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0화 (11/202)
  • 10. 종이로 만들면 어때요

    “휴우.”

    아침부터 김용수 대사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의 횟수나 길이로 봐선 아주 골치 아픈 일임이 분명했다.

    “대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면 속이 안 좋으신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장 셰프가 차려 주는 아침밥은 넘기기가 수월해서 좋아요.”

    “그럼 아침부터 왜 그렇게 한숨을 쉬십니까?”

    중년 남자들의 뻔한 수법이었다.

    나 힘든 일이 있으니 하소연 좀 들어 주라는 의미의 한숨.

    아무 일도 아니라며 몇 번 거절하다가 진심을 털어놓을 게 뻔했다. 나도 종종 쓰던 방법이었다.

    “제가 큰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말씀해 보세요. 무슨 걱정이신가요?”

    김용수 대사는 들어 올리던 숟가락을 도로 내려놓고, 한동안 내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맘을 먹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최근에 걱정이 있긴 한데, 누구한테 말하기가 창피한 일이라서요….”

    “창피할 게 뭐가 있습니까? 관저에서 보고, 들은 얘기는 절대로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이건 어차피 계약서에도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업무상 알게 되는 비밀이나 중요한 내용은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그중 공관장의 개인 사정 역시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나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선 계약서에 없었더라도 철저히 지킬 의향이 있었다.

    “만찬 행사 하나를 계획하고 하는데 사람들을 초대하는 게 쉽지가 않네요. 몇 달째 거절하고 있어서요.”

    “네? 몇 달이나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런 게 아니라….”

    김용수 대사의 말이 단번에 수긍이 되지 않았다.

    한 나라의 공관장이 직접 초대를 한다며 그 후에 그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게 문제였지, 스케줄 조절을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초대에 응한다. 거절은커녕 오히려 영광이라 생각했다.

    근데 초대하는 단계부터 쉽지 않다니. 혹시 1년 동안 스케줄이 이미 꽉 차 있는 파나르 최고의 슈퍼스타라도 초대할 생각인가?

    “초대하려는 분이 혹시 유명 연예인인가요?”

    “아니요.”

    “그럼 고위층? 아니면 엄청난 재력가?”

    “아니요….”

    “그럼 도대체 누구길래 초대조차도 힘든 겁니까?”

    “그냥 파나르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에요….”

    “엥? 한국 사람들이 왜 관저에 안 오려고 해요?”

    내가 모르는 일련의 싸움이라도 있었나 싶어 물어봤지만 김용수 대사와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 사람이면 어디 가서 자랑이라도 할 생각에 관저 초대를 덥석 물 텐데, 이렇게까지 거절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것도 몇 달이나.

    “내가 지금 초대하려는 사람들은 파나르 한인회 임원진이에요.”

    얼마 전 파나르에서 난리가 났을 때, 교민들 대부분 한국으로 대피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파나르에 남아 가족들을 챙기고,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킨 사람들이었다.

    “알다시피 그 사람들보다 우리 대사관이 먼저 철수를 했으니, 한인회 입장에서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완전 철수도 아니었고, 잠시 빠졌다가 돌아온 거잖아요. 모든 나라 공관들이 그랬었고, 게다가 그땐 대사님이 계실 때도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은 어차피 한국으로 대피할 생각도 없었던 거 같은데요.”

    “그렇지만 그 사람들 마음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겠죠. 정부에 섭섭하단 걸 저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때 그 철수 한 번이 여기저기서 발목을 잡네요.”

    “그러게요. 명백히 오해인데 이거는.”

    오히려 더 잦은 대화로 풀어야 할 상황인데 한인회 측은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한인회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기관은 아니었지만 재외 공관 입장에서는 반드시 협력해야 할 존재였다. 특히 파나르 같은 나라는 더욱더.

    비상시에 대사관 직원들보다 더 넓은 현지 인맥과 빠른 정보를 가진 교민들의 도움은 절실했다. 그래서 평소에 서로 비상 연락망을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정기적으로 비상 훈련까지 진행하는 공생 관계였다.

    “이제 파나르와 한국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나지 않는 한 철수할 일은 절대 없을 텐데. 어떻게 그 사람들 맘을 좀 풀어 줄 수 있을까요? 내가 공관장 출신이 아니라 만남을 거부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 그럴 리가요.”

    “일단 자리에라도 앉히면 대화라도 해 볼 텐데, 그것조차 쉽지 않네요.”

    은연중에 김용수 대사는 속에 가진 열등감을 또 한 번 드러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거라 착각하고 있었다.

    “대화를 거부하는 한인회 임원진이 몇 명이나 됩니까?”

    “회장님 포함해서 8명 정도 되죠. 여튼 들어 줘서 고마워요. 극비 사항은 아니지만 입 좀 조심해 줘요. 혹시 그 사람들 귀에 들어가서 더 깊은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 어쨌든 이건 내가 할 일이니까요.”

    “걱정 마세요 대사님. 저도 제 나름대로 방법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고맙다며 애써 미소 짓는 김용수 대사를 보자 안쓰러운 맘이 들었다.

    현직 때도 못 한 공관장 자리를 준다 하니 덥석 물었는데,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난도가 상당히 높은 자리였다.

    조금이라도 손을 보태 주고 싶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맘 상한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법.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쓸데없는 것들이긴 했지만.

    차근차근히 생각해 보자.

    “아 머리 아파. 아무리 쥐어짜 봐도 아이디어가 안 떠올라. 그냥 공권력을 이용해서 억지로 오라고 하면 안 되나? 휴우….”

    김용수 대사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평화롭게 한인회 사람들을 맘을 돌려놓을 수 있을지 고민해 봤지만 마땅한 정답을 찾지 못했다.

