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9화 (10/202)
  • 9. 집들이

    “방금 들었어요? 감자가 얼마라는지?”

    “얼마래요?”

    “1kg에 1,500원이요.”

    이전의 가게들에선 거의 4배 가까이 가격을 부풀려서 받으려 했다. 크기도 품질도 거의 비슷한 감자였는데 같은 시장 안에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난다고?

    “이게 진짜 시세예요. 외국인이라고 하면 더 신이 나서 바가지 씌우려고 할 거예요.”

    “그럼 저는 어떡하죠? 시장 올 때마다 맨날 윤아 씨랑 올 수도 없고, 제가 파나르어를 해도 금방 들통날 텐데.”

    말이 잘 통하는 한국 시장에서 가격 협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재료 보는 눈은 누구보다 까다로웠으니 웬만한 상인들도 내 눈을 속이진 못했다.

    근데 이곳에선 눈 뜬 장님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걱정 마세요. 파나르어를 못해도 협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어떻게요?”

    “이 말 하나만 기억하세요. ‘너무 비싸’.”

    윤아는 그 자리에서 파나르어 교육을 시작했다.

    비록 단 한마디뿐이었지만, 시장에서 이 한마디면 모든 것을 협상할 수 있다고.

    “무조건 비싸다고만 하면 돼요?”

    “요령이 있죠. 처음에 한 가게에 들어가서 원하는 걸 고르고 가격을 물어봐요. 아마도 비싸게 부르겠죠?”

    “그렇겠죠.”

    “그때 너무 비싸다는 말을 하세요. 처음엔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할 거예요. 거기에 속지 말고 바로 옆에 가게에다가 똑같은 물건의 가격을 물어봐요. 건너건너도 안 되고 바로 옆. 그게 포인트예요.”

    공개적인 경쟁을 붙이라는 의미였다.

    내 어색한 파나르어를 들으면 무조건 비싼 가격을 부를 테니, 비싸다는 말을 반복해서 시세를 알고 있다는 느낌을 주라는 것이었다.

    그리곤 바로 옆 가게와 경쟁을 붙여 투명한 가격을 끌어내는 것. 그게 시장에서 바가지 쓰지 않는 법이란다.

    “아휴. 무슨 시장 한번 가는데 이렇게 고생해야 해요.”

    “어쩔 수 없어요. 여긴 한국이 아니니까. 뭐 편하게 비싸게 사시고, 나중에 공금 횡령 혐의로 수사받으시든지요.”

    “윤아 씨는 말을 참 살벌하게 하시네요.”

    “어쩌겠어요. 매년 빡시게 재외 공관 감사를 한다는데요.”

    “조심할게요.”

    “그럼 직접 한번 해 보실래요?”

    그래도 옆에 의지할 사람이 있으니 수월하게 협상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엔 혼자 와서 사야 했는데 이렇게 미리 연습해 보니 맘이 편해졌다.

    “그럼 오늘 필요한 재료들은 전부 구매하셨어요?”

    바가지 안 쓰는 연습 겸 집들이 음식 재료 구매 겸 시장 투어는 끝이 났다. 몇 시간에 걸쳐 시장 구석구석을 둘러봤지만 이상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근데 이 시장에는 없는 게 많네요?”

    “뭐가 없어요? 이 사장에서 안 파는 거면 파나르에서 안 판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아….”

    파나르 최대 시장이니 오만 가지 물건을 취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철저히 파나르 사람들의 기준에서 생각이고.

    한국 사람의 눈으로써는 보이지 재료들이 많았다.

    “없는 게 많아요. 내가 원하는 재료들.”

    “예를 들면?”

    “깻잎, 미나리, 우엉, 부추, 콩나물 등등.”

    “아… 전부 파나르 사람들이 먹는 재료들은 아니네요.”

    우리나라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들이지만 파나르 사람들은 아예 먹지 않는 재료였다.

    파나르에 한식당이 많은 것도 아니고, 교민들만 보고 장사를 하기엔 수요가 부족했겠지.

    “없어도 되긴 되지만 아무래도 완성도가 좀….”

    “저는 그런 재료 없어도 잘 먹으니깐 걱정 마세요.”

    “아니 윤아 씨 말고, 나중에 만찬 할 땐 좀 걱정이 되네요.”

    “아… 미안합니다.”

    요리사가 아니니 이런 일에 깊게 고민하지도 않겠지. 없으면 없는 대로 먹었을 테니.

    아쉽지만 나중에 시장을 더 둘러봐야겠다.

    구석구석 뒤지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소스나 양념류는 파나르에 하나 남은 아시안 마트에서 구할 수 있었다.

    * * *

    “안녕하세요 요리사님. 처음 뵙죠? 저는 서기관 김준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장덕수라고 합니다.”

    김준우 서기관은 파나르가 첫 부임지라고 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곳을 직접 자원해서 왔다는데, 눈빛에서부터 열정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윤아의 말을 들어 보니, 매사에 적극적이라 가끔 골치가 아플 정도라고….

