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격표가 없다.
“요리사님.”
“네?”
살벌했던 첫 만찬 행사가 끝이 나고 집으로 향하던 중 윤아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러곤 감동받았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엄지만 치켜세우는 윤아.
“뭐예요 갑자기 그런 눈빛?”
“꿈이 청와대 요리사라니….”
“그냥 꿈일 뿐이잖아요.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그냥 꿈. 꿈은 원래 크게 꿔야 해요.”
세상의 모든 일이 노력과 실력으로만 이뤄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엄청난 노력과 적절한 시기에 함께 찾아오는 운. 아니, 오히려 많은 일이 운에 의해서 좌지우지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운맥이 있는 곳을 느끼고 찾아갈 수 있다면 내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이도 동갑인데 나랑 비교되잖아요. 나는 그냥 사무실에서 복사나 하고, 청소하고 그럴 뿐인데.”
“대신 윤아 씨는 파나르어를 엄청 잘하잖아요.”
“인생의 절반을 여기서 살았는데 못하는 게 바보죠.”
그렇긴 하지만 나 역시 30년을 넘게 요리만 하고 있는 사람인데….
남들보다 열심히 하긴 했지만 나도 회귀 전 이 나이 땐 별 볼 일 없었다.
“그래도 오늘 윤아 씨 덕분에 만찬이 성공한 것도 있어요.”
“제가 뭘 했는데요?”
“파나르 사람들이 치즈 많이 먹는다는 것도 알려 줬고, 겨자소스가 매울 수 있다는 것도 알려 줬잖아요. 몰랐으면 그저 그런 만찬이 됐을 수도 있어요.”
이것만은 사실이었다.
물론 원래 메뉴로도 충분히 장관을 만족시켰을 수도 있지만 윤아 덕분에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저야 여기 오래 살았으니 그냥 파나르 사람들 입장에서 말한 거죠. 근데 요리사님은 어떻게 모든 상황에 딱딱 대안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게 더 신기한데.”
“뭐…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평소 자신 있던 음식들이기도 했고, 많이 만들어 봤으니까.”
“그런 건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실력이 좋다고 하는 거예요.”
윤아는 진심으로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인정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오히려 파나르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윤아가 더 부러웠는데.
“오늘 하시는 거 보니 몇 년 후엔 티브이에서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청와대에서 요리하는 모습.”
“하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청와대 요리사들이 티브이에 나올 일은 없을걸요.”
“여튼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그렇게 팩트를 짚으셔야 해요?”
“미안해요.”
“다음에 나 모르는 척하면 안 돼요. 파나르에 계시는 동안 요리 말곤 도와줄 수 있는 건 많이 도와 드릴게요.”
이미 그런 관계가 되어 있었다.
직원으로서도 손발이 맞고, 사적으로도 취미가 비슷하니 있는 동안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제 대사님도 요리사님을 완전 인정한 거 같던데요?”
“그런가요? 그래도 속마음은 또 모르죠. 언제든 바뀔 수도 있고.”
“저한테도 처음엔 딱 저러셨어요.”
“윤아 씨한테도요?”
“네 저도 처음엔 어리다고 아무 업무도 안 주고, 그냥 잡일만 했었어요.”
엄살을 피웠지만 윤아도 웬만한 외국어 전공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이민을 왔다 해도 그 나라 언어를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사람은 수두룩했다.
“근데 제가 이 주둥이 하나로 살아남았죠.”
“아 파나르어요?”
이렇게 말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김용수 대사님 상습범이었네.
물론 나이가 든 사람이 경험이 많고, 연륜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쓸데없는 고집을 갖고 있었다.
“웃지 마세요. 저 지금 진지하단 말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풉.”
입술을 쭉 내밀고 고개를 끄덕이는 윤아였다.
괴상한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김용수 대사님은 요리사님을 인정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직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제가 윤아 씨한테도 인정받아야 해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시식 음식만으로는 항상 부족하단 말이에요. 나도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식 먹고 싶어요. 배 터지게….”
맞다. 한식당이 문을 닫은 지 한참이 됐다고 그랬지. 김용수 대사도 파나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윤아만큼 절실하지는 않았겠지.
“어떻게 하면 윤아 씨한테도 인정받을 수 있나요?”
저렇게 애걸복걸하는데 외면할 수가 없었다.
요리를 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이런 상황은 도의적으로라도 넘길 수 없었다.
“음… 좋은 방법이 있어요!”
“뭔데요?”
“요리사님 집들이하는 건 어때요?”
“집들이요? 집을 산 것도 아닌데.”
