. 대부분이 한식에 쓰기엔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그걸로는 부족해서 제 스타일대로 키우려구요. 큼직하고 굵직한 콩나물이 필요하거든요.”

“요리사님은 참 별걸 다 할 줄 아시는구나. 콩나물을 안 판다고 그걸 키워서 쓸 생각을 하다니.”

누군 하고 싶어서 그러겠는가?

재료가 후지면 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으니까.

요리사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나았다.

예전에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경험해 보겠다고 잠시 호텔을 떠나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 업장에선 손님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볼 수 있는 곳에다 콩나물을 키워서 사용했었다.

직접 키우는 유기농 제품을 사용하니 안심하고 먹으라고.

콩나물뿐만 아니라 허브나 토마토 등을 키우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으니, 안심하고 많이 찾아와 매출이 훌쩍 뛴 경험이 있었다.

“기왕 할 거 제대로 해 봐야지요. 한인회 사람들 반응이 올지 안 올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태도 좋네요. 시식 음식도 제대로 만드실 거죠?”

“아… 네.”

한인회의 반응이 어떨지는 나도 궁금했다.

베테랑들이 외교적으로 풀지 못한 문제를 내 방식대로는 풀 수 있을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어떤 숫자가 나올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순 없었다. 나는 내 할 일을 하며 대답을 기다려야지.

이번에 준비한 메뉴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음식들이었다. 제대로 만들려면 미리미리 준비해 놔야 했다.

“다들 맛있게 변해라. 이번 만찬엔 너희들이 주인공이다.”

흰콩이 담긴 통에는 햇빛이 들어가지 않게 검은 천을 덮은 뒤 꽁꽁 묶어 두었다. 콩나물이 제대로 크려면 빛을 완벽히 차단하는 게 관건이었다.

또 관저의 마당 한쪽 그늘에는 준비해 둔 비장의 무기인 놈들을 빨래 걸듯이 나란히 걸어 두었다.

처음부터 햇빛이나 바람에 말리는 게 좋겠지만 그 정도로 하려면 족히 한 달은 걸리는 일이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건조기도 사용했고, 날씨가 쌀쌀해졌으니 3~4일이면 충분했다.

* * *

“장 셰프! 장 셰프!”

“네 대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리로 와 봐요.”

아침부터 김용수 대사가 소란을 피웠다. 고요한 아침에 어울리지 않는 데시벨의 목소리 덕에 식사를 준비하다가 놀라서 주방을 뛰쳐나갔다.

“왔어요 왔어.”

“뭐가요?”

“답장이 왔어요. 이거 봐요. 장 셰프가 말한 초대장이 먹혔나 봐요.”

“정말요?”

“네 회장이 나한테 직접 연락이 왔어요. 이번 만찬에 임원진 전부 참석하겠다고.”

김용수 대사는 한인회 회장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여 주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메시지를 본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힘차게 악수를 했다.

나도 진짜 이 방법이 먹힐지 말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모두 한국 음식을 그만큼 그리워하고 있었나 보다.

“다행이다. 이놈들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겠다. 며칠 동안 공을 들인 보람이 있겠어.”

일주일 전부터 키우기 시작한 콩나물은 이미 통이 빼곡할 정도로 굵고, 알차게 자라 있었다.

아직 감이 죽지 않았구만.

당장 시장에 나가 팔고 싶을 정도로 잘 자라 있었다.

또 며칠 동안 마당에서 찬 바람을 맞고 있던 그것들도 충분히 만족할 만큼 말라 있었고.

구할 수 있는 재료는 모두 준비가 되었다.

공을 들여 시간을 오래 투자한 만큼 맛있는 음식이 나오길 기대할 뿐이었다.

이젠 전적으로 내 손을 믿는 수밖에.

* * *

“어서 오세요 회장님.”

“네 반갑습니다 대사님.”

김용수 대사는 애써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한인회 측은 조금 불손하다 싶을 정도로 목이 뻣뻣했다.

섭섭한 건 이해하지만 기왕 여기까지 오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조금 더 성숙한 태도로 감정 조절을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찬이 끝나고 이곳을 나갈 땐 두 사람의 입장이 반대가 되길 바랐다.

“그나저나 이 초대장은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한인회 회장 김상율은 관저에 발을 들이자마자 주머니에서 초대장을 꺼내 들고 다짜고짜 물었다.

아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왜 그러십니까? 오랜만에 종이로 된 초대장 감성이 괜찮지 않습니까? 흔한 인쇄보다는 성의도 있어 보이고.”

“요새 누가 이런 걸 쓴다고….”

그 정성 들인 초대장에 설득되어 여기까지 와 놓고, 괜한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안에 쓸데없이 만찬 메뉴는 왜 넣었습니까? 우리가 여기 밥 먹으러 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메뉴명도 완전 엉터리예요. 이렇게 공식적인 문서에 사투리를 쓰는 법이 어딨습니까.”

“그런 건 너무 개의치 마시고, 우리 요리사가 한인회 여러분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일단 한번 드셔 보시죠.”

상율은 그 누구보다 불만 넘치는 사람처럼 투덜대고 있었다. 하지만 찡그린 얼굴 한편에는 기대에 찬 표정이 숨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오늘 준비한 음식 때문에 온 게 확실했다.