    “반가워요. 참사관 안지용이라고 해요. 아, 나는 외교부가 아니라 국정원 소속이에요.”

    그런 준우에 비해 다소 여유가 있어 보이는 안지용 참사관. 정통 외교부 소속이 아니라 국정원에서 파견되어 파나르 대사관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정국이 불안한 파나르에선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안지용 참사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요리사님 음식이 워낙 맛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염치 불고하고 왔습니다. 이거 받으세요.”

    “아닙니다. 좁고 불편한 집에 와 주셔서 감사하죠. 이건 뭐예요? 보드카인가요?”

    “파나르 보드카 맛이 아주 끝내줘요. 요리사님 음식 수준에 맞춰서 프리미엄 등급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술 좀 드시나요 요리사님?”

    보드카는 크게 에코놈, 스탄다르트, 프리미엄, 슈퍼-프리미엄의 네 가지로 등급이 구분된다.

    지용이 가져온 보드카는 최상급은 아니더라도 꽤 높은 등급의 보드카였다. 어차피 소주파였던 나는 구분하지 못하겠지만.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즐겨 마십니다.”

    “그럼 오늘은 마신다는 말씀이시군요. 직접 요리를 하실 테니까.”

    “하하하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원래는 완전히 술을 끊었었다. 그전에도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건강을 위해서 완전히 끊었었는데.

    지금은 팔팔한 간을 되찾았으니, 조금 즐겨도 되겠지?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술 한 잔이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으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만들어 드릴 테니.”

    그렇게 대사관 사무실이 아닌 내 조그만 원룸에 직원들이 처음으로 전부 모였다. 물론 김용수 대사는 제외하고.

    모두들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음식에 대한 기대가 굉장한 것 같았다.

    “근데 오늘 메뉴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도울 게 있으면 저도 돕겠습니다.”

    역시나 적극적으로 나서는 준우였다.

    사색에 빠진 사람처럼 여유롭게 기다리는 안지용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오늘 메뉴는 얼큰한 매운탕이랑 제육볶음, 그리고 파전입니다.”

    “와우 세 가지나요?”

    “네 윤아 씨가… 세 개나 해 달라 해서.”

    약간의 원망 섞인 눈빛으로 윤아를 째려봤지만 당당했다. 본인은 재룟값을 냈다 이건가?

    집 안 여기저기서 군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 * *

    “음식 준비 다 됐습니다.”

    “크으 냄새만 맡았는데도 음식이 맛있다는 거 알 수 있겠네요.”

    “요리사님 죄송한데 밥이 많이 있나요? 공깃밥 하나에 1천 원 룰을 깨시더라도 이해하겠습니다. 오늘 3공기는 먹어야겠습니다.”

    “밥은 많으니 돈 걱정도 마시고 실컷 드세요. 파나르 쌀도 상태가 괜찮더라구요?”

    빨갛게 맛깔스러운 기름이 떠 있는 제육볶음을 보자 나 역시도 군침이 넘어가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매콤한 제육볶음 한 입에 시원한 소주 한 잔을 들이켜면, 캬아. 천국이 따로 없을 텐데.

    “오늘 제일 고생하신 요리사님 먼저 한 잔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안지용이 오자마자 냉동실에 넣어 뒀던 보드카를 꺼내 왔다. 마셔 본 적은 없었지만 색깔도 향도 얼핏 소주와 비슷해서 딱히 거부감이 없었다.

    조금 도수가 센 소주겠지.

    멋도 모르고 원샷으로 들이켜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었다.

    “크으….”

    “어때요? 죽이죠?”

    “으아아아악 진짜 죽을 맛이네요.”

    40도는 족히 넘는 보드카를 그래도 원샷했으니,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음식도 매콤하게 만들었는데.

    콧물과 기침이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데도 참기 힘들었다.

    “콜록콜록 어서 드세요. 콜록콜록.”

    “그럼 잘 먹겠습니다.”

    “매운탕도 진짜 오랜만이네요. 여기서는 푹 끓여서 어죽처럼 먹는 밍밍한 요리뿐인데. 역시 매운탕은 고춧가루 듬뿍 넣어서 얼큰하고 시원해야지 제맛이죠.”

    원했던 레시피대로 완벽하게 만들어 내진 못했지만 충분히 깊은 맛을 내는 매운탕이었다.

    향을 더해 주고, 비린내를 조금이라도 줄여 줄 미나리나 쑥갓이 없었지만 얼큰한 매운맛으로 대리 만족했다.

    “근데 제육볶음은 상추보단 깻잎인데. 이런 고급 제육볶음을 앞에 두니깐 더 아쉽네요.”

    “그쵸? 저도 상추보단 깻잎파인데 항상 아쉽더라구요.”

    섞이지 않을 것 같았던 준우와 지용이 의견이 깻잎 하나로 일치했다.