“그냥 이름이 그렇다는 거죠. 그래야 요리사님 음식 얻어먹을 명분도 확실하고!”
“그… 그렇긴 한데.”
원룸이라 그리 넓지도 않은데.
주방은 쓸 만했지만 아직 요리를 해 본 적은 없었다. 모든 끼니를 관저에서 해결하고 있었으니.
“대신 재료값은 제가 쏠게요!”
“정말요?”
“네 그 정도는 충분히 해 드려야죠. 그리고 다른 직원분들도 초대하면 어때요?”
“대사관 직원들이요? 대사님도?”
“쉿! 대사님은 빼고요. 이번엔 서기관님이랑 참사관님, 그리고 현지 직원은 그때 보신 분 있죠? 그렇게만 초대해요.”
“뭐 그럼 그러죠.”
윤아를 빼고 다른 대사관 직원들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대사관을 구성하는 진짜 외교관들인데 일하는 공간이 달라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그분들이 오실까요?”
“당연하죠. 두 분 다 먹고 마시는 거 좋아하세요.”
“한국 음식 중에 뭐가 제일 땡겨요?”
“뭐 만들어 주시게요?”
뭐가 땡기냐는 한마디에 윤아의 목소리가 급격히 톤업 되었다. 집들이의 목적이 축하가 아니라 완전히 음식에 있다는 게 증명되었다.
“뭐든 만들 순 있어요. 몇 년간 한식당에 못 가니깐 어떤 종류의 음식들이 제일 생각났어요?”
“무슨 음식이다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데,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 조금 더 끌리더라구요.”
“원래 매운 음식을 좋아해요?”
“아니요. 저 아직도 김치 씻어 먹을 정도예요.”
“그건 좀….”
그런 사람이 매운 음식이라.
하지만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달콤한 간장 불고기보다 빨간 제육볶음, 맑은탕보다 얼큰하고 시원한 매운탕, 칼국수나 수제비도 김치 듬뿍 썰어 넣어서 얼큰하게 먹는 그런 칼국수요.”
빵이나 스테이크, 파스타 등등 외국에 나가면 한국 음식과는 성격이 다른 음식들이 대부분이다. 배는 부르지만 뭔가 채워지지 않는 듯한 느낌.
그래서 더 김치 같은 것을 찾게 되고, 평소에 라면을 안 먹던 사람도 라면을 절실히 원하게 되는 것 같았다.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접수 완료.”
“메뉴가 정해진 건가요?”
“윤아 씨가 원하는 걸로 만들어 드릴게요.”
“그럼 전 제육볶음, 매운탕, 파전으로 선택하겠습니다.”
“아… 세 가지나요?”
한식 특유의 맵고 자극적인 맛이 그리웠을 것이다. 파나르에서도 매운 음식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슴 깊숙하게 파고드는 맛있게 매운맛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테지.
그런 갈증을 해소해 줘야 했다.
“그럼 요리사님 기왕 이렇게 된 거 시장에 저랑 가실래요? 같이 가서 필요한 재료도 사고, 시장 구경도 하시구요.”
“시장이요? 이미 가 봤는데요. 그리고 시장쯤은 혼자 가도 돼요.”
“여기 근처에 있는 시장 갔었죠?”
“네 또 다른 시장이 있어요?”
“제가 데리고 가려는 시장에 비하면 거긴 구멍가게 수준이죠. 그리고 이 시장은 꼭 저랑 가야 할걸요?”
“시장이 거기서 거기지. 그리고 아무리 파나르라고 해도 시장은 제가 더 잘 알걸요?”
“과연 그럴까요? 아닐걸요?”
윤아가 왜 그렇게 자신만만했는지 시장에 도착하고서 알 수 있었다.
만약 이곳을 혼자서 왔다면 골치 좀 아팠겠다.
* * *
토요일 아침.
“허… 미쳤네 진짜.”
“제가 말했죠? 혼자선 힘들 거라고?”
“진짜 여기가 다 시장이라고요? 저 끝까지?”
윤아가 데려온 시장은 거짓말을 조금 보태 하나의 작은 도시 같았다. 어디서부터 둘러봐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
“그래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오자고 했구나.”
“네 맘 편히 오랫동안 둘러보기도 하고, 아침에 와야 신선한 재료들이 많거든요.”
그건 한국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요리사들이 피곤해도 새벽 시장을 자주 찾는 이유였다.
게다가 신선한 식재료들의 에너지 덕분에 충전되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여기 시장에선 주의해야 할 게 몇 가지가 있어요.”
“그게 뭐예요?”