    “외교 전문가들도 못 하는 걸 내가 어떻게 한 번에 찾아내겠어. 나 같으면 맛있는 거나 잔뜩 만들어 줄 테니 한번 놀러 와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면 끝인데.”

    ……!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나는 내내 김용수 대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렇지만 외교관 업무에 대해서 노하우는커녕 말단이 하는 잡일도 전혀 모르는 내가 그런 방법으로 정답을 찾아낼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들을 초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완전히 돌아선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려야 한다면?

    당연히 제일 잘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는 게 유리했다. 필살기를 써서라도.

    “맞다! 그때 사무실 직원들도 그랬었어.”

    저번에 윤아도 내 음식을 맛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파나르에 이제 제대로 된 한식당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식에 목말라 있는 상태였다. 또 이번 집들이 때 사무실 직원들을 통해 한 번 더 확인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닫자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윤아의 번호를 눌렀다.

    그것 말고도 확인해 볼 것이 있었다.

    만찬에 음식이 준비된다는 걸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걸 알고도 거절한 걸 보면 단순한 음식으로 설득하는 건 힘들어 보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요리사님 안녕하세요?”

    “네 윤아 씨 지금 바쁘세요?”

    “아니요. 괜찮아요. 어쩐 일이세요?”

    “뭐 좀 여쭤보려구요. 궁금한 게 있는데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어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했다. 백 번 싸워도 위험해지지 않으려면 최대한 많은 정보 수집이 가장 중요했다.

    나는 한인회 사람들의 이름조차도 모르니,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이길 수 없는 상태였다.

    “파나르 한인회 명단 같은 거 있을까요?”

    “한인회요? 당연히 있죠. 그건 왜요?”

    “업무에 꼭 필요해서요. 사진 좀 찍어 보내 주실래요?”

    “그게 끝이에요?”

    “기왕이면 아직 파나르에 남아 있는 사람들만 체크해서 보내 주세요.”

    윤아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쿨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파나르 한인회 명단이 넘어왔다.

    “55세, 60세, 59세, 65세, 48세… 대부분이 아줌마, 아저씨들이네.”

    최근 몇 개월간 출국 기록이 없는 한인회 임원들 명단을 보며 나이를 확인했다. 연령대에 따라서 선호하는 음식이나 식재료 종류가 당연히 다를 테니.

    메뉴를 짤 때 참고할 필요가 있었다.

    세밀한 타겟팅을 통해 만족도를 높여 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목표였다.

    “음… 이걸로 좀 부족한데.”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아 윤아가 보내 준 명단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살폈다.

    이름, 성별, 나이, 이민 온 날짜, 가족 관계, 한국 내 주소.

    명단은 내가 찾던 한인회 임원진들의 이름과 연령을 빼고도 꽤 자세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어라?

    “근데… 전부 가깝네?”

    몇 번이나 명단을 들여다보니 반가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처음에는 안 보이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잘하면 이 사람들.

    식탁까지는 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대사님.”

    “네 장 셰프.”

    “한인회 임원진들한테 직접 초대장을 보내 보는 건 어떨까요?”

    “종이로 된 초대장을요?”

    “네 그런데 단순히 그냥 종이 초대장은 아니고….”

    요즘이야 대부분 톡이나 전화, 메시지 등으로 초대를 하지만 대사의 자필로 적은 정성이 담긴 초대장을 직접 보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내 의견이었다.

    특히 한인회는 회장 한 명에 의해서 임원진들의 의견이 좌지우지되고 있는데, 회장을 빼곤 전화를 받지도 메시지에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초대 시도조차도 못 해 봤다는 의미.

    “어차피 한인회는 회장만 설득하면 나머지는 대부분 넘어올 거예요. 다른 사람들하곤 대화할 기회조차 거의 없었거든요.”

    “그럼 반대로 다른 임원들이 직접 회장을 설득하게 하면 초대에 응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회장이라도 다수의 의견을 무시하긴 어려울 텐데.”

    “오히려 그게 더 어려운 방법이죠. 그리고 무슨 방법으로 임원들이 관저에 오고 싶게 만들겠어요. 종이 초대장을 받더라도 결국은 회장과 상의할 텐데.”

    회장을 포함해서 임원진의 과반만 설득하면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 따라올 것이다. 지금 임원진들의 의견 역시 회장의 생각과 다르지 않으니 함께 거부하는 것이고.

    “일단 관저로 초대까지는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요? 무슨 방법이 있어요? 일단 앞에만 앉히면 나도 금세 오해를 풀 수 있을 거예요. 그들도 결국엔 우리가 꼭 필요할 테니.”

    “대신에 초대장에 이 내용을 써서 보내 주세요.”

    “이게 뭐예요?”

    “이번 만찬 메뉴입니다.”

    내가 한인회 명단을 살피며 발견한 내용이 하나 있었다.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 대부분이 50~60대 남자.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

    “회장이랑 임원진 중 4명의 고향이 경상도다?”

    “네 맞습니다. 마산과 부산, 함안 등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럼 장 셰프의 생각은….”

    “네 회장을 포함해서 임원진 최소 4명만 설득할 수 있으면 과반이 넘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따라올 겁니다.”

    김용수 대사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과반도 필요 없었다. 회장 한 명의 마음만 확실하게 돌릴 수 있다면 나머지는 설득 가능했다. 하지만 좀 더 확률을 높이기 위해 이런 메뉴를 계획했다.

    “근데 이것들을 구할 수 있나요? 파나르에서 이런 재료를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만약 초대장 내용대로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반발이 더욱 심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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