    나도 상추보단 깻잎파이긴 했지만 여기서 동의하면 보드카를 한 잔 더 권할 것 같아서 말을 조심했다.

    간이 팔팔해졌어도 보드카 원샷은 버거웠다.

    “그래도 요리사님 실력 덕분에 깻잎이 없어도 이 정도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거죠.”

    “그 큰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는데도 안 보이더라구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누구 하나 아쉬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구색을 완벽하게 갖추진 못해 아쉬운 건 요리사인 나뿐이었다.

    “요리사님. 사실 저는 외교관이 되고 나서, 파나르가 첫 부임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안 간다고 하는 곳을 제가 자처해서 왔어요. 왜인 줄 아세요?”

    준우는 술을 마실 때도 남들보다 한 잔이라도 더 많이 술잔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취하는 것도 남들보다 빨랐고.

    적극적인 평소 성격이 여기서도 예외 없이 드러났다.

    “왜 그러셨어요?”

    “빨리 승진하려구요. 우리나라 최연소 공관장이 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어느 회사나 조직을 가더라도 한 명쯤 있을 만한 인물이었다 준우는. 열정과 패기로 가득 차서 최연소, 최초, 최고 등등 단어에 집착하는 사람들.

    마치 군대에서 갓 임관한 소위를 보는 것 같았다.

    “근데 요리사님은 여기 왜 오셨어요?”

    “저요?”

    김용수 대사 앞에서와 달리 진짜 이유가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냥 아직까지는 숨기고 싶었다.

    “돈 좀 모아 보려구요. 한국에서는 모으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돈도 좋죠. 근데 만찬 행사 많이 하면 할수록 수당 더 나오는 거 맞죠?”

    “네 맞아요. 근데 왜요?”

    “제가 앞으로 만찬 행사 많이 하게 해 드릴게요. 이런 실력을 아끼면 안 되지.”

    나뿐만 아니라 준우처럼 대사관 직원들도 만찬 횟수가 실적에 영향을 끼친다.

    당연히 다다익선. 많이 하면 할수록 좋지.

    오, 만찬 내용이 어떨진 몰라도 본부에서 보기엔 횟수가 많은 공관에 더 좋은 점수를 주는 게 당연했다.

    “무조건 많이 한다고 좋은 건 아닌… 데.”

    “아니요. 무조건 많이! 전 세계 공관들 중에 제일 많이 해 봅시다. 이 정도 실력이면 음식으로 트집 잡힐 일도 없을 거 같습니다!”

    약간 과열된 분위기를 안지용이 나서서 조금 가라앉혔다.

    “서기관님. 바람 좀 쐴 겸 나가서 담배 한 대 태울까요?”

    “아, 그럼 그럴까요? 참사관님?”

    안지용이 준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윤아가 미안한 듯 사과를 건넸다.

    사무실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라면서 이해해 달라 했다.

    뭐 나쁠 거 없지. 가끔은 저렇게 억지스럽지만 강한 열정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죄송해요. 열정이 너무 넘치시는 분이라서.”

    “괜찮아요. 게으른 사람들보단 훨씬 낫죠.”

    “그렇긴 한데 저렇게 항상 혼자 앞서가시다가 대사님한테도 종종 혼나요.”

    “후후 그럴 것 같긴 해요.”

    “쉿! 제가 말했다는 거 비밀이에요.”

    “걱정 마세요.”

    잠시 바람을 쐬고 들어온 준우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술을 깨는 것도 남들보다 빠른 건가?

    연구할 가치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요리사님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대사님이 걱정이 참 많으세요.”

    곱씹어 보면 그런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조금 부족해서 그런지 매사에 조금 위축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김용수 대사 역시 처음이었으니까.

    “근데 저는 그런 모습이 맘에 썩 들진 않아요.”

    “아….”

    역시나 또 한발 앞서가는 준우였다.

    단어 선택은 조금 과했지만 준우의 마음만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제가 제대로 보필해서 우리 대사관이 최우수 공관으로 뽑히도록 하겠습니다. 요리사님도 함께하실 거죠?”

    “네? 저야 당연히 따라가겠습니다.”

    월권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선배들을 제대로 보필하겠다는 의지까지 말릴 필요는 없지.

    호텔에 처음 들어갔을 때, 선배들 눈에 비춰지는 내 모습이 저랬을까? 나도 모든 것을 나서서 하겠다고 자처했었는데.

    “하하 우리 공관 직원들 열정만큼은 최고인 것 같네요.”

    옆에서 지켜보던 안지용은 뿌듯하단 듯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나는 젊고 패기 넘치는 준우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야 할지 아니면 여유 있지만 연륜 있는 안지용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야 할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치만 그게 뭐 중요한가?

    두 사람 다 스타일이 다를 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 같았으니까.

    “최우수 공관을 위하여~”

    “위하여~”

    작은 보드카 잔을 가득 채웠지만 그것을 차마 삼키진 못했다.

    40도가 넘는 알코올을 한 잔 더 삼켰다간 먹은 걸 토해 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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