“그걸 알려 주기 위해 제가 같이 온 거죠!”
시장은 규모가 컸지만 그만큼 손님들과 상인들이 넘쳐 났다. 덕분에 같은 물건을 파는 가게들끼리 경쟁이 엄청났다.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끊임없이 호객 행위가 이어졌다. 바짝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정신없는 시장에서 주의해야 할 게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소매치기.
“시장에선 아직 현금 결제밖에 안 되거든요. 그래서 현금 뭉치를 노리는 소매치기가 많아요. 돈은 딱 계산할 때만 빨리 꺼내고, 절대 다른 사람한테 보이면 안 돼요. 만약 혼자라면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있어요.”
소매치기라면 한국에서나 유독 신경 쓰지 않는 것이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범죄였다.
미리미리 습관을 들여 두면 나쁠 건 없었다. 나는 앞으로 주로 공금을 다룰 테니.
“그리고 두 번째는 맘에 드는 물건이 있어도 절대 바로 계산하지 마세요.”
“가격이 싸고 물건이 좋아도요?”
“네 아무리 싸고 물건이 좋아도 바로 계산하면 안 돼요.”
이건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다.
값싸고, 상태가 좋은 물건이 보이면 빨리 낚아채야지. 왜 바로 계산을 하면 안 되지?
“이 사람들이 처음 제시하는 가격은 대부분 바가지라고 보면 돼요.”
“전부요? 이렇게 경쟁이 심한데….”
윤아는 이해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보세요. 뭐 이상한 거 없어요?”
“글쎄요. 그냥 신선하고, 크고, 가게가 무척 많다?”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을 빼면 딱히 다를 게 없는 시장이었다. 박스째로 쌓아 놓고 파는 도매상도 많았고, 소매상들까지 다양했다.
“가격표가 붙어 있는 가게가 하나도 없잖아요.”
“도매하는 곳들은 그럴 수 있죠.”
“도매뿐 아니라 이 시장 안에 가격표 붙여 놓은 가게는 단 한 곳도 없을걸요.”
그러고 보니 그냥 무엇을 파는지만 적혀 있을 뿐, 숫자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시장 내에 있는 모든 가게와 품목에 전부.
“왜 그런 거죠?”
“부르는 게 값이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정해진 시세가 있을 텐데.”
“맞아요 당연히 시세가 있죠. 그렇지만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지 손님들한테는 굳이 보여 주지 않아요.”
이렇게 넓고, 가게가 많으면 오히려 가격 경쟁이 치열해질 텐데, 내가 아는 상식과는 전혀 다른 반대의 모습이었다.
부르는 게 값이라니. 그렇게 배짱부리다가 다 팔지 못하면 어쩌려고?
“파나르가 꽤 부자 나라라고 알려졌지만 아직은 마트보다 시장 거래가 훨씬 많아요. 그래서 다 못 파는 일은 웬만해선 없어요. 배짱부릴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거죠.”
“특이하네요. 그럼 저번에 만찬 때 샀던 물건들도 바가지였을까요?”
“아니요 거긴 작은 시장이라 여기만큼 심하지 않아요. 근데 종류가 여기가 훨씬 많고 거품만 빠지면 가격도 싸요.”
“그럼 나중엔 저도 결국 여길 와야 할 텐데….”
“그래서 바로 계산하지 말라고 알려 드리는 거예요. 특히 요리사님처럼 외국인들한테는 더 심하게 바가지 씌울 테니까.”
“그럼 어째야 해요?”
시세도 알 수 없고, 대놓고 사기를 치려는데 어떻게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파나르어도 거의 할 줄 모르는데.
“잘 보세요.”
윤아는 많은 품목의 채소를 취급하는 가게 하나를 골라 다가갔다.
묻지도 않았는데 가자마자 굳이 우리가 외국인이란 것을 먼저 밝히고, 최대한 어눌하게 파나르어를 구사했다.
“방금 보셨죠? 감자 1kg가 한국 돈으로 5,000원 정도라고 했어요.”
몇 군데 더 돌아다니며, 테스트해 봤지만 대부분 비슷한 가격을 제시했다. 5,000원에서 7,000원까지.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오늘 감자의 시세는 대충 그 정도였던 것 같다.
“잘 보세요. 이제 진짜 감자 가격이 얼만지 보여 줄게요.”
이번에 윤아는 멀찌감치서부터 능숙한 파나르어로 인사를 건네며 가게로 들어갔다.
제대로 볼 줄도 모르면서 진열되어 있는 채소들을 이것저것 만져 보고는 다시 감자 가격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