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양파로 주스를
탁, 탁탁, 탁탁탁, 탁탁탁탁, 탁탁탁탁탁-
도마와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양파를 써는 작업은 보통 호텔의 막내급 요리사들이 하는 일이었다.
손 뗀 지 한참이 지났지만 이 정도는 칼질 몇 번에 금세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래요?”
싱크대에 고개를 박은 채 남은 양파를 씻던 윤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돌아봤다.
윤아에겐 요리 만화나 드라마에서나 들어 볼 법한 소리.
엄청나게 빠른 스피드로 양파를 잘라 내는 소리였다.
“미쳤다 진짜. 손 조심하세요, 요리사님.”
“걱정 마세요. 이 정도는 안 보고도 해요.”
상식 밖의 속도라 걱정이 됐는지 윤아는 내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도마가 아니라 윤아를 보면서도 같은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완전 기계네요 기계. 두께도 일정하고, 어떻게 사람 손이 이렇게 빨라요?”
크게 어려운 기술은 아니었지만 요리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윤아가 보기엔 경이로울 정도였다.
괜히 머쓱해져서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일정하게 써는 게 양파주스를 만드는 비법이에요.”
“엥? 설탕이나 꿀 같은 걸 넣어야 하는 거 아니구요?”
요리를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양파가 단맛이 얼마나 풍부한 채소인지.
하지만 그 단맛을 최대한 끌어내는 기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정한 두께로 얇게 썬 양파를 오랫동안 볶아 줘요. 아주 진한 갈색이 날 때까지.”
타지 않을 정도의 섬세한 불 조절로 진한 갈색이 날 때까지 양파를 볶아 준다. 숨이 죽어 질척해진 양파는 그제야 단맛을 최대로 뿜어내게 된다.
감칠맛까지 덤으로.
“이 볶은 양파랑 껍질 안 벗긴 양파랑 같이 끓여 주면 건강하고 달콤한 양파주스가 됩니다.”
만드는 방법까지 직접 보여 줬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한 번도 안 먹어 봤으니 그 맛을 상상할 수도 없겠지.
괜히 오기가 생기는 느낌이었다.
“자 다 됐어요. 한번 먹어 봐요.”
“꼭 먹어 봐야 할까요? 요리사님 실력 좋은 거 잘 봤는데.”
“맛보는 거 잘한다면서요. 양파주스 맛도 한번 봐 주세요.”
이런 걸 기대하고 온 게 아니라며 윤아는 양파주스를 강하게 거부했지만 결국 입을 댈 수밖에 없었다.
“흐읍.”
한 손으론 코끝을 잡고, 한 손엔 양파주스가 담긴 컵을 들어 올려 서서히 입을 벌렸다.
누가 보면 사약이라도 주는 줄 알겠다.
“어?”
“맛이 어때요? 제 양. 파. 주. 스가?”
처음엔 모기 눈물만큼만 맛을 보더니, 남은 양파주스를 단번에 털어 넣는 윤아였다.
“이거 진짜 양파로만 만든 거예요? 설탕이나 꿀 같은 거 하나도 안 들어가고? 진심?”
“만드는 거 직접 보셨잖아요. 윤아 씨가 몰래 넣은 거 아니면 저는 안 넣었어요.”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냄비에 코를 박아 냄새도 맡아 보고, 다시 한 컵 가득 들이켜 보는 윤아였다.
“나중에 좀 더 식으면 훨씬 달콤해져요.”
“이것보다 더요? 와아 진짜 대박. 어떻게 양파로만 이런 맛을 낼 수 있지? 살면서 이런 건 처음 봐요.”
당연히 처음 봤겠지.
간단해 보여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양파주스는 엄청난 인내와 끈기, 그리고 노련미가 필요한 음식이었다.
“양파 하나로만 이런 맛을 낼 수 있는데, 요리사님이 작정하고 만든 요리는 얼마나 맛있어요?”
양파주스를 맛본 윤아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 빛이 났다. 말하지 않아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번 드셔 보세요.”
“제발요.”
양파주스를 맛본 후부터 윤아의 손놀림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원래 이렇게 빠르고, 일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나.
느릿느릿 시키는 일만 하던 아까와는 정반대가 되어 있었다.
“아! 윤아 씨도 대사님이랑 저녁 같이 드시고 가세요. 아까 같이 먹자고 했거든요.”