“요리사님, 근데 오늘 준비한 음식이 뭐길래 몇 달을 거절하던 사람들이 단번에 마음이 바뀐 거예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저 사람들의 고향 음식이요.”

“엥? 저분들 고향이 전부 똑같아요? 어쩜 그럴 수가 있지? 마을 사람들끼리 같이 이민 온 건가?”

“아니… 그건 아닌데, 대부분이 가까워요.”

오늘도 서빙을 하러 온 윤아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특별한 음식이길래, 무슨 대단한 음식이길래. 똑같은 내용의 초대장에 겨우 메뉴 한 장을 끼워 넣었다고 이렇게 금방 맘이 돌아섰을까?

“오늘 메뉴는 말린 아구 콩나물찜, 돼지국밥과 정구지 무침. 이게 다예요.”

“저번처럼 코스 요리가 아니고요?”

“네 오늘은 모든 음식이 그냥 한 번에 다 나갈 거예요.”

“오예 다행이다.”

코스 요리가 아니니 서빙하는 입장에선 훨씬 수월했다. 그렇지만 윤아는 뭔가 걸리는 게 있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거 아구가 아니라, 아귀 아니에요? 그리고 정구지는 뭐예요? 첨 들어 보는데.”

“아구는 아귀의 경상도 사투리, 정구지는 부추를 부르는 경상도 사투리예요.”

“아하! 근데 공식적인 초대장에서 사투리를 쓰면 어떡해요. 재미있긴 하지만 이래도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거예요.”

한 끗 차이지만 아귀찜이라는 단어보다 아구찜이라는 말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고 했다. 서울에서 15년을 살아 놓고, 사투리를 고치지 못한 마산 출신 선배 요리사가 수도 없이 해 준 말이었다.

어찌나 경상도 사투리에 집착이 심하던지 국밥집에선 정구지 무침을 달라고 고집부리다 쫓겨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쓸데없는 고집과 아집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들의 고향 음식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의미.

“내 귀엔 아구나 아귀나 다 똑같이 들리는구만.”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경상도 토박이들은 아니래요. 실수로라도 한인회분들 앞에선 똑같다고 말하지 마세요.”

“알겠어요. 근데 파나르에 아귀가 있었어요?”

콩나물은 직접 키운 것을 확인해서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윤아 역시 파나르에서 아귀라는 생선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요 파나르에선 안 팔아요.”

“근데 아귀도 없이 어떻게 아귀찜을 만들어요? 그러면 오늘 만찬 메뉴는 사기 아니에요?”

“맞아요. 사실 어쩔 수 없이 사기 좀 쳤어요. 그니깐 빨리 가서 이 새로운 메뉴판을 테이블에 올려 주세요.”

나는 따로 준비한 메뉴판을 윤아에게 건넸다.

초대장에 동봉한 메뉴는 저들을 유혹하기 위함이었고, 진짜 오늘 준비한 음식의 메뉴판은 따로 있었다.

윤아의 말대로 사기일 수 있지만, 맛을 본다면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나와 김용수 대사는 그렇기에 모험을 결정한 거였고.

* * *

“자 그럼 이제 식사하면서 남은 얘기를 마저 나눠 볼까요?”

“흐흠. 그러시죠.”

회장 상율과 임원진들은 고개를 여전히 뻣뻣하게 들고 있었지만 눈빛은 하나같이 기대에 차 있었다.

군침을 삼키는 소리가 주방까지 들릴 정도였다.

“응? 근데 좀 이상한데. 대사님 만찬 메뉴가 바뀌었네요?”

“그러게요. 초대장에 써서 보내 준 메뉴랑은 다르잖아요.”

준비된 자리에 올려진 새로운 메뉴판을 확인하자 임원진들은 하나둘씩 불만을 터뜨렸다. 초대장에 적힌 메뉴와는 미세하게 다른 메뉴.

새로운 메뉴판엔 메인 재료인 아구가 빠지고, 다른 생선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파나르에 20년 살면서 아구를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먹는 걸로 장난치지 말랬는데, 대사관에서 또 이런 식으로 저희한테 장난을 치셨군요.”

한인회 임원진들은 순식간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음식이 나오지 않아서 화가 난 것도 있었지만 이미 한번 신뢰를 잃었던 대사관에서 또다시 거짓말로 자신들을 이 자리에 앉혔다는 것에 더욱 분노했다.

“여러분들의 마음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오셨으니 일단 식사는 하고 가시죠.”

고작 메뉴가 다르단 이유로 만찬 행사를 뒤엎는다면 한인회 입장에서도 창피한 일이었다.

지금은 배짱을 부리고 있었지만 한인회 역시 대사관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

이유야 어찌 됐든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만찬 자리는 얌전히 끝을 내는 것이 도리에 맞았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저희는 대사관에 더 이상 협조하기 어렵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이해한다는 듯 애써 미소 지으며, 만찬을 시작했다. 미소 지은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요리사님 지금이에요.”

윤아의 신호에 맞춰 나는 커다란 접시에 통깨를 듬뿍 뿌린 빨간 코다리찜을 직접 들고 밖으로 나갔다.

“첫 번째 음식으로 아구찜 대신 코다리 콩나물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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