“대… 대사님이랑 같이 밥을요?”
“네. 싫으세요?”
아무리 비싼 걸 사 준다 해도 사장님과의 합석은 피하고 싶은 법이었다. 대사관 막내 직원인 윤아에게 김용수 대사는 그런 존재였다.
동년배였던 나야 그리 큰 부담은 아니었지만.
“이제 청소도 다 했으니, 슬슬 식사 준비하려구요.”
“요리사님이 직접 요리하실 거예요?”
“당연하죠.”
방금까지 대사님과의 식사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쓰던 윤아였다.
하지만 내가 직접 요리를 한다고 말하자 곧바로 바뀌는 태도.
“좋아요. 같이 먹어요. 저도 먹고 갈게요.”
“정말요? 잘 생각했어요.”
양파주스도 기대보다 훨씬 맛있었지만 윤아의 기준으로 그건 음식이 아니었다.
액체는 그 어떤 상황이 와도 음식으로 쳐주지 않는다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된 음식 한번 맛보고 가야죠.”
“훗, 미안하지만 제대로 된 요리를 할 재료가 없네요.”
재료가 없다는 말에 풀이 죽어 버리는 윤아였다.
실제로 관저에 쓸 만한 재료들은 거의 없다는 걸 직접 확인했으니까.
“그나저나 저녁 반찬은 뭐로 하죠?”
쓸 만한 재료가 없으니, 만들 수 있는 음식의 범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냥 라면이나 끓여 볼까 했지만 파나르에서 만드는 첫 요리가 라면이고 싶진 않았다.
“며칠 전에 비 올 때 대사님이 부침개가 땡긴다고 하신 적 있는데.”
“부침개요?”
“네 사무실에서 그냥 흘러가는 소리로 하신 거라 확실하진 않아요.”
부침개라. 가볍게 먹기엔 나쁘지 않은 메뉴였다. 적어도 라면보단 성의 있어 보이니까.
그런데 부침개를 하고 싶어도 역시나 재료가 문제였다.
“윤아 씨 거기 냉장고에 뭐 뭐 있어요?”
“김치 조금이랑 감자 작은 거 하나 그리고… 그게 끝이네요.”
“하….”
김치전을 계획하고 김치를 꺼내 봤지만 담근 지 얼마 되지 않아 배추 풋내가 남아 있었다. 김치전을 만들 땐 묵은지가 제격인데.
감자전을 하고 싶어도 남은 감자는 딱 하나.
또 양파를 써야 하나?
계획에 없던 양파 파티를 해야 할 판이었다.
“좋아요! 결정했습니다. 오늘 저녁 메뉴는 김치전입니다.”
“와아아아아아.”
아직 덜 익은 김치를 요리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있었다. 진짜 묵은지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흉내는 낼 수 있었다.
“윤아 씨 식초 좀 주시겠어요?”
“또 식초요? 어딜 청소하시게요?”
“이번엔 요리할 때 쓰려구요.”
청소에도 쓰이고, 요리에도 쓰이니 오늘만큼은 만능 식초였다. 그나마 이거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김치가 아직 덜 익어서 지금 익혀 줄 거예요.”
“지금이요? 바로?”
프라이팬에 잘게 썬 김치에 설탕을 조금 넣고 약불로 오랜 시간 익혀 준다. 빳빳함이 살아 있는 김치를 설탕으로 빨리 숨을 죽게 해 식감을 묵은지처럼 만드는 노하우였다.
“그리고 부족한 김치의 신맛은 이 식초로 더해 주면 됩니다.”
“저 오늘 집에 갈 때 식초 좀 사 가야겠어요. 완전 만능이네 만능이야.”
신기한 듯 프라이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윤아였다. 자기 눈앞에서 김치마저 묵은지로 만들어 버리는데 신기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별거 아닌 거에도 크게 놀라는 윤아 덕분에 나 역시 신이 나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윤아 씨 저기 선반에 부침가루 같은 거 없어요? 아니면 전분이나.”
선반 여기저기를 한참이나 뒤져 봤지만 더 이상의 희망은 없었다. 한국 사람들이나 쓰는 부침가루가 있을 리가 없었다.
“밀가루뿐이네요.”
“밀가루만으로 만들면 바삭함이 덜한데.”
“에이… 부침개는 뭐니 뭐니 해도 바삭해야 맛있는데.”
나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부침개를 바삭하게 구우려면 부침가루나 전분가루가 필요한데 지금 이곳엔 그게 없다.
“아 맞다. 아까 감자 하나 남았다고 했죠?”
“네 쪼끄만 거 딱 하나 남았어요. 근데 그걸로 감자전 해서 누구 코에 붙여요.”
“감자전 안 해요.”
감자가 넉넉하게 있었다면 주저할 것도 없이 감자전을 만들었을 것이다. 감자는 밀가루만으로도 충분히 바삭하게 구워 낼 수 있으니.
“김치전 반죽에 섞을 거예요.”
“감자를요? 감자김치전인가? 아니면 김치감자전인가?”
전분이나 부침가루가 없을 때, 반죽에 감자 하나를 갈아서 섞어 주면 충분히 바삭함을 더해 줄 수 있다. 감자 자체가 전분 덩어리인 채소니까.
“나 왔어요.”
파나르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주방 청소를 해서 그런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어느새 창문 밖은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대사님.”
“안녕하세요, 대사님.”
“윤아 씨도 아직 있었네요. 잘됐네요. 그럼 같이 저녁 먹고 가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지금까지 관저에 남아 있던 거였다.
평소였다면 같이 밥 먹자는 김용수 대사의 말에 질색을 했겠지만 오늘은 덥석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 청소는 다 마무리되었나요?”
“네 전부 마무리되었습니다.”
“벌써요? 빠르네요.”
오늘 안에 끝내라며.
본인이 생각해도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이야 완전 새 주방이네요.”
“대사님. 덕수 씨는 요리사가 아니라 완전 청소업체 직원인 줄 알았어요.”
윤아가 마치 전설 속 인물의 무용담이라도 늘어놓듯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쏟아 냈다.
“허허. 덕수 씨가 나이에 비해 꽤 경험이 많나 보군요.”
“아닙니다. 윤아 씨가 잘 도와준 덕분입니다.”
“어쨌든 둘 다 고생 많았어요. 그럼 식사할까요?”
잠시 미소 짓는가 하더니 다시 표정이 굳어지는 김용수 대사였다.
뭔가 탐탁지 않은 게 있는 모양새였다.
“관저에 뭐 요리할 만한 재료가 없죠? 오늘은 대충 먹죠. 다음에 제대로 된 환영식 해 줄게요.”
“네 알겠습니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김용수의 어두운 표정과 한껏 기대에 찬 윤아의 표정이 대조적이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김치부침개입니다.”
얼마 전부터 먹고 싶었던 부침개라는 말이 나오자 표정이 밝아졌지만 생각해 보니 김치는 자신이 가져온 김치뿐이었다.
“김치전을 만들기엔 김치가 너무 새 김치였을 텐데.”
“맞습니다. 대사님도 요리를 좀 할 줄 아시는군요? 그런 것도 아시는거 보니.”
“아니에요. 전혀 할 줄 몰라요. 그냥 김치전은 내가 워낙 좋아해서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관저에 있던 김치가 요리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안 김용수 대사의 표정은 다시 한번 굳어졌다.
그 표정의 이유는 단순히 요리에 대한 실망감만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먹읍시다. 반찬 투정할 상황은 아니니.”
“네 맛있게 드십쇼.”
김용수 대사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김치전을 앞에 두고도 한참이나 젓가락이 갖다 대지 않았다.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었다.
김용수가 먼저 김치전을 먹기를 기다리고 있던 윤아가 결국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갖다 대려는 걸 겨우 말릴 수 있었다.
“대사님 식기 전에 이거 한번 드셔 보시죠. 맛이 꽤 괜찮을 겁니다.”
“하하 그런가요? 난 신김치가 아닌 김치로 만든 김치전은 딱 질색이라.”
꽤나 과감한 표현이었다. 이 정도면 대놓고 내가 맘에 안 든다는 의미.
반찬 투정할 상황이 아니라 할 땐 언제고.
반찬 투정이 아니라 사람 투정인가?
그래도 예의상 더 거절하기 힘들었는지 김용수 대사는 김치전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윤아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김치전을 집어 밥그릇으로 옮겼다.
“맛이 어떠십니까?”